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그런즉 자랑할 대가 어니냐 (롬 3:27) 1,

생명있는 신앙 2014. 1. 1. 09:39

그런즉 자랑할 대가 어디냐 (3:27)

 

2014년 새해 아침이 밝아 왔습니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제까지 하나님의 의에 관한 실제적인 의미를 마쳤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야할 의미들을 살펴 볼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믿음의 행위에 대한 공로사상에 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기나긴 설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셔서 죽으심을 당하시므로 실질적으로 우리의 죄가 더하여진 것을 보았습니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은 하나님을 죽인 죄에 해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시고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까?

아벨이 가인에게 맞아 죽는 것은 단순한 우발적인 실수로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의 질투가 과하게 표출되어 아벨을 죽이게 되었다는 단순한 의미인 우발적 실수라는 생각은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벨이 가인에게 죽는 것은 아벨의 영혼 속에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의식이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희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은 자기들의 범죄로 인하여 행한 행위들에 대한 결과를 의식합니다.

가장 먼저는 범죄로 인하여 정욕을 일으켜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속하지 않은 허락에 의한 아들들을 존재하게 한 사실을 가장 먼저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땅에 이방인들이 존재한 것은 자기들의 범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지고 불신자를 대할 때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의 범죄가 정욕을 일으켜 있게 한 존재들이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곧 이방인의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범죄 때문이라는 의식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은 실질적으로 불신자들을 자기의 정욕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모든 하나님의 아들의 행위는 곧 자기의 행위라는 공동체 의식이 이방인에 대한 죄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존재한 이방인의 존재에 대한 죄의식이 왜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이 공동적으로 가지는 것입니까?

아담 안에서 하나인 모든 사람들은 본래 하나의 지식에 의해 인식을 가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모든 지식은 하나의 본유지식에서 같은 인식을 가지도록 되어 있으나 사람에 따라 하나님의 선에 합치되는 또 다른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불신자들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는 것은 그들이 정욕을 제어하고 생육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더라면, 결코 이방인이 이 땅에 태어나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그 속에서 미움과 원망과 분노로 세상을 살다가 결국 영원한 지옥에 버림을 당하여 영원토록 고통받는 상태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은 가장 먼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세상과 구별된 의식에서 비롯되는데 이것은 그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고 그 말씀에 의해 거듭난 새 사람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초의 사람에게 주셨던 본유지식을 가진 상태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드러내 주셨는데,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마침내 이방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이방인들이 어떠한 삶과 최후의 종말로 인한 영원한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인지를 이미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책임 의식을 가지고 이방인에게 죽으시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버림을 당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사도가 말한 것은,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그 죄에 의해 죽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가 죄를 범하면 치르게 될 죄의 대가를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우리에게 임할 것이라고 두려운 공포 속에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심판하시고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우리에게 고통을 줄 여러 가지 상황에 밀어놓고 죄 만큼이나 큰 고통을 당하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에게서 나와 우리에게로 돌아와 우리를 죽이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의 죄의 열매가 우리를 죽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초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죄는 열매를 낳았습니다. 그 열매가 자라서 죄를 범한 그 장본인을 죽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의 정욕이고 정욕의 열매가 가인이며, 가인이 죄의 장본인인 아담과 하와를 죽을 것인데,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이 죄를 죽였다고는 만족을 가지지 못하면 다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미워하고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의 열매로서 자기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돌려 죄를 죽임으로 충분히 만족을 누리고 결국은 그 죄가 사람을 죽인 죄를 가기에게 더함으로 하나님을 떠나 피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의식은 가장 먼저 죄에 대한 자각입니다.

그 죄는 정욕을 일으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을 있게 하고 그들을 영원한 지옥에 처하게한 책임 의식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신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의 삶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개혁교회는 이 진리의 의식이 세속적으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습니다. 성공주의를 배격한다고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고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치지만 실상은 성공주의의 틀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도가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마치 그들의 삶이 신앙에서 심각하게 벗어나 있고 정한 시간이나 열심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음과 교회에서 마땅히 섬겨야 할 봉사를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어려움을 당할 수 밖에 없다고 목에 힘을 주어 말하고, 여러 가지 다양한 면에서 진리의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자기만은 가장 성공적인 개혁교회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교회가 말하는 신자의 삶은 성도의 삶의 양태와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가난, 고통, 굶주림, 질병, 그리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기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말씀으로 살게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한마디로 삶의 관점을 인생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둡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영혼에 심기어 자기와의 싸움을 시작하고 인생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의 삶을 추구하여 하나님의 창조하신 계획으로 돌이켜진 삶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이 그의 삶을 지배하게 되고,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삶의 양태를 드러내는 것인데, 곧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이 세상에 지옥으로 보내어질 수많은 사람들을 있게 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공동체 의식으로부터 가진 양태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 곧 보냄을 받은 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기독교 안에 세속화의 물결이 침투하더니 완전히 장악하여 교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속화가 점령한 교회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세속화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고 성경을 말하면서 우리의 영혼을 교묘하게 사냥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세속화가 가르치는 신앙을 교본으로 하여 성도를 참된 신앙에서 심각하게 벗어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