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4:18)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시간은 사람에게 절정에 다다른 순간의 시간입니다. 사도는 이를 아브라함의 삶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을 때 바라고 믿음을 가졌을 때를 말하는 것은 창세기 15장에 나타난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직 아브람이었습니다.
그가 가나안에 이른 후 기근으로 인해 애굽을 돌아 다시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에는 재산이 많아졌고 비로소 조카 롯과 해어지게 되었다. 이때 롯은 소돔성으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부족들의 전쟁으로 인하여 롯과 가족이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을 때 아브람은 자기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길렀던 장정들을 이끌고 추적하여 롯을 구해오는 승리를 했습니다.
주위에서 환영해주는 왕들의 축하와 사람들의 승리의 함성은 마치 무대를 집어삼킨 승리의 기쁨이었습니다.
그 승리의 행복은 잠시였습니다.
장막에 돌아온 아브람은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약 15여년 전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로 부터 자기 몫을 물려받아 길을 떠난 후 다다른 곳이 가나안이었고 이 땅은 물론 애굽을 오르내리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떠돌아다니는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터전도 없고 말뚝을 깊게 지르고 벽돌을 쌓아 성을 올려 자기의 안식처를 삼을 터전 없는 떠돌이입니다.
작은 불씨 하나면 자기의 모든 재산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방랑자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이 무엇인지 똑똑히 목도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기의 군대를 이끌고 나가 가나안의 어느 성을 공략하여 빼앗아 그곳에서 살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의 군대는 불과 수백에 불과하지만 가나안에 성곽을 이루고 터전을 잡고 사는 부족들은 수천에 이르고 여러 부족이 연합하면 수만에 이르는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을 구해오는 용감한 행동은 의롭고 좋은 행동이었으나, 스스로 자기가 행한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의 영혼에는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아브람이 깊은 두려움에 쌓여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셨고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첫 마디 말씀이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요.”라고 말씀하신 의미로 볼때 아브람이 얼마나 두려워 떨고 있었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순간의 아브람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아브람의 믿음을 크게 찬양하며 그를 믿음을 본 받으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아브람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가 낮에 행한 일로 인하여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직시하고,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를 깨닫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자기와 가나안의 부족들은 비교할 수 없는 조직적 체계, 부족의 공동체, 그들의 외형 상태 등은 아브람과 결코 비교 될 수 없습니다.
시간의 문을 열어젖히고 아브람의 모습을 보십시오.
광할한 사막 가운데 초목이 우거진 한 곳에 장막이 쳐 있는 아브람의 처소,
저 멀리 사막너머에 보이는 크고 웅장한 성벽과 성곽을 거니는 보초병과 창을 들고 지키고 있는 군병이 있는 성, 을 비교해보십시오.
아브람이 건드린 것이 무엇입니까?
앞을 분간하지 못하는 애벌레가 벌집을 건드려 공격받기 직전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 벌래가 살아나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두려워 떨고 있는 아브람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를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면 과연 아브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분명히 아브람은 아직 믿음을 가지지 못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대화하시는 내용을 보시렵니까?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라고 당신이 지켜 줄 것이라고 말하셨을 때 아브람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주 여호와의 내게 무엇을 주시려 하시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상속자는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아브람의 상태를 인식하실 수 있습니까?
그는 두려워 떨고 있고,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의 삶까지도 다 내려놓은 상태가 아닙니까?
왜 아브람이 이렇게 떨고 있습니까? 그가 낮에 행한 ‘조카 롯을 구해오는 행동에 대한 인식’ 때문이 아닙니까?
그것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의 강한 부족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지로 아브람은 결코 그곳에서 안전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는 벌집을 건드렸고, 자기의 삶을 완전히 끝장내고 말았습니다.
15 여년 동안 방황던 삶이 허무하게 무너질 위기의 순간 앞에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 뿐만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무모한 자기의 행동으로 인하여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주위에는 강하고 튼튼한 성벽으로 완전하게 무장한 강한 군대가 작은 바람이라도 흔들거리는 초라한 장막에 거하는 우리에게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고 진노를 퍼붓기 직전의 순간에 내려다보고 있는 흉악한 얼굴을 보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이런 순간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하나님께서는 지금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여러분을 향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두러워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불신과 후회와 좌절과 절망입니다.
‘하나님 알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끝났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저들이 강한 군대를 끌고와서 우‘리를 잡아갈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렇게 서 있겠습니다.’
‘이제 저를 지키시지 마시고 이 부족의 후계자 다메섹 엘리에셀을 지켜주세요.’
아브람이 이렇게 하나님께 대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라, 그가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자가 너의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아가 하늘의 뭇별들을 보이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람의 마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의라고" 하셨고, “아브람이 믿음에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시고."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브람의 믿음의 의, 곧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의의 상속자들입니다. 설득을 당하여 동의하는 것, 혹은 지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동의, 이런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에게 일어난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인데 이것이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인한 결과인 것, 바랄 수 없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 지적으로 계산되지 않고 확실히 인식하는 것이 아닌 성령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이끄시는 조명과 사역으로 말미암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와 같습니다.
본래 우리의 정체를 파악하면 하나님을 결코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지적능력을 가졌어도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때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이끄시는 성령의 사역과 같이 복음이 우리를 하나님께 이끄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의 지적인 능력이나 설득으로 말미암은 동의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친히 말쓰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리라(요6:44),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느니라(고전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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