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4:22)
우리는 계속해서 사도의 증언에 따라 믿음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그 시까지 아직 아브람 안에는 하나님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들이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람 안에”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 분명한 의미를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아브람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영적인 어떤 내부를 지칭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아브람의 속사람 “영혼의 지성”을 말합니다.
우리도 동일한 의미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의 모든 서신과 특히 로마서의 글은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일들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로마서 4장의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도 로마서 4장을 아주 오랫동안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장을 충실히 살펴보는 것으로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다면 성경의 핵심이라고 하는 로마서 7~8장과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이 매우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아브람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성령께서 아브람을 강권적으로 이끄심으로 시작되고 이후에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실 때 아브람의 영혼에 조명하셔서 비로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인데, 바로 이때로 인하여 그의 영혼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지므로 인하여 영혼이 지각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때 복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강권적으로 이끄시고 계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아직도 이런 이끌림 속에 있는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약속을 받고 영혼의 지성이 하나님을 지각하여 인식할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스스로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교과서적으로 이해해서 판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 대한 판단으로 인한 구별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선 사도 바울의 서신에 비추어 자신의 상태가 어디인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난 이후의 우리의 인생은 아래의 4단계 아래 있습니다.
1, 성령에 이끌려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행진하는 때,
2, 가나안에 이르러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상황에 따라 애굽을 여행하며 여러 위기를 만나며 하나님의 간섭을 경험하는 때,
3, 스스로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위기를 깨닫고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하여 자신의 초라하고 볼품없는 인생을 생각하면서 세상을 향한 끊을 내려놓고 기다리고 있는 때,
4,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꿈과 계획을 발견한 사람.
우리는 어느 하나의 단계라도 적용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믿음은 위의 단계 속에서 맨 마지막의 4번째 단계 속에서 비로서 발견되는 것을 알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상속은 율법을 이어받은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 곧 성령의 이끄심을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도는 아브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까지 약15여년 동안이나 걸렸던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믿음을 인정받은 그 때, 아브람의 어떤 행위가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는 점을 강조하여 말하는 것은 의미를 두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그 어떤 지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하여 소개라도 하면 완전히 남처럼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우리에게 믿음을 드러내는 과정도 아브람과 동일합니다.
어떤 설득이나 신비적인 경험, 혹은 이상에서 나타난 환상, 지적인 동의에서 믿음이 일어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믿음이 지적인 동의라고 말하는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적인 동의라는 말도 타락한 본성이 자기지식으로 인식하고 믿음을 가지는 자의적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믿음의 상속자는 아브람의 믿음을 말합니다.
먼저는 복음을 들을 때 영혼에 들려지고 성령께서 복음으로 사람을 이끄십니다.
두 번째 이끌림을 받은 사람은 마치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교회에 출석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교회를 출석하는 것은 순전히 성령의 역사입니다.
세 번째 교회에 출선하는 사람이 어떤 동기에 의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자기의 영혼에 하나님을 인식하고 지각하는 상태로 발전합니다.
네 번째 이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을 지각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반응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을 보면 개혁교회의 구원의 서정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적용하지만 참으로 놀라운 진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는 소명을 받고, 중생하고, 회개하여, 믿음을 가지는 이 단계는 물론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은 평생을 걸려서 지각할 수 있고, 어떤 경우는 순간에도 가능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면 믿음에 이르게 하는 그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사도는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에게 일어난 이 믿음의 사건은 비로서 아브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까지 아브람은 당시 세상의 종교에 대한 인식대로 신이 세상과 연결할 때는 부족과 공동체를 주관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단체의 신으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그동안 자신이 만났던 하나님은 자기가 이끌고 있는 자기 공동체의 절대적인 신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환상 중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같이한 공동체가 아닌 아브람 개인과 관계된 신이었습니다. 아브람은 비로서 하나님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와 관계를 가진 것이지 자기의 공동체 어느 누구와도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지 아브람이 아니면 다른 그 누구와 역사를 진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은 자기의 노력과 열심은 한계가 있고 이제 자기는 세상에서 더 이상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자기는 죽고 다메섹 엘리에셀이 부족의 장이 되어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 아브람 너로 인하여 역사를 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와 우리 가족 및 사회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심으로 우리의 공동체를 모두 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는 나와 같은 구원의 반열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같이 누리되지만 하나님을 알게되는 구원의 축복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습니다.
아브람은 오래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다녔으며 종종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을 부족의 신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 엘리에셀을 자기의 후계자로 지목하여 이제는 그와 함께하여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하던 것과 같이 그를 도와줄 것을 언급할 때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아브람과 함께 한 것은 자신을 향한 계획이 있어서 관심을 가지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비로서 아브람은 자신이 하나님과 직접적인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우치고 알았으며 마음에 그 하나님에 관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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