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믿는자를 의롭다 하시려(롬3:26) 15,

생명있는 신앙 2013. 12. 31. 03:00

우리에게 믿음을 위한 필연적인 지식들이 이처럼 많은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에 합치되어야 온전한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높은 지식과,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고매한 지식이라도 하나님의 선에 합치되지 않을 경우, 그 지식은 왜곡되고 거짓된 지식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은 곧 질서롭고 조화로움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든 만물이 질서롭고 조화로운상태였던 것입니다피조물들의 존재의 상태가 하나님안에 있는 '선'에 대비하여 합치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존재상태와 행위가 '질서롭고 조화로운 상태'이어야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치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뒤로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보내심과 그의 삶에서 우리가 믿어야 할 근거가 되는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그 의를 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심의 그 근원이 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그 결과들을 하나님의 선의 관점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범죄 후 그들의 삶에서 열매로 나타난 결과들 가운데 이방인의 존재에 대한 정의를 도출해야 합니다. 이 정의가 없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에 합치 되지 않은 자기중심의 의미로 이해될 뿐입니다. 

성경은 결과론적인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후 행한 행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점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범죄하게 되었을 때, 여러가지 다양한 욕구가 그들에게서 일어났지만, 성경은 이방인의 존재와 관계하여 중요하게 가인의 출생과 아담과 하와의 동침을 말하므로 '성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후 동침을 하였고 가인을 잉태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동침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에 합당한 행위인지 가부간에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침은 사람이 후손을 잉태하기 위한 필연적인 행위이고, 이것은 생육의 조건이기 때문에 그들이 생육을 위해 동침을 하였든, 아니면 단순히 성욕을 채우기 위해 동침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을 통해서나 교육을 통해서 결코 분별할 수 없고, 그들 자신들 마저도 구분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그들은 처음 동침으로 가인을 잉태하였고 생산하게 되었는데, 그 뒤에 아벨을 잉태하여 생산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동침 행위의 선악의 의미를 판단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진리에 대하여 궁구하여 있을때, 예수께서는 '그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7:16.20)'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고민을 말끔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의 동침 행위의 본질은 그들이 잉태하여 낳은 가인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선에 합당한 행위를 한다면 가인을 잉태한 성욕의 행위는 하나님의 뜻대로 일 것이지만, 하나님의 선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행위는 범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지로 가인은 하나님의 선에 전혀 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여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왜곡된 지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여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을 지역적인 하나님으로 바꾼 왜곡되고 잘못된 인식을 가지는 것을 드러냈고, 제사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자기 소견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가인에게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으로 이난 인식이 아담과 하와의 동침의 결과였고, 그것은 하나님의 선에 합치되지 않은 열매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정욕의 열매, 곧 죄로 말미암은 열매라는 사실을 알수 있고, 가인과 같이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없는 사람의 출생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한 질서가 아닌, 정욕으로 인하여 탄생하도록 허락된 존재라는 사실이 입증 되어진 것입니다.

이로써 창조 계획에 속하지 않은 허락된 존재는 이 세상에 태어나거나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정욕에 의한 열매라는 조건적이었습니다

반면 아벨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한 아들임을 제사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뜻대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에게 죽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를 위해 희생을 당하는 삶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삶의 모형이었고,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이방인에게 십자가에 죽으시는 고통을 당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들에게서 내어주심이 되신 것인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는 것은 창조 계획에 속한 사람으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져야 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스라엘에 속하였는데 곧 아벨이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지고 가인에게 죽어야 하는 존재와 같은 의미로 보내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였고, 그들의 거절은 실지로 그들이 죄를 범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구원을 그토록 기다렸지만, 그들의 영혼에 잘못된 메시아에 대한 지식을 가짐으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거절한 범죄를 더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순식간에 땅에 떨어져 멸시 되었고, 무시당하였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의 불순종은 더하여 가중되었고 계속되는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심하게 아프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거절을 결코 용서 할수 없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지 못한 최초의 결단이셨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참고 인내하시다가 그들의 불순종과 범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주셨건만, 거절당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신 얼굴을 돌려 이방인에게 향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보시고 그들에게 인애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화목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방인이 하나님께 스스로 화목을 청할리는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화목을 청해야 할 아무런 지식도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이방인의 영혼은 자신들의 존재와 그리고 미래,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지옥으로 인하여 자기들을 존재하게한 하나님의 아들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분노하였으며, 자신들이 정욕의 아들들로 태어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도 미워하여 원수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한 분노를 쏟아내므로 온 세상에 미움과 분노와 증오를 생산하는 근거지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만 드러내는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도 동일한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들과 화목하시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화목하시기 위해서는 죄의 근원을 죽이기 위해 범죄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죽어야 하는 것처럼, 이방인의 분노를 잠재우시기 위해서 죄의 근원인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처음 아담에게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시고 화목을 청하셨는데, 그 내어주심이 단순한 내어주심이 아니고, 아들을 화목을 위한 제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화목제물을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화목하시기 위해 친히 이방인에게 제물을 내어주시고 계십니다. 자세히 들어다 보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이방인의 관계에서 제사를 주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제물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으며, 그 제물을 받는 사람을 이방인인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일, 하나님의 큰일 곧 하나님께서 집행하시는 그 제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제사를 받는 존재는 이방인입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셨고, 이 일을 믿으라,’ 라고 이방인에게 말씀 하시고,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라고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말하는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시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몸둘 바를 모르게 됩니다.

항상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영광을 요구만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존재 앞에 우리의 비천함을 드러낼 뿐이었는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에게 내어주시고 이방인과 화목을 청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제사를 주제하시는 분므로 나타나시니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표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녹아져 내립니다.

그져 황송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대접을 받을 존재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을 청하시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사실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내어주심이 되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근본적인 미움과 분노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모질게 고난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이방인이 그 예수를 죽인 것이고 그 이방인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화해를 청하여 우리에게 아들을 내어주셨는데 우리는 그 아들에게 인정사정 두지 않고 잔인하게 고문하여 죽인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죄를 더욱 쌓았고, 더욱 용서 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죽인 그 예수를 살리셨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시원하니” “그렇게 하니 분이 풀리니그때 비로서 우리의 눈이 열렸고,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일을 했는지 이해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 내가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큰 죄를 지었고 우리의 존재의 악을 더하고,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욱 용서받을 수 없는 철저한 나락에 빠져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참 감람나무의 본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베어버리신 하나님이 돌 감람나무이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으며, 천국에서 거짓된 지식을 드러내기 때문에 지옥에 가둘 수 밖에 없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죄를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두 팔을 벌리시고 우리는 안아주시고, 하시는 말씀이 다 용서하신다고 하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나를 너희에게 주었다.

바로 너희와 화목하려고 한다. 하시고 우리의 잔인함과 살인을 덮어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믿을 때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