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그런즉 자랑할 대가 어디냐(롬3:27) 2,

생명있는 신앙 2014. 1. 2. 04:00

행복을 추구하는 교회

꿈을 성취시켜 주는 교회

질병을 고쳐주는 교회

가난을 해방시켜주는 선교

전통적인 종교를 사단화 하고 자기의 종교를 주입시키려는 개종,

모든 세상을 어리석게 보고 자기만의 우월한 신앙을 강조라는 배타적인 사상,

 

이런 생각들이 지극히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런 변화를 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가 세상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사람의 타락에 두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없이는 기독교가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위치는 세상을 향하여(Facing the World)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다는 것은 구별하여 건져낸 사람들이 자기가 살았던 세상을 향하여 몸을 돌이켜 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를 거듭남으로부터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곡해하여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세상 안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세속화인 것입니다.

교회라는 말은 그 본질이 건져냄을 받은 사람들의 무리라고 말합니다. 물론 어휘의미로 진리를 주장하려는 시도는 지극히 위험합니다. 어휘는 본질상 타락한 사람들의 본질에서 나온 왜곡된 지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휘의 의미가 반드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휘 의미는 이해를 도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말이 건져냄을 받은 무리라는 의미에서는 진리를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의미가 반드시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의미에서 교회의 의미를 찾는 것이 어휘 의미를 통해서 정의하려는 것보다 더 진리에 가까울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불러냄을 받은 무리에서 출발하는 것 보다는 사도행전의 근거를 빌어 예루살렘을 향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의 무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무리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있다가 바울로부터는 세상을 향하여 모인 무리들의 모임이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드러나는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 바울의 사명을 계승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색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예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26:17)”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도 바울을 이스라엘에게서 구원하여 낸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서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지금 사도를 부르시는 그 순간은 이스라엘에게서 건져내서 이스라엘과 구별되게 하시고 그 다음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서 구원하여 행하실 사명을 주시는데, 그 사명이 그들의 눈을 뜨게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26:1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에게 주어진 사명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건져 내고 건짐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과 사단에게 속한 사람을 건져 낼 것인가?

사도는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사명을 받은 것은 세상 사람들을 세상에서 건져 내는 것인데 그 도구가 바로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로마서는 바로 이 복음의 역할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서신이었습니다.

이 복음이 드러내는 사상,

복음이 나타내는 결과,

복음의 역할

복음의 내용,

복음의 중심을 말함으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확신을 주고 세상을 향하여 담대한 삶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을 사람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사도 요한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하시니라(13:1)”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삶을 볼 때 세상에 속한 사람이 변화되어 행할 수 있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삶은 세상 사람이 변화되어 행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복음의 삶은 그 사람 안에 복음이 심겨지고 그 복음이 그 사람으로 새 사람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네고대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의미로서의 새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교회가 말하는 변화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는 기존의 사람이 성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그 사람의 성향이 바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져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건져냄은 아브라함에게서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본성은 그대로 있고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져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하는데, 아브람에게 두 사람의 본성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아브람의 본성이 서서히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으로 기울어져 가는 것을 의미하고, 아버지 데라의 집에서 나와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시작하는 상태에서 분명히 교회와 거듭남의 본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하여 정욕을 일으켜 태어난 이방인들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도 없고 약속의 언약들도 없는 비참뿐인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도를 통하여 선포한 복음이 우리의 영혼에 들어와 우리 속에 한 새사람을 지었고, 그 사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했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우리의 삶의 성공과 인생의 성패가 중요한 관심이었으나, 우리 안에 새롭게 자리 잡은 복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지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하나라도 건져내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성공여부를 인생의 목표에서 점차 배제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한사람이라도 이방인에 속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일어난 이 일,

복음의 사람으로서의 삶은 우리의 노력과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고 이 삶이 우리의 삶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행하시는 이는 우리를 거듭난 사람으로 살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한 것과 같이 우리 안에 심기워진 복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있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복음이 있습니까?

그 복음에 이끌림을 받고 있습니까?

그 복음의 삶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으로 세상 사람들을 섬기는 삶입니다.

자기의 정욕이 세상에 있게 한 그 죄의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후로 우리의 의식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욕이 세상 사람들을 있게 했고, 그들이 우리의 정욕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다가 미움과 원망과 분노를 드러내며 살고, 마지막에는 영원한 고통의 지옥을 향하여 갑니다.

우리의 정욕이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의 죄가 저들을 세상에 있게 해놓고 무책임하게 아무것고 해주지 않습니다. 저들이 영원한 지옥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의식이 없습니다. 

우리가 저들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자신을 희생 해서라도 그들에게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상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