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들은 전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빚진 자의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되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고, 세상에 대해서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은 마치 세상 사람들을 위해 얻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내어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물론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하되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제시하는 하나님나라의 윤리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나라는 타락한 사람들의 시각으로 볼때 이 나라는 결코 세워질 수 없는 나라입니다.
권위와 힘이 없고, 자기의 소유라는 욕구도 없으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역동적이게 하는 경쟁력도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나라가 이 세상 땅위에 사람들에게서 세워질 수 있습니까?
결코 불가능한 나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시려고 제자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런 나라의 건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지극히 이상주의적이며 비 현실적인 세상을 주님께서는 건설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세상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모르셨을까요?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을 이미 다 아시고(요16:30) 우리의 영혼에 있는 지식이 어떤 것인지를 다 아시는 분이신데 우리에게는 결코 그런 나라를 세울 수 없는 왜곡된 지식으로 가득 체워진 사람들임에도 우리에게 그런 나라를 세우라고 명령하신단 말입니까?
무슨 이유에서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우리에게 그런 나라를 세우도록 명령하신 것입니까?
이것이 처음 성경부터 마지막 요한계시록까지 사람에게 요구하는 하나의 뜻, “To be Son of God,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선포하시는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아들의 삶과 윤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그 나라는 영광과 하나님의 선이 지배하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우리 타락한 사람으로는 결코 세울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나라를 세우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이 나라가 바로 교회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이 말의 의미는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들의 불순종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보내심을 받으시기 이전까지의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무시하고 이제 새 나라를 건설하셨는데 그 나라가 세상속의 나라 곧,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 개신교회의 결정적인 실수는 개 교회 주의입니다.
물론 개 교회에도 노회와 총회라는 공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공교회가 자본주의의 질서 속에서는 결코 재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 교회는 공교회의 권위에 순복하고 공교회는 개 교회에 참된 질서와 세상을 향한 조화를 요구할 수 없는 사태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개교회적으로 일어나는 부흥과 회개의 운동이 힘이 없고 세상을 향한 외침이 되지 못하고 자기들만의 뜨거운 감정으로 잠시 들끓다가 전체 교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곧 잠잠해져 버리는 이유가 바로 이미 무질서한 세계 속에 개교회로 파묻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새로운 나라의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이는 마치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율법과도 같이 하나님의 법이 하나님의 입에서 새롭게 나온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율법이 가진 정신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아들들의 나라의 법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의 의미가 말하는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그 나라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그 의미를 밝혀 보는 것도 매우 즐거운 일입니다.
첫 번째 산상수훈의 의미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누구를 향한 사랑입니까? 그리고 사랑을 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입니까?
산상수훈의 의미는 곧 자기의 정체성을 먼저 알아야만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본문의 의미에서 이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좋은 문장이나 아름다운 말로 밖에 듣지 못합니다.
산상수훈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향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세상이 나누어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관계의 사람들인 이스라엘과, 죄의 결과적인 관계로 말미암은 이방인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따로 구별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함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산상수훈의 사랑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을 향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사랑해야 하는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의 결과로 이방인을 낳았고, 이방인은 하나님의 작정의 관계와 별개로 하나님의 나라에 결코 들어올 수 없는 비참의 존재이기 때문에, 이방인을 있게한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끝없이 사랑한다 해도 그 빚을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산상수훈의 의미는 자기 희생입니다.
자기희생은 쉽게 말하면 자기를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완벽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을 향하여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시는 교훈은 바로 자기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태마 세 번째 단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이방인에 관한 내용을 듣습니다.
이방인이 죽인 예수는 곧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식하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이방인이 예수를 죽일 때는 자기 자신의 죄를 죽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내어주니까 죽이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자기들의 죄를 이방인에게 내어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맞지 않으니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사실일 때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죄를 이방인에게 내어주고 자기들의 죄를 죽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죄를 이방인에게 내어주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무슨 용서인줄 아십니까?
자기들이 정욕을 일으켜 하나님의 창조관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을 있게 하고, 그 이방인들이 평생의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미워하고 멸시하고 천대했던 그 악행과, 영원한 지옥을 향하여 갈 수 밖에 없는 비참을 전혀 돌아보지 않음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이방인의 영혼에서는 자기들을 존재하게하고 영원토록 비참에 빠지게 한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이방인인 우리가 그를 죽인 것이고, 실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잔인하게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방인을 위해서 해야 할 자기희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이후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의 의무를 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입니다.
이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랑만 있는 나라인데 이 나라는 희생과 아픔이 있는 모본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결코 이 나라를 무너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는 이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는 이미 세워졌고 이 땅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곧 교회인 것입니다.
물론 지금과 같이 개교회적이고 무질서가 판을 치는 그런 나라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면 어느 한 교회가 혜성처럼 나타나 하나님의 나라를 대변하는 것 같은 그런 선한 모습이 가득한 교회를 말하는 것이 더더욱 아닙니다. 이 나라는 이미 있고 견고하게 세워져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을 드러내고 있는 공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공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통치하는 아름다운 선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내어주심,
이 주제는 두 가지의 뚜렷한 행동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를 내어주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행위는 하나의 목적이 있고 이 목적에 의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 때문에 내어주심이 되었습니다.
이방인은 자기들을 존재하게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십자가에 걸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곧 죄에 대한 죽으심이었던 것이고,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덮어버리시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만 하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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