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무와도 관계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은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인 이상 사회적 존재입니다.
사회적이란? 마르크스는 ‘사회경제적 생산관계를 이루는 생산관계의 총체를 의미한다’고 했고, 아리스토 텔레스는 ‘개인은 사회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이는 인간은 사회 형성자의 자식이며 공동체의 형성자로 포착 할 수 있다,’ 라고 말함으로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주장이 우리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다고해서 이들을 무시하거나 혹은 배척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적 사상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마르크스적이지만, 대부분의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은 아리스토 텔레스적 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인 이상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사람인 것이 바로 ‘너와 나’라는 관계가 나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즉 관계를 통한 인식에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며 다른 존재에 의해 인식되지 않을 지라도 사람입니다. 사람의 조건은 모든 존재하는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자타간의 의식과 전혀 관계 없이 존재함으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으로서의 존재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들을 사람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입니다. 사람이 객관적으로 의식되지 않았을지라도 사람으로서의 조건을 상실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서 존재하도록 하신 사람이 있기에 사람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는 사람을 향한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을 실행하심으로 사람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지음을 받았고, 지음을 받은 그 존재는 사람이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기 위해서 사회적인 관계를 가져야 하고, 다른 존재에게 인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태어남으로 이미 사람이고 상대방이 우리를 인식하지 않을 지라도 우리는 존재합니다.
우리는 의식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닭과 달걀을 비유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상상놀이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다윈론자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는 존재합니다.
우리 주위에 아무도 없어도 우리는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은 단순히 존재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존재가 사회적인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냄으로 사회적인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짐승들은 자신의 존재를 독특하게 구별된 냄새로 합니다. 냄새로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환경, 곧 물속과 같은 곳에서는 소리와 자신이 낼 수 있는 음파 혹은 진동으로 나타냅니다.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지식입니다. 지식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고날 때 지식을 가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삶의 환경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배움으로 인해 이미 자신이 사회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1920년경 인도의 콜카다 근처에서 7~8세 정도의 카말라와 아말라라는 두 소녀가 늑대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 발견되어 이들을 늑대로부터 격리시키고 사람의 환경에서 적응하게 했으나 동생 아말라는 사람의 환경을 적응하지 못하여 1년을 못살고 죽고, 언니 카말라는 1년 반년만에 사람처럼 직립 보행에 성공하였으나 그녀도 역시 10년을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늑대로부터 지식을 얻었고, 늑대의 지식을 받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사람이면서 늑대로 살았고, 늑대로 의식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람입니다. 사회적인 그 어떤 유물사관이나 정치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 지라도 사람입니다.
단 그의 영혼의 지성을 점령한 것이 늑대의 습성이라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사회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공통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형성한 삶의 환경'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삶의 환경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만들어가는 존재로 사는 것이 사회적 존재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사회적이라는 것은 옳지 않은 말입니다. 이 말은 이미 사람을 사회의 굴레로 가두고 그 틀 안에서 살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사회를 말들어가는 존재입니다. 그 사회가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지만 교회적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사람이 다함께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영혼의 지성으로부터 자신을 드러냄으로 교회가 구성되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교회의 주장을 펼치려는 의미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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