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모든 사람이 거짓되되(롬3:4)

생명있는 신앙 2013. 8. 27. 18:16

계속해서 거짓 된 사람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니 이 말은 평생을 해도 다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를 죄로부터 죽이기 위해 더 살펴보는 것이 은혜로울 것이라 생각됩니다.

 

거짓된 사람의 죄에 대한 자기의식

 

선배 신학자들이 가르치는 교훈은 사도의 말과 전혀 다름이 없이 전적인 타락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거짓되되 라고 말할 때 사람의 자체에는 선이라고는 조금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죄에 관한 개념을 살펴보면 선배들과 사도의 가르침에서 많이 멀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자주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당연한 가르침입니다.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는 자기는 선한 삶을 살고 있다고 역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하게 살고 있으니 그 선을 계속 유지하여 죄를 짓지 말라" 이런 의미의 말입니다.

여기는 항상 의문이 있습니다.

죄를 죄로 보는 그 의식이 선에서 출발한 것일까? 우리에게는 선이 없다는데 죄를 죄로 보는 그 의식이 나올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행한 범죄행위에 대한 인식 때문에 그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은 거듭난 영혼이 자기의 죄를 보고 통회한다고 말합니다.

지난번 시편 51편을 묵상할 때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완전범죄로 즐거운 날을 보낼 때 선지자 나단이 와서 죄를 들춰내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감추어져 있는 죄가 모습을 드러냈고 적나라하게 증언 되었을 때 다윗은 자기의 행위로 슬퍼했습니다.

이 사실을 말하면서 저는 사람에게 있는 두 지성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거듭난 지성과 거듭나지 않은 지성이 우리 각 사람 안에 있고, 거듭난 지성이 없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인식하는 개념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죄를 짓지마세요" 라고 말할 때 의미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자기 안에 선을 의식하는 거짓된 지식에 스스로 빠져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지각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칼빈 선생은 말하기를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위대하고 탁월함, 그리고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 받으려고 하는 자만에 빠져 있다"고 기독교 강요 2권에 상세히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온전함을 뼈속 깊이 새겨두고 그것으로 자기의 정당성을 입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자존심에 조그마한 상처를 가해온다면 온힘을 다해 그것을 방어하려고 덤벼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과 자기 안에는 선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주 무익한 존재라는 것을 영혼 깊숙이 인식하는 자기부인으로부터 출발된 지식에서 시작된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죄를 짓지말라" 라고 말할 때 자기 안에 가진 죄 의식에 대해서 날카롭게 살펴보고, 바로 죄라고 판단하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죄를 죄라고 보는 자기 의식의 정체"

 

다윗의 범죄를 통해서 살펴본 사람의 본성은 '자기 죄를 인식하는 거듭난 지성''자기의 행위를 죄라고 인식하면서도 이를 정당화하려는 거듭나지 않은 지성'과 뚜렸히 구별된 이중적인 자기인식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죄를 죄라고 인식하는 지성은 거듭난 지성으로부터 라고 말하려고 합니다. 만약 거듭나지 않은 지성이 죄를 의식하지 못한다면 이 말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의 행위가 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를 숨기려고 했고, 결국은 사람들로부터 정당한 행위라는 인식을 갖게 했고 합리적으로 죄를 감추었습니다. 다윗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은 욕구로 인한 밧세바와의 부정한 동침이었고, 이로 인하여 이방인의 손을 빌려 우리아를 죽이는 대리살인이라는 죄를 저질렀으며, 죄가 완전히 감추어지도록 하기 위해 남편이 죽고 홀로 남은 여인을 자기의 아내로 받아들임으로 오히려 호의적인 인식을 얻은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다윗은 자기의 행위의 추악함을 완전히 수면 아래로 감추었습니다. 이것이 거듭나지 않은 지성이 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성은 분명히 죄를 의식하고 있었으므로, 반드시 거듭난 지성만이 죄를 인식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물론 죄의 본질을 진리의 입장에서 의식하는 것으로서 죄를 죄로 보는 자기의식의 정체를 파악하려한다면 옳은 말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죄의식의 자기정체를 파악하려는 것입니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거듭나지 않은 지성으로의 다윗이 자기의 행위를 감추고 드러나지 않으며 정당화하기 위해서 속이고, 거짓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거듭나지 않은 타락한 지성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 놀라운 인식 능력의 정체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듭나지 않은 자기의 지성을 지키려는 견고한 성입니다. 이 성을 함락하지 않고는 사람은 결코 자기의 추악한 죄인과 보잘것없는 피조물, 결코 자기스스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구원함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이 바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자기의식입니다. 게다가 거듭났다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신앙적인 모든 오류도 이것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가장 먼저 자기 내면과의 격렬한 투쟁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어떤 행위를 악이라고 규정하며 그것을 죄라고 판단합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의 세계에 드러난 자연인의 본성으로부터 드러난 도덕적 체계이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죄를 죄라고 말하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지성이 말하는 죄는 존재론적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통해서 볼 때 거듭난 사람 안에 있는 두 지성이 공히 선악을 가지고 있으나 그 개념에 있어서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지성의 선악은 타락 후 사람의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고, 거듭난 지성의 선악은`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에 의한 인식으로부터의 선악입니다. 이를 더 추론한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하셨을 때 지시한 선악은 타락 후에 의식하게 될 선악을 말씀하신 것이고,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선악은 하나님의 형상에 주셔서 인식할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타락 이전에 인식될 선과 악은 타락 이후의 선악의 본질과 비교할 때 어떻게 다를까요? 그리고 선악을 판단하는 근거와 기준이 무엇일까요? 오늘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타락을 중심으로 전후 상태에서의 선악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성경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분명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은 타락 이전의 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타락이후에 태어났고 타락의 상태에 있으므로 모두를 정죄하고 사람에게는 선이라고는 조금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28). 그러나 이에 반하여 사람들은 성경의 조명과는 전혀 다르게 자신의 삶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모든 사람이 타락하여 선이 없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타락한 상태에서 스스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자신의 삶의 대부분의 행위를 죄라고 판단되지 않은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판단기준으로 악이라고 판단되는 행위를 구별하여 죄라고 인식하는데 이렇게 인식된 죄된 행위를 하나님께 자백하여 용서를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의 양심과 판단의 기준에 따르게 되는데 이렇게 판단하는 선은 실지로 선이라고 의식한 선이 아닙니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한 선을 자기에게 조명해 보지 않고 자기의 의식으로 선을 판단하는데 그 의식이 타락한 의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할 때는 선을 분명히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에 대한 시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대로 우리가 타락하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으로 선이라고는 조금도 없으므로 우리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로 타락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우리의 의식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죄를 판단하는 그 판단이 타락한 본성의 판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 안에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거짓된 마귀가 우리를 사로잡고 스스로 선과 악을 구별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의 판단으로 선한 사람처럼 의식하게 하며 자만심으로 똘똘 뭉치도록 하는 죄의 본질이 내제하고 있는데 그 정체가 바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자기 지식인 것입니다.

 

사람은 성경으로부터나 사회의 규범을 벗어난 일탈 행위나 자기의 양심에 어긋난 행위에 해당되지 않은 모든 삶은 죄가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일반적인 삶으로부터 스스로 일탈적인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 나는 죄를 짖지 않았다고 자신감을 가지고, 그 자신감으로 자기의 행위를 조명하여 일탈행위라 발견되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뿌듯한 자긍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일탈 행위라도 발견된다면 그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얻으려 하고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어떤 감정을 경험하면 하나님과의 소통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하지 않지만 한 주간 동안 살면서 행한 자기의 죄를 찾아 고백하는 의식으로 예배의 형식 중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별도의 고백의 시간을 갖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중심에 위치하고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죄를 찾고 고백하며, 용서를 받고, 또 범죄한 일탈 행위에 대한 고백과 용서의 느낌을 반복하는 의식 속에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반복된 일상 속에 눈을 뜨고 삶을 유지하는 생활 속에서 일탈 행위로서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의 반복된 삶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의 본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지각된 지식의 한계 내에서의 삶 이상을 사람에게 인식하도록 할 수 없습니다. 죄는 그 본질이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이므로 사람의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된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지식 이상을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되고 무지한 결함을 가진 지식이 스스로 자기의 선을 규정한 왜곡된 선으로 스스로 자신을 무죄하게 인식하도록 하고 그 로부터 벗어난 일탈된 행위를 죄로 인식함으로 무지와 결함이 죄를 규정하여 정죄하는 아이러니가 타락한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선악을 아는 일이 우리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