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롬3:5) 15,

생명있는 신앙 2013. 9. 23. 04:31
사도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분명히 인식하고 말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 의가 아니면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우리 가운데에는 아직도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분명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에게 일러 가라사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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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난 사람은 그 영혼에서 분노와 미움을 모두 쏟아내고 마음이 청결해졌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의 원수에게 모든 것을 쏟아내고 허무하게 되었습니다.

분노도 미움도 모두 쏟아 내버리고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미래도 없고 희망도 없으며, 오직 그에게 주어지는 비참을 당당히 받으며 가는 길 뿐입니다.

그는 자기를 모두 쏟아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므로 실지 자기를 비웠고 이제 자기는 자기가 아닌 예수죽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를 죽임과 함께 실지 죄인인 자기가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죽이는 이유는 첫째로 우리의 존재에 대한 분노이고, 두 번째로는 필연적으로 들어가는 미래의 심판에 대한 비참으로 인한 저주이며, 이 모든 원인인 하나님 아들들의 정욕에 대한 정당한 심판의 행위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아 이방인으로서 정욕의 열매로 비극을 앉고 태어났으며, 필연적으로 죄를 행할 수밖에 없는 한 원죄를 나눠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조금도 없고,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하나님을 전혀 알 수도 없는 본질적으로 죄만을 행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였어도 정욕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없었을 것인데, 우리가 태어나 하나님에 관하여 무지한 상태에서 비극을 앉고 살다가 심판에 이르는 저주를 당하는 것은 지극히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때 우리의 모든 분노와 저주 그리고 우리 미래의 비극을 그에게 쏟아냄으로 우리 자신에 있는 모든 악한 것들을 쏟아내었던 것입니다.

누가 이를 알 것입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 53장에 너무도 분명히 이를 말하였습니다.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며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행하시기 때문에 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 편에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선입니다.

선에는 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선은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죄로 인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기 까지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지었고, 그 죄의 행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는 진노를 받는 것, 이 모두는 필연적인 선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은 정리되고 더 이상 어떤 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죄도 마무리 되었고,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일도 끝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의 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것을 마무리 했습니다. 더 이상 율법이 요구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모든 것을 질서에 따라 조화롭게 잘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답고 선한 것입니다.

바로 이때 우리에게 가르쳐 준 또 하나의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일이 마무리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문을 밀고 들어와 한발 한발 진리의 동산으로 발을 옮길 때 문 앞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따뜻한 포옹과 평화스런 인사로 모두를 아주 반갑게 맞이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여행자들과 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복음의 문을 통과하지만 우리를 맞이하는 그분은 아주 달랐습니다.

잃었던 아들을 만난 듯이 감동적인 만남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우리는 또 한번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는 다름 아닌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죽음, 그리고 다시 살아난 부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이 아닌 또 하나의 행위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선을 뛰어넘은 행위로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함이요(16:10)”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으니라(6:18)”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6:7)

그리고 부활은 "하나님의 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전통 신앙으로부터 왜곡되어 곁길을 간 우리의 신앙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할 중요한 장으로부터 교훈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못되어졌고, 왜 세속주의 신앙에 깊이 빠져 버렸는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의 말을 너무도 잘못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지식은 구체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종교개혁이전에 천주교회가 성도들을 무지 몽매하게 하여 단순히 종교적인 사람으로 살게 함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금하고 신부들만의 전유물로 했던 때와 같이, 오늘날의 교회는 아주 어렵고 추상적이며 의미를 알지 못하는 많은 영적이라는 언어들로 우리를 미련하게 해왔습니다. 수많은 정의되지 않은 개념 없는 언어들이 교회 안에서 홍수처럼 쏟아지고, 수많은 새로운 말들을 만들어내서 성도들로 하여금 더욱 혼란스럽게 해왔습니다. 어느 하나도 재대로 정의되어진 언어를 구사한 적이 없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쓴 책들을 일어보면 무엇을 말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적인 언어들이 설교집안에 가득 채워져 있으나 한 구절도 제대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없는 추상적이고 기독교적이 언어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고차원적인 영적 신학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글들을 읽게함으로 성도로 하여금 은혜를 끼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언어들은 하나도 실천되어질 수 없는 말들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권합니다.

우리를 가르치는 한 사람의 기독교 사상을 알려면 그 사람이 한 말을 10번만 되씹어 보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으므로 가능한 설교자의 설교를 주의 깊게 듣고 그 의미들을 곱곱히 되씹어 생각해 보시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 가르치는 사람의 사상을 잘 이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