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말과 같이 사람이 불의를 행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에게 나타나게 되었으니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유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였으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타나실 일도 없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일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불신자들의 농담이나 혹은 하나님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말로 들으면 조금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비난하는 조소의 말로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강단에서 이런 말을 거침이 없이 쏟아내는 것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라는 것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보험에 가입을 했더니 다른 사람에 의해 사고를 당했고, 그 사고로 인해 보험금을 받을 수 있게 되자 이를 흐뭇하게 생각하며 사고로 인하여 겪을 아픔보다는 보험금 받는 일에 더 만족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고로 인하여 당한 당사자의 불행에는 관심이 없고 돈을 손에 쥐고 흔들며 기뻐하는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신학을 배우고 정의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궁극적으로 사람의 죄가 당시에는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피조세계에 오시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사랑을 드러내실 수 있게 하였으니 하나님의 창조에 더 큰 유익을 준 것이라고 오만하고 사악한 혀를 놀려대는 설교자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귀중한 논거를 발견이라도 한 듯이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지성이 생성하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되는 것이요. 참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찮은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성이 만들어낸 지식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실지로 삼위 하나님께서 스스로 기뻐하시고 만족하시며 각기 기쁨과 만족을 나누어 가지시므로 그것을 객관적인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하나님의 도움을 조금도 받지 않고 스스로 지각하여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노래한다면 그것은 정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영광과 완전하심, 그리고 만물을 지으신 것을 찬양하는것이 하나님께 가장 즐거운 일입니다.
그것은 그 어디에서도 전혀 들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기 때문 놀라운 기쁨입니다.
우리에게 지성을 주시고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선한 말을 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말로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하는 것이 유익합시다.
설령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유익을 가지시는 일이 있을 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게 유익이 된 것이라고 말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의 범죄로는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우리가 범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나타나실 일이 없을 실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실 필요도 없고, 진노를 내리실 일도 없으실탠데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효과적으로 나타나실 수 있었다고 말하는 악을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늘 상 말해왔던 것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태어났어도 우리의 영혼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질 수 없는 정욕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졌습니다.(마 13:18)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밭에 말씀의 씨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성에 들어왔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조명하심으로 지성에 말씀이 거울로 비춰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은 그 비춰진 말씀대로 지식을 가졌습니다.
마치 인화지위에 사진이 드러나듯이 우리의 영혼이 지식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람의 지성은 이렇게 자기지식을 생성합니다.
타락한 모든 사람은 평상시 자기지식의 조명으로 지식을 생성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리사 우리에게 말씀을 심겨주시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이런 말씀을 갖게 되자 그 말씀은 타락한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아니하고 가진 지식과 전혀 다른 지식을 가진 것입니다.
이 지식은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우리에게 새겨지게 되자 우리의 지성에는 놀라운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일어났고,
하나님을 존재적이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본질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사람들로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었고(엡2:3),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갈4:8).
우리의 운명은 비참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욕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존재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근원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욕의 열매인 것으로 죄 자체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벗어보려고 해도 벗을 수 없는 우리의 본질이고 이스라엘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을 만나고 직접 대화를 하며, 하나님을 인식하려고 해도 올바로 인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지음으로 드러난 폐단입니다.
절망스럽고, 우리의 존재가 저주스럽기 때문에 우리를 존재하게 한 하나님의 아들들을 미워하고 원수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을 알게하는 말씀이 비춰지고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역사로 우리 안에 거듭난 새사람이 지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으로 사도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이 없다는 사실을 선언해주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라고 사도가 선포한 것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선포에 우리의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주 예수!
우리가 믿을 대상,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아들을 보내셨으나, 죄를 밥먹 듯 즐겨하고 정욕을 행하기를 더 기뻐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들을 배척하였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은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돌려지게 된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냄을 받은 아들을 배척함으로 구원이 우리에게 임한 것이 하나님께 유익이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한다.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냐!
이 말은 우리에게는 유익인 그 일이 이스라엘에게는 진노가 되는데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사도의 반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이런 식의 판단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되었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왔다,라든가 하나님의 은혜, 죄의 용서 등이 피조세계에 있게 되었다 라는 오만한 말은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는 악한 사단의 변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디 사단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은 본래 유대인들에게 선포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받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이방인에게 유효한 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말을 어디에든지 적용되게 되었다고 (행 17:30)에 말했습니다.
그러나 본래 이 말은 이방인들에게는 적용되어지기 쉬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회개의 의미를 재대로 알 수 없었고, 지금도 쉽게 적용되어지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범죄를 알아 자기가 거듭나 새사람이 되고 나서 비로서 깨달을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주 예수를 믿으라” 이 말이 더 효과적이고 분명하게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내신 아들을 배척하고 죽게하자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이스라엘이 범죄 함으로 얻게 된 덤입니다. 하나님께는 이것이 결코 더 큰 기쁨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보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회개한 것이 더 큰 기쁨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보다 더 큰 기쁨을 항상 생각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서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전심을 다하여 순종하는 각오로 하나님을 행하여 찬양과 영광을 노래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버림을 받으시는 그 진노가 하나님께 슬픔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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