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의식의 변화에서도 믿음이 시작됩니다.
아브람 시대에 종교에 관한 보편적인 인식은 신과 공동체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자신을 공동체의 대표 위치에서 신과의 관계를 가진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이제 자신이 그 자리를 내려와 평민의 위치에서면 신은 더 이상 자신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 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한 행위가 정당하고 지극히 의로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자기의 공동체에 얼마나 큰 위험을 초래했는지를 깨닫고 자기스스로 자기의 공동체에서 자기의 위치를 포기하고 다메색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지목하여 이제부터 그를 지켜 달라고 요청하는 것에서 그동안 가진 신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었고 이것이 당시의 신에 대한 보편적 의식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때나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참 신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나 가까이 하셔서 말씀하시고 나타나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난 사람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이방신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실지로 그들은 신이 아니고 사람이 마음으로 신이라고 조직해 내서 만들어진 허영(虛靈)이기 때문에 그들이 신이라고 말하는 그것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신이라고 말하고 그 신들에게 섬기는 모든 행위와 의식, 신과의 교감은 그들의 영혼의 지성이 만들어낸 허영(虛靈)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허영(虛靈)이란? 실체가 없는 영이라는 의미로 엄밀히 말하면 선하지 않은 주관적인 지식들의 조합에 의해 신이라고 허상화된 것입니다. 곧 인식은 할 수 있으나 실체가 없는 사람들이 자기 지식으로 조직해서 신이라고 칭한 허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거짓된 지식에 형상을 덧붙여 결국 거짓 신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은 사람의 영혼에서 조직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사람을 선택하여 사람과 교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지로 존재하시는 객관적인 존재로서 지식을 내시는 분이시며, 선의 원칙에 의해 자신을 사람에게 드러내실 수 있는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모든 지식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영혼 안에 있는 모든 지식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시고 천지를 지으신 원인이십니다.
모든 만물은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나왔고, 성경은 이를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라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상은 분명히 구별되고, 하나님은 진리의 지식을 내시고 만물을 지식으로 창조하시는 반면, 허영(虛靈)은 사람의 영혼에서 거짓된 지식으로 만들어져서 숨조차 쉬지 않은 허상뿐입니다.
아브람 당시 부족의 종교는 그의 아버지 데라가 달신 장사를 하는 종교 전문가였기 때문에 당시의 종교적 인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여러 부족들이 섬기는 신들을 조각하여 팔았고, 그 신을 구입해간 여느 부족의 장은 그 신에 자기의 허영(虛靈)을 불어 넣어 신으로 명명하고 여러 제사장들을 임명하여 자신의 허영(虛靈)이 불어넣어진 신에게 제사하게 하고 자기는 그 신과 교감하는 대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브람의 종교적 인식은 하나님에 대하여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람은 지극히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자기 부족의 대표이기 때문에 자기의 결정으로 행한 모든 일들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을 지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이웃 부족들과 부득이 전쟁을 행할 수 밖에 없고 해야만 하는 그런 결단으로 인하여 스스로 판단한 위기에 대한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고 자기의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자기부족의 후계자로 다메색 엘리에셀을 지명하여 하나님께 부탁한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지금 아브람을 대면하고 관계하고 계십니다.
아브람은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다른 부족의 신들처럼 자기의 의식에서 신이라고 생각하는 그 인식 속에만 존재하는 자기의 신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환상에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지금 자신과 만나는 그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이 없습니다.
아브람은 지금까지 여러번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했고 오히려 환상가운데 만나주신 하나님을 자기의 종교적 지식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그의 보편적 종교적 인식이 변화되지 않아서 당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종교적 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만난 하나님의 정체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결코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기가 함께한 그 신에게 조카 롯을 구해오는 그 일로 인하여 부족의 대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각오한 상태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전혀 소통되지 않은 각각의 교감입니까?
하나님과 사람은 본질적으로 지식의 체계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지만 사람은 진리의 형상의 지식을 가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진리에서 나오는 살아있는 지식이지만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식의 조명 받은 지식입니다.
어떤 상태이든지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은 그 본질에서 구별되고 다르고 사람이 타락했든 타락하지 않았던 사람이 가진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과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지식을 인식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지식의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형상 안에 하나님의 지식을 주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타락 후에는 더욱 하나님과 교감하기 위해서 성령의 조명하심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어떤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아는 일에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성령의 조명하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피조물입니다.
성령께서 조명하시지 않은 그 어떤 지식도 사람이 보기에 진리인 것 처럼 보이지만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에게는 보편적 종교의식으로부터 절대적 종교의 의식으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아브람의 영혼을 조명하셔야 하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아브람에게 환상가운데 나타나셨고 드디어 그때가 이르러 만나셨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무엇인지 새롭게 알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계획하신 일을 행하시기 위해 아브람의 인식에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여러번 말씀하시고 환상가운데 나타나셨으며, 성령께서 그때마다 아브람의 영혼을 조명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 영혼의 지성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스스로 지각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실지로 아브람은 자기의 지식대로 살았고, 성령께서는 강권적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목적에 따라 아브람을 이끄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 사람 아브람 안에 하나님의 성령과 타락한 아브람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에 아브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왜 하나님은 오늘 우리는 이렇게 이끌고 계십니까? 아무가치도 없고, 보잘 것 없으며, 그야말로 하찮은 인생인데, 영원한 지옥을 향하여 갈 수 밖에 없는 버림받은 우리 영혼을 이렇게 이끄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작업이 아닙니까?
아브람이 종교적 인식의 변화가 아니면 결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영혼의 지성으로 우리는 만드시는 의미와 목적을 아는 지식을 스스로 가지도록 하셔야 합니다.
이 기능은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있었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으니 이제는 복음으로 우리를 향한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복음이 우리의 영혼에 새겨지고, 모든 객관적 사실들에 대해서 비춰 조명할 때 우리 영혼의 지성은 복음의 빛에 의해 비로서 참된 지식을 갖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십니다. 그 복음의 지식으로 말미암은 고백은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는 요한 계시록 4장 11절에서 24장로들의 영광의 찬양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4~5)”
아브람은 하나님께 이끌려 밖으로 나아갔고 하늘의 뭇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장막에서 아브람을 이끌어내 밤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하늘의 세상을 보게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삶을 포기하고 세상의 처분에 내맡긴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당신 안에 간직하신 아브람을 향한 계획을 단숨에 내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람으로 아브라함이 되게하고 그에게서 창조시에 계획하신 아들들을 낳기를 바라셨고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그 비밀의 열심을 자기의 타락된 생각으로 이스마엘을 낳는 우를 범하였지만 마침내 100세가 되어 죽을 것 같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뜻을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려 하지만 그 열심으로 말미암아 얻은 결과들을 탓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그의 허물임으로 사람의 마음에 번뇌와 고통을 가중하게 될 것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실 뿐입니다.
아브람은 아마도 이것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상급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믿음이 일어났고 드디어 하나님을 새롭게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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