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니(롬5:1)
믿음은 성령의 이끄심에 의한 사람에게 나타난 반응이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절,
자기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었고, 이방종교 우상들을 이해하는 신개념만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람은 하나님을 왜곡되게 이해하였을 것은 분명합니다.1
성령께서 아브람에게 조명하셔서 하나님을 진리대로 알게하기 전까지, 사람이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지성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정보들은 일반 우상에 관한 정보들 뿐입니다. 아버지 데라로부터 간접적으로 듣고 베운 신관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 정보들도 왜곡된 것입니다.
신학적 정보가 빈약하여 지적인 체계가 옅은 신앙인들이 성경을 읽고 나타내는 반응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반복적으로 듣고, 여러번의 만남의 관계를 가진후에 비로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음을 드러내기 까지, 여러번 만나주셔야 했고, 거듭되는 만남으로 영혼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정보가 점차 증가되어 지식들간의 유기적인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각을 갖고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가인에게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 아담의 아들 가인에게 여러번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나타나 주실때 가인은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가인은 하나님은 일정한 영역 범위에 거하시는 분, 즉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면, 하나님을 떠날수 있다고 이해하였고(창4:14), 하나님을 속일수도 있고(창4:8), 하나님께 대하여 자기의 주장을 충분히 말 할 수 있으며(창4:9), 하나님께 대하여 자기의 열심을 다하면 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창4:3)를 가졌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자주 만났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비극적이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과 여러번 만나 하나님의 뜻을 듣고 자기의 의견을 말하고 하였으나 끝내 자기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떠나 놋땅으로 가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행위입니다.
명백한 진리는 성령께서 그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만남을 인식하도록 조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할 수 있는 사고를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에게 나타난 하나님과 아벨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나타나셨을지라도 성령의 조명하심에 대한 수납자의 반응이 다릅니다. 성령께서는 두사람에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조명하시지 않았다면, 두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능력이나 자기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태에서든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때에는 반드시 성령의 조명하심이 함께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뜻인 제사를 원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을 요구하실때 두 사람은 공히 하나님을 인식하고 뜻을 전달받았으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적인 지각을 통한 인식 작용은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가인에게 나타난 지적반응의 결과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창4:3~13) 하나님을 왜곡되게 인식합니다. 반면 아벨에게는 성경의 언급이 없으나 오직 하나 "희생의 제사"를 드렸고 가인에게 희생을 당했다는 것으로 해석되게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학에도 팽배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령 사역의 서진"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가인과의 실제적인 관계에 적용하여 볼 때 너무나 가인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위험한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의 사역은 사도바울을 통해 이스라엘에서 북서진하여 아메리카를 건너 현재 아시아 지역에 머물러 중동을 향하여 지구를 중심으로 서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인데, 이는 현재 유럽과 북미지역에는 성령의 사역이 떠난 것처럼 이해되고 있다 하더라도 활발하게 사역을 하시지 않으시므로 결국은 성령의 사역이 일정한 지역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이와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성령이 이곳을 떤 서쪽으로 서쪽으로 옮겨가고 있으니 이제 우리에게서 희미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인적입니다.
실지로 성령께서는 지구 전체에 어디에서나 활발하게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아프리카 사막이나 아마존 밀림의 소수 원주민들에게도 지금 성령께서는 역사하시고, 오늘 우리의 영혼에서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아브람의 경우 당시 우상들과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방신에 대한 지식이 그에게 전부이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만나주셨고 말씀하셨으니 자기에게 말씀하신 신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지각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확실한 실재와 관계를 가지고 지각하며 이해할 때 그 실재를 본질대로 이해하려면 그 실재에 대한 지식을 자기의 영혼의 지성에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당신에 관한 지식이 없어도 하나님으로 인식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만난 사람의 지성에 심어주시고 마침내 자기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자기지식을 가질수 있는 사람과 가질 수 없는 사람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표현했고, 이들이 이방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존의 원주민들이나 아프리카 사막의 사람들에게 성령께서는 지금도 사역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사역하셔서 자연과 모든 세계를 보호하심과 같이 성령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에도 계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의 지성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지각하지 못하고 자기 지식대로 표출해내기 때문에 이상하고 거짓된 우상의 신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온 세상 어디에도 계시지 않은 곳이 없는 하나님을 피조물에게 인식하고, 지각하고, 알게하기 위해서 지식을 전할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선의 원칙에 따라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받아들이게하시고, 원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만 지식을 가지지 못하고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게 하여 궁적으로 우상을 만들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선의 원칙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에게 나타나는 지적인 반응은 다릅니다.
앞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면서 이해했던 것과 같이 믿음에 대한 반응은 아브람의 삶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성령께서는 아직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는 무지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부르시고 이끄십니다. 이런 과정에서 아브람의 지성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조금씩 새겨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자기의 지식대로 우상에 비유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할 수 있는 지식이 쌓여져 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를 영혼의 지성에 새겨진 지식들이 작용하여 하나님을 인식하여 아브람이 지각을 갖도록 지속적으로 역사하셔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도는 믿음을 자기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엡3:7)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를 바르게 말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 안에 말씀을 주시므로 이끌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만 가진 우리를 친히 이끄심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의 지성에 적용시켜 주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향하여 새 싹이 돋아남과 같이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 영혼의 지성에 심겨진 것입니다 .이 지식은 지성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생성하여 우리로 점차 하나님을 진리대로 이해하도록 해줍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읽고 결국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우리는 진리의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 심겨짐으로 우리 안에 두 싸움을 하게 됩니다.
거짓과 진리의 지식은 우리의 영혼에서 서로 쟁투하여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안에 거짓된 옛 자아인 나를 버리고 진리의 지식의 사람으로 치우쳐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새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듭나도록 이끄시는 성령께서는 항상 우리 영혼의 지성에서 우리를 진리의 사람이 되도록 조명하여 주심으로 더욱 새롭게 해주십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지성에는 진리가 점점 더 확장되어가고 예전에 이해하거나 지각하지 못하였던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이 이해되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의지하지 않으면 옛 자아인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이 진리의 말씀이라도 왜곡되게 해석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 마져도 왜곡되게 조명된 지식을 갖게 되고 결국은 비뚤어진 기독교의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의 이끄심을 받고 있으나 세속적인 모습들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진리의 말씀을 거짓되고 왜곡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자기 지식으로 조명하여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옛 자아를 죽이는 것은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식이 아니고는 결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쉬지 않고 우리 안에서 진리를 왜곡되게 하려고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쳐 복종시키는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지지 않을 때 우리 자아가 우리를 조명하여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안에 하나님의 지식과 옛 자아인 타락된 우리의 지식이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마다 우리의 의지 안에 일어난 행동의 원인인 지식들이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자아의 옛 지식의 조명인지 분석하는 골치 아픈 점검이 필수입니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기 전에 한번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인지, 반드시 살펴보십시오.
이를 생활화하고 성령의 이끄심을 받은 삶이 무엇인지 늘 자신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삶은 우리 안에 죄의 본질인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이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으로 살려고 할 때 이렇게 살려는 의식마저도 옛 사람인 우리의 자아는 이 의식을 이용하여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할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도의 이 통곡의 소리가 우리의 귓가를 때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스스로를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우리 자신을 이기는 분은 오직 성령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성령께서 충만하시기 위해 우리를 더욱 성령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 롬1:2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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