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않느냐 도둑질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롬2;21)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행할 의무와 행하지 않아야 할 요구들을 명시한 규범입니다. 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대로 행하여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지로 율법이 하나님 형상 안에 본유 지식으로 있을 때에는 사람의 영혼에서 생성하는 지식에 율법이 조명하여 행위를 구분하게 함으로 율법을 범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교사들은 하나님도 누려보지 못한 존경을 받고, 신을 섬기는 것보다 더한 섬김에 의한 집중적인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교회는 온통 교사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큰 교회를 이루게 되면 무슨 차를 타느냐에 관심을 갖게 되고 어떻게 대우를 받는지 관심거리입니다. 더 나아가 그런 대우를 자기의 자녀들에게 세습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혀를 내두를 만한 오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내용은 정말로 기독교와는 거리가 없습니다. 차라리 세상의 명강사나 대학교 강사의 강의보다 못한 수준의 내용으로 성경을 읽고 믿습이까? 믿으세요.를 몇 번 외쳐대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스스로 주장합니다. 그 설교 안에는 구령의 핵심인 영혼에 관하여 아무런 메시지도 없습니다. 요즈음은 성공하는 방법만 가득들어 있고 처세술만 내 벧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설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단에 세울 때는 성경도 주셨고, 그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지혜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자기의 지식으로 판단했습니다. 최초 인류에게 죄를 가져온 하와와 아담이 정욕을 일으켜 낳은 아들 가인과 같이 모든 것을 자기지식으로 이해하고 판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던 것입니다.
사도가 하는 말이 이스라엘의 교사들이 남을 가르치는데 자기는 그 가르침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의 조명을 받도록 자기의 영혼에 심겨지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에서는 율법을 자기들의 지식으로 분석하고 해석하여 자기율법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자기들은 그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 율법이 조명하여 해석된 지식을 얻는 다면 자기부터 그 율법대로 행동하여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도둑질 말라고 강단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식적으로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온통 방법이 돈 버는 수단에 치우쳐 있고 어떻게 하면 성도들로 하여금 돈을 내게 할 것인지 수단을 강구합니다. 심지어는 수많은 책들을 엮어서 그 책들을 이용하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수법은 교묘해서 마치 그 돈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그 모든 것이 자기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고 결국은 자기의 소유가 됩니다. 예루살렘의 교사들과 같이 거룩의 도포를 걸치고 권위의 지팡이를 들고 한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도의 눈에는 그들이 자기는 행하지 않은 일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묘한 도둑질을 쉽게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열심히 도둑질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교사도 잘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시고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영혼에 그 모든 것들이 지식으로 새겨져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결코 변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책을 쓰는 사람은 이 책이 과연 사람들을 잘못 가르치는 책이 아닌지 반드시 성령의 조명을 받은 지식을 기록하도록 집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만약 그 책으로 인해 한 영혼이라도 실족하거나 오히려 많은 책을 내서 판단력이 부족하고 분별력이 부족한 성도들로 하여금 왜곡된 지식을 자기 교회의 교사의 책이라고 절대적인 것으로 분별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을 자기의 품안에 품으로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예루살렘을 품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의 품에 들지 않고 예루살렘의 교사들의 품에 잘들어 갔습니다. 그것은 아직 깨어있지 않은 병아리들은 판단력과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품을 더 의지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기에서 예루살렘이 품으로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전통과 역사이고 주님의 품은 진리의 품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속한 교사들이 주님보다 몇 값절 높은 대우를 받고 일하는 것은 성도들의 판단이 눈에 보이는 교사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사는 반드시 스스로 자기를 가르치는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의 영혼에 율법을 두고 그 율법의 조명을 받아보세요.
자기를 버리고 율법이 조명하는 지식을 들여다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보입니다.
'로마서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롬2;23~24) (0) | 2013.05.24 |
---|---|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롬2:11) (0) | 2013.05.23 |
교사요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롬 2:20) (0) | 2013.05.21 |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자로서(롬2:20) (0) | 2013.05.20 |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롬2:18) (0) | 2013.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