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롬3:5) 11,

생명있는 신앙 2013. 9. 19. 05:00

보내시는 목적,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이시라로 말 한다면, 선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신다고 말하실 때 그 구원의 의미를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한정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을 완강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악을 선으로 이기시고 계셨기 때문에 꾸준히 선을 행하시면서 사람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관심적인 행위를 하셨는데, 그것이 끝이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복음서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이야기에 감동을 받곤 합니다.

아들은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게 살고 있고, 아버지는 동구 밖에서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학수고대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말씀이었으며 죄를 지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사랑하시고 기다리신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른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객지로 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지금껏 집에서 아들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아들들이 이스라엘이고 창조 계획에 따라 아담 안에서 이 땅에 태어나도록 작정되어진 사람들입니다.

이방인이었던 우리는 종종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아들들 사이를 착각을 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떻게든 우리는 우리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왜곡된 적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백성에게 보냄을 받았습니다. (1:11, 1:21, 11:1)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사도가 말한대로 우리는 소망도 없고,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며,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습니다. (2:21)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고전1:28)입니다.

우리는 탕자도 아니고 하나님의 관심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하고 정욕을 일으켜 낳은 정욕의 열매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어졌다는 것을 성경이 너무도 분명히 말함으로 우리의 슬픔은 더해졌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를 눕혀놓고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잔인 얼굴로 분을 분출하는 그 사람이 자신임을 알았을 때, “내가 왜 예수를 죽이느냐고 강하게 부정하며 펄쩍 뛰던 사람이 예수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예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비밀을 알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았고, 하나님도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외인이며, 저주밖에 더 받을 것이 없는 슬픈 인생을 가지고 태어난 이방인인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약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잔인함에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분노에 자신을 놓으시고 자신이 깨어지는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당신이 짊어지시려고..................................,

이 비밀을 간직하고 우리로 하여금 남김이 없이 분노를 쏟게 하셨습니다.

!

우리가 분노의 만족을 채우기 까지,

우리가 분노를 쏟아내고 그것이 얼마나 아픈 일인지 스스로 알게 하시려고,

우리의 손에 망치를 들리우고, 주님의 손과 발에 잔인하게 못을 박도록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분노를 하나도 남김없이 주님께 쏟아내고야 비로서 우리가 행한 일을 깨닫고 슬퍼하게 됩니다.

내가 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느냐!고 놀라 반문하며 문 앞에 주저앉아 통곡하던 그 사람이,

비로서 왜 자기가 주님을 죽여야 했는지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미움, 분노, 원망, 저주를 모두 쏟아내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스스로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이 땅에 태어났다가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 처해저야 하는 비참한 운명을 바꿔주시기 위해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도록 했습니다.

우리의 지성에서 비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지성에 새로운 지식이 생겨났고, 그 지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게하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지성에 태어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