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아브라함과 칭의 (롬5:1) 2,

생명있는 신앙 2014. 11. 28. 04:46

사도는 로마서 51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느니라." 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나아가게 하시는 것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여 주시는 칭의 입니다.  

 

1,

 

  믿음이 있기 전에 우리 지성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만 가진 우리 지성에 하나님의 지식을 적용시켜 주시고, 한 지식을 심어 하나님을 향한 새 싹이 돋아나게하시고, 그 새싹으로 우리 영혼을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이 지식은 복음이고, 복음의 코드와 같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하나님의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게하며, 지식들이 유기적 관계로 연합하고, 점차 진리 되신 하나님께로 성장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관계를 갖도록 해주는 반응을 나타내는데 그 첫 반응이 믿음입니다. 

 

2, 한 영혼 안에 두 생명

진리의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 심겨지면 사람은 자신 안에 본성의 지식과 연합되지 않은 또 하나의 다른 지식이 자리를 잡았으므로 두 개의 생명이 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두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인 복음과 타락한 자기본성의 지식이고, 이 둘이 한 사람의 영혼 안에 서로 시기하고 쟁투하여 실질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런 주도권 쟁투 싸움이 두 가지의 뚜렷한 행위로 드러나는데 하나는 타락한 본성의 행위들, 곧 죄의 행위를 행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 행위를 미워하고 후회하며 죄의 행위로 인하여 자신을 괴로워하며 좌절하고 낙심으로 갈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행위에 대한 자기 판단으로 말미암은 심판과 자기 결단의 과정으로 드러남으로 사람에게 나타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죄를 행하는 것은 내속에 거하는 죄의 요소가 죄를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죄라고 판단하는 것도 자기 자신인데, 그 판단의 근거가 진리인 복음에 기반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음을 많이 들어도 자기 행위에 대한 성찰과 판단이 없고, 불법적 자기행위를 정죄하는 판단이 없다면, 아직 그 사람에게 복음이 심겨져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이런 사람의 신앙행위는 자기지식이 복음을 받고 왜곡시킨 결과입니다.

 

3, 복음의 역할

복음이 사람에게서 제 역할을 하려면 반드시 성령께서 복음을 지성에 조명하시고 심어주셔야 하고, 복음이 지성에 뿌리 내리고 새싹을 틔웠을 때, 비로써 복음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 복음을 듣기만 하는 것으로는 결코 그 복음이 사람에게서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너희가 내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뒤로 던지며 시편 50:17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왜곡되게 이해한 결과에 대한 판단을 말합니다.

나아가,
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시편56:5)

라고 말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곡해는 그들의 생각이 온전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대적하는 모든 생각은 곧 사악입니다. 그 생각은 자기 안에 있는 자기지식입니다.
사람은 이 지식으로 결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자기지식을 가지고 나아갈 것이 아니라 버리고 나가야 하고, 여기에서 버리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함으로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말씀하셨던 것을 의미합니다.

 

4, 세속적인 그리스도인

 

요즈음 세상에는 종종 하나님의 성령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 불러들이는 행사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만물가운데 보편적으로 편재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행사를 계획하고 시행할 때 맞춰서 역사 해주셔야 하는 매우 불편한 관계에 거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마음의 혼란과 어두움이 몰려와 앞을 가릴 수 없는 무거운 혼돈 속에 있을 때, 내적 자아를 씻기 위해 조용한 장소를 찾아 수양하거나, 세상의 모든 일을 떨쳐버리기 위해 세속을 벗어나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이런 시간을 이용해 우리 자신을 재충전하고, 활기찬 생각으로 새롭게 일을 하기 위해 별도의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아주 좋은 생각들입니다.
신앙인들도 가끔 이런 시간이 필요하고, 가능한 자주 이런 시간을 갖고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원도 가고, 수련회도 하며, 단체 행사도 개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짓눌린 우리의 영혼의 피로함을 씻어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악용하여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돈을 내고 이런 단체에 찾아가 자기를 수양하고 새로운 시간을 갖는 것에 대해서 참여자들은 잘 모릅니다.
이를 주최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목적을 위한 돈벌이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 단체가 주최하는 결과표를 발표하는 것을 보면 돈벌이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오히려 투자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대한 헌신된 일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나 행사는 사람을 속이지만 하나님을 속이지는 못합니다.
목적이 돈벌이 수단인 행사에서 참여자들에게 돌아오는 유익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결과는 속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마음에 위로는 얻었다 하지만 실지로 목적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를 처음부터 는 것입니다.
막았기 때문에 성령을 역사하실 수 없었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우리의 영혼에 복음이 심겨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복음을 자기지식으로 해석하여 복음을 뒤로 내던지거나 혹은 오히려 그 복음으로 더 사악한 결과를 드러낸다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하는 것은 복음과 성령이 아니고는 그 무엇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지식의 사람을 더 재충전시켜 사악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복음에 대하여 더 강력한 내성을 갖게 하거나 복음에 대하여 왜곡시키는 결과 외에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이 다 무엇이냐면?

우리 안에 복음과 타락한 우리 본성의 자기지식이 주도권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지쳐 쓰러질 것 같고 혼돈스러우며 도저히 자기 자신을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이 지쳤을 때, 우리는 조용히 우리의 골방으로 들어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자들의 상담도 좋고,

세상이 주는 즐거운 시간도 좋고,

세상에 있는 온갖 종류의 프로그램도 좋으며,

돈을 들인 여행도 좋지만,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복음이 우리의 자신을 내려놓고 나를 치료하시는 골방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때 복음은 하나님과 교제하여 엄청난 복음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갖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시시 때대로 혼자 기도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습니다.

초기에는 사탄과 대적하기 위해 유대 광야로 나가기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그랬습니다.
처음 부름을 받고 약 3년 동안 그는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아라비아 광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광야로 나와서 홍해를 건너 그 곳으로 갔고,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호랩산, 아몬드가 나는 산이고, 반석에서 물이 나서 200만명의 자기민족들의 목을 적셨던 뜨거운 더위와 사투를 벌인 그런 곳이었습니다.

주님과 바울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홀로 씨름했고, 가끔 하나님의 역사하신 현장에 자기를 이끌었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청하여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우리는 내 안에 복음이 성장하는 것을 저해하는 비 복음적인 행사에 귀를 기울이고 그곳에서 자기를 성장시키고 충전시킨다는 착각에 잘 이용됩니다.

이것이 어떤 행사들인지 잘 파악해야 합니다.
행사의 주최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 역사의 향방이 가름됩니다.
어느 누구라도 혹은 부흥회라도 주최자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은 어떤 목표가 있다면, 설령 그 행사가 성공적일지라도 그곳에서 성령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 행사가 성공적으로 보인 것은 오히려 타락된 사람의 자아가 만족한 즐거움이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복음을 반대하는 내성을 길러줄 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 안에 거짓된 옛 자아인 나를 버리고 진리 지식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계명이요 율법인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듭나도록 이끄시는 성령께서는 항상 우리 영혼의 지성에 진리의 사람이 되도록 복음을 심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복음이 우리 영혼을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 지성에는 진리가 점점 더 확장되어가고 예전에 이해하거나 지각하지 못하였던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이 이해되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하나님 아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의지하지 않으면 옛 자아가 진리의 말씀이라도 왜곡되게 해석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마저도 왜곡된 지식으로 이해되고 비뚤어진 기독교의 신앙을 갖게 할 것입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아들의 신분으로 성령의 이끄심을 받고 있으나 지나치게 세속적인 모습들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진리 말씀을 거짓되고 왜곡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자기 지식으로 조명하여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옛 자아를 내려놓아 우리 영혼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 육체의 운명을 다하는 날까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지만 복음의 사람이 강성하여져서 옛 자아를 이기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자신을 십자가에 쳐 복종시키는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지지 않을 때 쉬지 않고 우리 안에서 진리를 왜곡되게 하려고 조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아가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으로 행동하여 결국은 멸망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지식과 옛 자아인 타락된 지식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마다 우리의 의지 안에 일어난 행동의 원인인 지식들이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자아의 옛 지식의 조명인지 분석하는 골치 아픈 점검이 필수입니다.

말을 하거나 행동하기 전에 행동하려는 의지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인지, 반드시 살펴보십시오.

이를 생활화하고 성령의 이끄심을 받은 삶이 무엇인지 늘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무엇이 우선인지 항상 하나님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이 우선으로 맞추어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복음의 사람으로 계획된 생활이 필요합니다.

 

이런 복잡한 삶은 죄의 본질인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이 우리의 지성에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으로 살려고 할 때 그 의지마저도 옛 사람인 우리의 자아가 이용하여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할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도의 이 통곡의 소리가 우리의 귓가를 때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 스스로를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우리 자신을 이기는 분은 오직 성령 하나님뿐입니다.

 

5, 아브라함과 칭의

 

아브람이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지각을 가졌는지 지금 우리가 분명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만 그에 관하여 전승된 기록을 통하여 우리가 인식할 수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점진적인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소명이 있었을 때 타락의 본성인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여 이해하였고,

가나안에 이르러 애굽을 돌아 방황하면서 더욱 분명히 그의 지성에 밝혀졌지만 자기 지성의 지식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관계했고,

소돔에서의 전쟁의 승리와 이로 인한 큰 두려움으로 인하여 절망에 이르는 자기포기의 과정까지 아브람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이해와 해석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두려움의 밤, 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큰 두려움에 휩싸여 있던 그날 밤, 비로써 하나님에 대해서 세상 우상들과 구별된 신관을 가지게 되었으나 자기의 지각에 인식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갈대아 우르에서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강제적으로 지성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기셨고, 그 말씀이 아브라함을 움직이도록 하였으나, 다른 말씀이 조명되거나 말씀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성장하지 못하고, 타락의 본성의 지식의 이끄는 대로 이끌려 갔습니다.

아브라함 지성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과 타락의 본성의 지식이 함께 있었지만 대부분 자기지식의 이해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아브람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셔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들은 처음 말씀과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새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구성될 때 까지 아브람은 수년 동안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자기지식으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드러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믿음을 갖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셨을 때에도, 아직 아브람의 지성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명확한 지각을 가질만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람의 지성을 살피시던 하나님은 영혼에 새겨진 말씀이 생명력을 가지고 작용하는 것을 보셨고,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반응을 보셨습니다. 그것은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 두려운 상황 속에서 다시 의지를 가다듬었고, 일어나서 다메섹 엘리에셀에게 맡겼던 자기의 모든 권리를 철회하고 다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몸을 추스러 용기를 가졌습니다.

적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자기의 장막을 살피고 다시 지도자로 일어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지성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지식을 보셨고 그 지식의 반응을 믿음으로 드러낸 아브라함을 의롭다 칭하신 것입니다.1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지성에 복음의 지식이 심겨지고,

하나님에 관한 지각을 가지도록 성령께서 조명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유아정도에 불과합니다.

성령께서 이끌어 주심으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복음에 관한 하나님의 지식이 복음을 중심으로 점차 증가하여 연합되므로, 비록 우리의 지성에 지각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영혼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로 믿음을 일으키게 합니다.2

우리의 지성에 심겨진 복음은 반드시 자라게 되어 있고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속적으로 전파되어진 선포된 말씀을 들음으로써 복음 인격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느 시에 하나님을 향하여 강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는 날이 있고, 또 다시 자기지식의 사람으로 돌아가 자연적 본성의 사람의 인식으로 살지라도 우리 안에 심겨진 복음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고 나아가 마침내 복음의 인격으로 성장하여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자기의 몸을 통해서 낳은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 약속의 말씀은, 실지로 그가 그토록 원하는 것이었습니다.3  

하지만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받았고 믿을 때, 육신적 상태를 자기지식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내 사래는 경수가 끊어져 엄마가 될 수 없는 여자였고 자기 역시 늙어 힘이 쇠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불가능한 것들의 지식을 배제하고 성령께서는 그의 지성에 심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의지에 반응하도록 조명하셨던 것입니다.

 

마침내 아브람은 하나님과의 분명한 언약으로 의식을 갖게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쪼개어진 제물 사이를 하나님이 거니셨고, 흠 없는 언약이 맺어졌습니다.
사단의 교묘한 계락을 보십시오.

최초 인류를 타락에 빠뜨린 그 장본인은 아브람의 영혼에서 또 다시 활동하였습니다.
아브람에게는 타락의 본성의 지식이 있고, 이는 사단이 부리는 거짓지식들이었습니다.
사단은 아브람으로하여금 타락된 자기본성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해석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위해 자기의 역할이 무엇인지 살펴보게합니다. 소위 오늘날 합리주의 이후 철학적 사고에 따르면 아브람의 이성이 활발하게 작용하도록 사단이 부추킨 것입니다.   

마침내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사람 아담의 아내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사단의 유혹에 넘어져, 자기도 범죄하고 남편에게도 범죄하게 한 것 처럼, 사단은 또 사래에게 접근하여 자초지종을 주고받으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내 몸에서 날자가 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고 대답했습니다.
의심은 자기지식의 해석에서 시작됩니다.
자기지식은 타락의 본질입니다.
자기지식은 거짓입니다.4

아브람과 사래의 마음은 조급증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려면 조금이라도 젊고 힘이 있을 때 성취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지금 전혀 불가능한 상황이고, 아브람마져 점점더 늙어갑니다. 

사단은 아브람과 사래의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낚아채 죄악을 양산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계략은 하와 이후에 또 한번 성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확실히 신뢰한 아브라함이 아내 사래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말했습니다. 
사래는 자기가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하갈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요구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인간의 의식에서 계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시간에 방식으로 성취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자기가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의무감이 마음에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타락된 본성의 지식이 하나님의 약속을 해석한 것이고, 이것은 곧 거짓이 진리를 해석하여 왜곡된 진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복음을 듣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믿음을 가질지라도,

우리의 타락된 지성이 복음을 곡해하는 우를 범하여 처음 믿음을 가진 후부터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나 교만한 사람, 자기의 의지가 강한 사람에게 더욱 크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믿음은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대로 지각하고, 이해하는 수준에 이를 때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지만,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이, 갓 믿음을 가진 거듭난 사람은 타락된 지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조명하여 왜곡시키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 수준의 거듭난 사람에게는 성령의 강권적인 이끄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성령이 자기를 이끌어주며 지성에서 조명하여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할 수 있도록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브람이 처음 약속을 받았을 때에는 사래와 의논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켜 보려는 어떤 열심을 드러냈으나, 이삭을 바치는 확실한 믿음의 실천이 그 영혼의 지성에서 진리대로 반응하는 사람이 될 때에는 아내 사래와 의논하지 않고 자기의 지성에서 조명하는 지식이 이끄는 대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지성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많은 말씀을 받고 들음으로 많은 지식들이 새겨져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었을 때 진리의 지각을 가진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비로써 아브라함을 향하여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12)”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영혼의 지성이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는 반응을 드러내는 지각을 가질만한 지식을 가지기 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첫 소명을 받은 때는 70세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믿음이 있다고 인정을 받은 때는 85세입니다.

이때 약속을 받고 곧 바로 자기의 열심으로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86세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언약을 받고 할례를 받아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때는 99세입니다.

이때 아브라함과 소돔의 멸망과 롯에게서 모압과 암몬 족속의 탄생하고 자기가 100세가 되었을 때 불가능한 상태에서 기적의 대 역사가 일어나 이삭을 낳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람의 주위에서 일어난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들 속에서 도저히 납득이 불가능한 하나님의 개입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됩니다.

90세 된 여인이 세상 사람에게 집중된 이목을 받고,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건은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고,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비맬렉의 태를 열어주시는 일을 하시는 분으로 알려지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사건,

자신에게서 일어난 사라의 잉태와 이삭의 출생 사건,

자기의 삶 가운데 있었던 여러 기적들은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납득할 수 없는 세계적인 사건들이며, 이것이 자기와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는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지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은 때부터 이삭을 낳은 때까지 30년 동안 있었던 그의 삶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삶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어떤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평생을 왜곡되고 거짓된 지식으로 살아온 사람이 자기의 영혼에 심겨진 복음을 그대로 지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놀랍게도 오늘 까지 모든 기독교의 가르침에는 타락한 본성이 변화되어 진리를 지각하는 사람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옳은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가인이나 아브라함의 삶 가운데서, 혹은 기타 여러 사람들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가진 사람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본성의 지식은 그 자체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이기 때문에 진리를 받으면, 그 진리를 왜곡시켜 해석한다는 것을 가인과, 사라, 하와를 통해서 분명히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이 변하여 새사람이 된다는 가르침은 결코 옳지 않고, 그 타락한 본성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진리대로 믿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순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이끄심으로만 가능하고, 우리의 영혼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많은 경험을 갖고 진리의 지식을 지각할 수 있도록 많은 지식을 생성하여 가지기 까지는 우리의 믿음이 신뢰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확인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비로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아시게 됩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때 전적인 신뢰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지성은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확신과 의지, 이런 것들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약속을 성취해주시는 그 하나님이 자신의 전부라는 것을 진리의 지식이 그의 지성에 충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성령에 이끌려 신앙생활을 시작한 성도가 성장된 복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그 순수한 신앙을 드러낼 때 까지 얼마나 많은 왜곡된 자기 지식을 억누르는 사건적인 경험이 필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이런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복음의 씨앗으로부터 반응하는 행위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복음의 지식이 드러내는 반응이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지식으로 결코 반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어떻게 사람으로 하여금 단번에 믿음에 이르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복음은 아브라함이 30년에 걸쳐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한 삶의 과정이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곧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성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부름을 받고난 이후 30년간의 삶속에서 매순간마다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어디에서나 계시는 하나님,

위기나 혹은 삶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자신을 통하여 계획을 가지셨고 그 일을 수행해 가시는 하나님,

자기의 삶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시고자 하는 어떤 목적에 있다는 것을 자기 안에 조금씩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로 성장하여 지각을 가진 때 그 지식으로 지각하여 의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의 종교적인 열심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된 이삭의 출생 사건은 사람까지도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혈육관계를 정리해야하는 엄청난 아픔을 치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이스마엘과 해어지는 고통이었습니다.

자기의 삶이,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해서,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서,

사람이 알 수 없는 그 계획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존재하고,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그 계획에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만물을 자신의 뜻 안에서 능히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은 비로써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의 손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명확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영혼에 있는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의 조명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지식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가치함과 연약함을 깨달아 알아,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 순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도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사람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나니(1:17)"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절대적 순종에 이르게 하는 자기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밝혀주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대적인 자기 부인의 지식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다가온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네가 누군지 아느냐

너는 이방인이야

너는 나와 아무 관계없어(2:3, 12)”

너희는 거짓의 아들들이야(8:44)”

내가 창조한 나의 아들들이 죄를 짓고 정욕을 일으켜 잉태하게 되자 너의 존재를 허락함으로 태어난 죄의 결과물이야

종의 아들 이스마엘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야,

죄의 자식”, ‘정욕의 열매이 비극적인 선언이 복음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이방인,

이 삼각관계를 연결하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비로써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본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는 우리 앞에 내침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잔인하게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우리 스스로 죽이고 없애버리도록 죄 없는 분에게 죄를 담아 우리로 우리의 죄를 죽이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으나 실지로는 우리의 근원인 죄 자체인 우리 자신을 죽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존재 하게한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죄를 죽임으로 우리가 죽었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임으로 곧 죄된 우리를 우리가 죽인 것입니다.

 

사도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20).”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 제물로 바칠 수 있는 절대적인 순종을 드러낼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한다는 절대적인 진리가 영혼의 지성에 명확하게 새겨지기 전까지 우리의 믿음은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지식이 우리의 전인격으로 체험되는 명확한 경험을 하기 까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신앙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을 죽였다는 그 엄청난 죄의 용서함을 받기 위해,

우리의 회개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의 고백임을 알기까지,

우리는 전적으로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끄시는 성령,

아직 유아인 우리의 거듭난 존재를,

마침내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2)”의 말씀을 들을 때까지,

절대적으로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아멘,


  1. '이 [본문으로]
  2. 비록 지각되지 않지만, 아직 세상에 대한 의식이 없는 어린아이가 활동하는 것같이 지적 열림의 시기가 아닐지라도 아이의 의식 활동이 지속되는 것과 같다. [본문으로]
  3. 아브람의 본성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아직 다신론 개념에 의존된 신앙이었기 때문에 어떤 신이든지 약속을 받기를 원했다. [본문으로]
  4. '요한복음 8:4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