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모든 사람이 거짓되되(롬3:4)

생명있는 신앙 2013. 9. 4. 14:43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깨우치기 위해서 죄를 사용하신다는 아주 위험한 말을 듣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개혁주의자라고 말하고, 마치 자신이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개혁주의자인 것처럼 지독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를 들여다봤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교리적인 지식을 재외하고는 모든 교육을 자기의 사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자들을 교육하는 모든 체계가 전통적으로 이어온 선배 신앙인들의 교육공과를 철저히 무시하고 자기만의 공과를 만들어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런 교육이 철저히 그리스도인의 교육이라고 말하고 있었고 자기만이 가장 정당한 기독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위에서 한 말하나님께서 사람을 깨우치기 위해서 죄를 사용 하신다라는 말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죄를 짓지 않으셨으나 죄를 사용하셔서 사람을 깨우치는 도구로 삼으신다고 말합니다. 공공연히 이것을 교회에서 성도들을 향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회개하기 위해, 아니 신앙적으로 나태한 사람을 새롭게 하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하셔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짓지 않은 죄가 옆에 있으니 그것을 사용하여 사람을 일으키신다는 논리는 사람을 회복시키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무능을 스스로 인정하거나, 하나님이 불완전하시다는 것과, 또는 죄가 아니면 사람의 회복을 불가능하다는 왜곡된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은 18세기 입장에서 본다면 지극히 이단적인 사고로 주의 해야하는 진리의 입장이 아닙니다. 물론 21세기에 이르러 알미니안주의자가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오히려 이상하겠지만, 뭐라고 말하든지 하나님께서 죄를 사용하셔서 사람을 깨우친다는 주장은 하나님께서 완전하시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 주장에 따라 죄를 지으시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은, 죄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어떤 세력 처럼 말하고, 지으시지 않았음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세력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심각하게 왜곡된 가르침이 되어 당연히 교회의 교리에서 배척을 받을수 밖에 없는 주장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교회의 강단에서 자신있게 선포하는 것은 위험한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의 판단력이 둔하여 그런 가르침에 아주 익숙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아주 감동적으로 받고 아멘으로 화답까지 합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사람이 객관적인 진리를 접할 때 맹목적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성도의 무능을 탓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곡된 지식을 가르치고 그 지식을 무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교회의 예배 현장을 지켜 보시다가 왜곡된 진리를 가르치는 설교자의 말을 들으실때 얼마나 실망하시겠습니까?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이전에 속히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타락한 신자가 신앙에서 미끄러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지에 관한 저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과연 신자가 죄에 미끄러져 있는 것이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잠시 죄에 방치해 두시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의 말과 같이 사람의 영적 충만을 주시기 위해서 혹은 타락으로부터 회복하거나 신앙을 성장하시기 위해서 결코 죄를 사용하시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냄새도 싫어하십니다.

죄에 관한 말조차 신자들의 입에서 나오는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때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격리 시켜야 하고
, 하나님은 죄를 생각조차 안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성도를 일으키셔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선지자를 보내셔서 진리인 말씀을 보내셔서 깨우치시는 분이시므로, 거짓을 손도 대지 않으시고 성도를 새롭게 하시고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진리만이 성도를 깨우치고 새사람으로 인도하며 하나님을 알게하며 죄를 깨우치게 합니다. 진리가 아닌 그 어떤 지식으로도 성도를 올바르게 깨우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위해 잠시 신자를 죄에 두셨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비 성경적인 주장입니다.

개혁교회의 교리가운데 도르트 총회에서 결의한 중요한 사상이 있습니다. 이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을 대항하여 진리의 교리를 선포한 유명한 교리인데 그것이 칼빈주의 오대 강령입니다. 그것은 1,전적 타락, 2,무조건 선택, 3,제한 속죄, 4,불가항력적 은혜, 5 성도의 견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는 한번 택하신 성도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말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정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택하셨을 때 버리실 것을 전혀 생각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된 이후에는 결코 타락하여 넘어질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교리적 해설이 개혁교회의 성도들에게 필요합니다.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붙잡으신 손은 결코 놓지 않은 다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수 밖에 없는 교리적으로 분명한 논리적 진술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떻게, , 그리고 그 교리가 진리이며, 전체 교리에 조금도 부조화를 드러내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빛을 발할 것인지 확실히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런 신앙적인 확신과 지식을 가지지 않으면 이 교리로 인하여 오히려 생활에서의 신자의 타락과 심각한 오류로 인하여 구원파와 같은 거짓된 이단적 주장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거듭난 사람으로 새사람이 되었으나 자꾸 죄에 넘어지고 고난을 당하며 비극적인 삶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사도는 이를 죄에 이끌려 넘어지는 자기안에 있는 죄로 본 것입니다(7:14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7,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0,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그것은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렇게 사도는 자기 안에 거하는 죄의 정체를 분명히 증거했는데 그것이 바로 거듭나지 않은 지성의 지식들을 거듭난 지성의 지식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결국 자기안에 있는 거듭나지 않은 지성의 지식들의 정체가 죄라는 사실을 거듭난 지성이 본 것입니다.  

결국 신자 안에는 두 가지의 지식 그릅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지식 그릅들 중에 어느 지식이 신자로 하여금 활동하게 하느냐에 따라 죄와 선이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거듭난 지성과 거듭나지 않은 지성 이 둘 가운데 어느 지성이 타락한 사람의 본성인지, 그리고 본성에 대비한 다른 지성은 무엇인지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점에 관하여 일관적으로 설명을 드리면서 여러분이 바른 신자로서 신앙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하는 이 복음의 말씀중 한 말씀이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함께 여러분의 영혼에 심겨지고, 영혼에서는 성령께서 조명하심으로 거듭나지 않은 지성에 새로운 거듭난 지성의 지식이 생겨나 새로운 사람이 되어지는것입니다. 그래서 새사람이 여러분안에서 탄생하여야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본성이 타락한 거짓되고 왜곡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만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거듭난 지성을 구성하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지식이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안에 새로운 한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곧 그 사람이 거듭난 새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성도의 견인에 관하여 확신을 가질 말씀을 드립니다.

옛 사람의 본성에 복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지식으로 구성된 한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타락의 유산을 물려받은 본성과 이 본성과 전혀 다른 무지와 오류가 없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지식의 그름으로 구성된 거듭난 지성이 새롭게 생겨났습니다. 이 지성은 말씀자체가 성령께서 복음을 조명해여 생성한 지식이며 생명을 가진 지식이기 때문에 이 지식은 결코 타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으로는 왜곡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코 넘어지지 않고 타락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번 복음이 심겨져 새생명을 얻은 사람은 그안에 생명이 자라고 있기 때문에 결코 다시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의 견인입니다.

왜곡되고 거짓된 무지와 결함으로 가득 채워진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진리의 지식이 심겨져 새로운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 안에 한 새사람이 심겨졌는데 그것이 거듭난 지성의 지식들을 가진 것입니다. 이 지식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은 영이고, 사람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혼에 생명이 심겨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생명이 점차 성숙하여 자라나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고, 죽을 수 없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사람의 영혼에 심겨져 있는 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결코 분리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 사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