맹인의 길은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롬 2:19~20)
나면서부터 율법의 후예인으로 전수받고 율법아래 살지만 율법을 자기지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은 높은 도덕적 삶과 배타적 성격, 긍휼이 없는 냉정한 삶의 모습입니다.
어느날 한 율법사가 예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5~3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분명한 율법의 의미를 말하는 해석을 성경에서 볼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율법 중에서 여러 가지 의미들을 부여하고 그 중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에 대해서 분별하고 그 율법을 더 중히 여기고 다른 율법을 경이 여기는 그런 경향들이 있으나 실지로 율법은 하나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사랑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율법을 자기들의 생각대로 이해하고 해석함으로 율법의 의미를 곡해하는 경향이 강하며 타락한 본성을 드러내는데 이런 경향들이 이스라엘에게도 강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라고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로 오해하며 살았으나 실지로 성경은 이삭에게서 에서와 야곱이 한 태로부터 출생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사도는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롬2:28)” 라고 하고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롬2:29), 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에게도 유기된 백성들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한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작정된 아들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시말하자면 이스라엘의 백성이라고 해서 확실한 하나님의 작정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타락한 사람의 후예들로 이방인과 구별되지 앉지만, 다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율법이 있었다는 것만 다르다는 것을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우고 율법으로 자라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유일하신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은 민족으로 생각하고 배웠으나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자기지식으로 율법을 해석한 유대인들의 자세는 옳은 관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자신은 이런 세계에서 존경받는 가말리엘의 후예로 장래 촉망을 한몸에 받고 충분한 희망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스스로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을 때, 그의 생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어기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이단의 괴수로 굳게 믿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선두에 나셨습니다.
그때 사도에게 있어서 율법 무엇이었습니까? 율법은 그의 모든 것이었고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뒤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3:20)”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사도의 영혼에 새겨진 복음이 율법을 조명하여 비취고 자기 안에서 율법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이 지각되어 마음에서 인식되어 깨달아지게 되자, 이전까지는 율법은 하늘에서 비취는 명령이고, 사람은 이를 지켜야 하는 강력한 계명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조명되어진 율법은 온통 사람을 죄인 되게 하는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사도의 마음속에 비췬 자신의 모습은 온통 혼란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자기가 알았던 율법의 거룩함이 오히려 사람을 정죄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임을 알았을 때, 이 율법을 통해서 자기들이 해야 할일은 하나님을 더욱 굳게 붙잡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비참한 상태를 조며주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의뢰할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알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고 하나님께 더욱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므로, 율법이 하는 일은 강력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 율법이 없으므로 자신이 죄인인줄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복음을 통해 사도가 깨달은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율법의 정신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자기를 죽이게 하며 철저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셔서 율법을 주시므로 더욱 분명히 하나님을 알 수있게 하셨으며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그렇게 알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계명이었고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충족시켜 드리는 시험대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되 엄하게 가르쳤고, 율법을 통해서 강력한 그들의 세계를 통합하려 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더욱 강하고 무겁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 아래 묶어 억압하는 도구가 되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엄하게 가르쳐야 했고 반복적인 학습의 도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신의 명령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나라의 법률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신의 나라를 지키는 파수꾼이었고, 그 율법을 통해서 그들의 세계를 유지하는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복음의 조명을 받은 사도의 영혼에서 생성된 지식들이 전인에 반영될 때 사도는 예전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세계에서 오만을 떨고 살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지로 자신은 율법을 행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율법으로 자기의 배를 채우는데 사용하고 있는 위선자였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율법 대신 성경이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자기들에게 부여된 특권 의식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정한 과정을 받으면 얼마든지 성경을 제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권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사도가 깨닫는 것과 같은 진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들은 일정한 권위를 부여하는 기관에 속하여 있고 그 기관에서 시행하는 일정 기간의 수업을 마치고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받았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 아니면 진리인지 진리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고, 자기가 선포한 그 성경 말씀은 절대적으로 진리라고 스스로 믿으며, 허가된 단에서 선포한 성경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자기도 순종할 뿐만 아니라 성도는 반드시 순종하여야 한다고 단호히 말 합니다.
이 말을 듣는 교회의 사역자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아! 나는 진리를 찾아 해매는 순례자가 맞는가?
나에게 맡겨진 양들을 진리의 꼴로 먹이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진리를 찾는 일이 아닌가? 하고 진리에 목매인 사람인지 확인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 속한 사역자들 대부분은 진리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실에서 호세아 선지자의 외침이 다시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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