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 여기심을 받은 우리도 위함이니(롬4:24)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의로운 것이 아니닌데 의롭다고 칭하는 것을 말합니다.
개혁교회는 이를 “칭의”라는 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의로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의롭다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말로는 이 교리를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그 말로 이 교리를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죄에 관한 개념에서부터 칭의의 교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리적으로 죄를 두 가지의 의미로 구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원죄를 둘째는 자범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칭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두 번째인 자범죄에 관한 인식에서 부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범죄를 정의하면 죄인인 사람이 도덕적인 죄를 범한 행위를 말합니다.
아주 아이러니한 말입니다.
죄인인 사람이 죄를 행한다는 것?
교회는 원죄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셨으므로 해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범죄 역시도 해결 되었으나 우리는 그 죄에 대한 회개의 의무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 일상의 삶에서 행한 죄라고 판단되는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원죄를 가진 사람이 죄 아닌 행위가 어디에 있을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죄를 다 씻어 깨끗하게 하셨으면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닌가?
죄인이 죄를 범하는가?
씻김을 받은 사람이 다시 죄를 범하면 그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았을 때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인가?
교리적으로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칭의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원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생물학적인 상태와 그의 모든 속성이 완전히 변화되어 의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회는 너무 잘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본성과 실제 상태를 완전히 바꾸어준 것이 아닙니다.
본래의 상태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계하여 주시는 것이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시는 모든 태도를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죄로 말미암아 관계가 끊어져 있었는데 우리의 얼굴을 보시고 사랑스럽게 하시며 말씀하시고 안아주시면서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한없이 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칭의의 결과인 것입니다.
죄의 상태 본성, 그리고 그 성품은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당신의 마음을 바꾸어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헐어지고 관계가 새롭게 된 것입니다.
우리속에는 여전히 죄의 요소가 있고, 죄가 흐르며, 냄세를 풍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성은 더럽고 추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없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한없이 쏟아져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보시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보신다고 해서 우리의 본질까지 의로워진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상태는 결코 의롭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의를 조금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기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시고 계시지만 여러분은 아직도 여전히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아래와 같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니 나는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까지 어떤 행위도 다 죄로 보셨는데 이제는 보편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죄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특별하게 죄 된 행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에 죄라고 하는 행위나 마음으로 범죄하는 악한생각들에 대해서만 죄로 보신다.”
“곧 나에게 의로운 행위가 있다.”
그러나 이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교회를 썩고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와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여전히 죄인이다. 너희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죄뿐이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너희 죄를 대신해서 죽어줌으로 인하여 그 죄를 내가 보지 않을 뿐이다.”
이제 뭔가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죄란, 우리의 삶 자체입니다.
우리의 삶에 죄가 아닌 행위는 한점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일 뿐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도 죄의 뿌리를 근거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죄가 아닌 것을 한 점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칭의란?
의로움이 전혀 발견되지 않지만 의롭다고 여겨주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죄인이지만 의롭다고 해주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면 자범죄가 무엇입니까?
엄격히 말하면 사람이 도덕적인 행위에 있어서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한 것을 의미합니다. 본질이 죄인인 사람이 자기의 더러운 행실을 인식하고 크게 늬우치는 각성을 가지게 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데 사회적으로나 혹은 주관적으로 자기에게 있어서 잘못된 행위라고 양심으로 판단을 받은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죄라고 판단하는 양심의 작용은 선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앞에서 죄가 아닌 행위는 조금도 없다고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닌가?
사람은 자기자신에게 항상 스스로 속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사람이 자기의 행위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성경도 말하기를 사람은 양심이 있어서 선악을 구별한다고 합니다.(롬2:15)
히브리적인 사유에 있어서 양심이란 "인간 처신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하는 거룩한 재판관의 소리"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명확한 답일 것입니다.
우리는 양심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지식에 함의 되어 있는 지식 자체에 있는 요소라고 말합니다.
본래 모든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으로 영혼에서 지각할 수 있도록 생성됨으로 시작되었지만, 사람의 타락은 그 생성부터 왜곡된 지식을 생성 할 뿐입니다. 바로 이 지식에 종교의 씨앗이 숨겨져 있는 것과 같이 양심과 같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 죄를 판단하는 그 양심의 행위도 사람의 영혼에서 비롯됩니다.
영혼은 지식에 의하여 지성의 활동으로 존재하고, 이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식에 의해 자기 지식을 가진 사람이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독립된 주체에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만약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사람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지식이 그 판단의 주체로 인도할 것이지만,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상실함을 인하여 모든 행위를 자기를 기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타락핮 않은 사람에게서 판단의 주체는 무엇입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고, 사람은 그 지식으로 행하기 때문에 행위에 대한 판단을 그 지식의 주인인 하나님께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의 주인인 하나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지식인 자신의 행위에 대한 판단을 무엇을 기준하여 판단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선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모든 자신의 행위를 질서롭고 조화로움에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을 경우 반드시 하나님의 선에 의한 판단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은 지식안에 함의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타락하게 되자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고, 자기 자아 밖에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선악에 대한 판단은 자기자신에게 있고, 이것은 이미 타락 해 버린 인간의 상태를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범죄란? 타락한 상태에 있는 자기자아가 자신을 선과 악중에 어느하나로 판단하여 선언하는 재판관의 소리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기의 행위를 고백할 때, 자신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지대로 살았고, 세상과 자기 마음에 하나님을 떠난 모든 생각과 행동을 스스로 느끼고 그런 행위들이 스스로 죄라고 판단하고 용서를 구하는 조건이 됩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행위를 자범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를 향하여 의로 여기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의를 행할 수 없는 사람인데 우리를 의롭다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의 굴레에서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그 죄의 속임과 더러움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그 죄의 요소들을 털어내 버리려고 해도 결코 씻어낼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의 속성에 묻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덮어버리시고 의롭다 불러주실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죄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결코 씻을 수 없는 원색으로부터 번형된 색을 가졌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순전하게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사도가 강력하게 말하려고 하는 의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믿음이 가능이나 한 것이냐?
우리가 믿을 수 있는가?
아브람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아브람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했을까요?
당시에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을 때입니다.
온 세상이 우상만 가득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당시의 종교적인 사상에 따랐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난 그분의 말씀에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말씀에 따라 갑니다.
우리는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당시 아브람에게는 커다란 모험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을 때는 복음을 멸시하고 왜면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복음에 이끌려 움직였고 마침내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때 마치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믿음앞에 굴복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이 신비스런 일을 우리는 우리의 것으로 돌이고 처음 믿음 그것이 우리의 의가 되게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우리의 의식이나 지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순전히 성령께서 우리를 강제로 이끄시는 사역이었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결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 께서 내게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37,44, 45,)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라고 말함으로써 사람의 본질로서는 하나님을 긍정하거나 믿을 수 없는 것을 확실히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아브람의 믿음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그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의식과 지성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사람에게 오셔서 사람의 지성을 이끄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에 따라 이끌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분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 여러분의 의식과 전혀 상관이 없이 믿었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상관 없는 것은 영혼의 지성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혀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고. 들려진 그 말씀을 자기지식으로 이해하는 아브람의 본성은 분명히 반신반의하며, 당시의 종교적인 자기지식으로 이해하여 곡해하게 되지만, 성령께서 아브람의 영혼에서 역사하셔서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감과 같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던져진 말씀과 함께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끄심으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적으로 듣고 믿음에 이끌림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점차 많아 짐으로 하나님을 확실히 알아가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본래 우리에게서는 믿음이 전혀 나올 수 없습니다 .
우리의 믿음으로 이끌어 오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이것에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고,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무능과 거짓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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