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롬5:1)

생명있는 신앙 2014. 12. 8. 08:33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실지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며,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는 행위는 더욱더 우리 본성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이지만 우리 안에는 두 개의 우리 인격이 있는 것 처럼 인식됩니다.

마치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인 또 하나의 우리의 본성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점차 사도 바울의 사상을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로마서의 마지막까지 읽게 되면 영혼의 지성은 아마도 바울의 사상을 많이 담아 가질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한편으로는 타락한 본성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행위를 나타내지만, 아주 미미한 부분으로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우리로 믿음을 드러내게 합니다.

저는 이 성령의 사역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그것을 말하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큰 오해를 할 것이지 때문입니다.

저는 로마서 5장을 시작하면서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에서 역사하시는 사역을 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점차 밝혀 가고 있습니다.

믿음이 성령의 사역이므로 사도는 이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고, 이를 의롭다 칭하므로 마치 우리의 본성이 의로운 행위를 한 것처럼 의롭다 하시는 칭의를 말씀했습니다.

아브람의 삶을 개혁교회의 교리인 구원의 서정을 비추어 볼 때 소명-중생-회개-신앙-칭의, 소명-중생-신앙-칭의-회개의 순으로 바뀌어 회개가 중간에 있는 것을 뒤로 오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혁교회의 교리는 성경의 중심에서 사실대로 전개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논리적인 적용으로 그 순서를 말하여 온 측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자기 인식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본성이 드러내는 반응인데, 소명으로부터 칭의에 이르기 까지 단 하나의 과정도 타락한 사람의 자기의 본성의 행위가 아님에도, 회개가 중생 다음에 일어난 믿음의 전단계로 두고 있지만 실지로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창세기 15장에서의 상황은 아브람의 자기 본성의 의식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께서 행하시는 사역이 그의 의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분명히 보였습니다. 이를 증명하는 분명한 사실은 15장 이후에 그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데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아 하나님의 약속을 인위적으로 성취하려는 열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비 신앙적인 열정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세속적인 열정으로 교회 사역자들이나 교사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타락한 본성을 가진 우리를 다시한번 복음에 비춰 보아야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믿고 있는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복음에 비추어 우리가 어디서부터 비뚤어져 있고 타락한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매순간 우리는 복음이 비추는 우리의 정체성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의 지성이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하는 지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이방인이다라고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죄와 정욕의 열매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왜곡된 지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으로는 복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결코 진리대로 지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이 비춰지면(들려지면) 우리의 지성은 복음을 왜곡되게 이해하고 변질된 이해를 갖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 본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왜곡된 지식과 일치하지 않은 코드를 가지고 있는 진리입니다. 이 복음은 성령의 조명으로 지각 될 수 있는 지식을 가지지 않으면 어떤 해석도 결코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복음을 인간의 비참에서 행복을, 처절한 절망과 실망, 낙담에서 희망을, 삶의 전환을 주는 인본주의적인 메시지로 변질시켜 버린 것이 타락된 지성이 진리를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바른 지식이 아닙니다. 마치 아브람과 사라가 하나님께서 주신 네 몸에서 날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15:4)’ 의 약속을 자기들의 지혜와 열심히 하나님께 성취하여 드리려고 몸종 하갈을 이용하여 이스마엘을 낳아 후사를 삼으려고 한 것과 같이 인위적이고 세속적인 열심에서 낳은 이스마엘과 같은 종교를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가 로마서에서 언급한 교회가 어떤 모습이며,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것입니다.

우리가 본 로마서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그리고 그들의 삶에 관하여명확하게 정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도는 그의 의식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이방인이라는 명확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타락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보냄을 받았다는 하나님의 사명을 명확히 드러내는 설명서입니다. 이를 통해서 사도는 우리가 죄의 열매이며 정욕의 자식임을 감추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는 없는 죄의 열매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과 누리를 화평이 바로 이방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방인은 그들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잉태 될 때, 하나님의 창조의 작정과는 관계없는 죄의 결과적 산물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창조에 아무런 관계가 없고 오직 죄와만 관계를 가진 존재일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욕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담과 하와가 정욕을 일어날 때 타락되지 않은 지식으로 자기의 정욕을 제어 했더라면 결코 태어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욕의 결과인 죄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부터 비참을 짊어지고 태어났으며, 우리의 미래는 영원한 고통의 지옥으로 던져질 수 밖에 없는 비참을 향하여 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정욕의 결과적인 열매인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줄 수 없습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창조시 작정하신 사람 외에 죄의 열매인 이방인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이 이방인에게 주어질 때 이방인은 그 사역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선의 결과적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실지로 그것은 하나님의 선에 있어서 무질서이며 이방인과 성령께서 조화되지 않은 것이므로 이방인에게 선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구원을 얻는 것은 천지가 바뀌는 역사가 아니고는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 천지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으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이방인에게 내어주었고, 이방인은 그 하나님의 아들을 죽임으로 천지가 뒤바꿔 버리는 사건을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고, 그 육신에 죄를 정하사(8:3) 죽음을 당하도록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죄에게 내어줌으로 죄를 죽이는 것이었는데 그 죄는 죽이는 사람이 자기의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를 죽이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죽이는 것이고 이것이 율법의 속죄제에서 분명히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신들에게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이 죽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에게 예수를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 은혜의 열매를 받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마땅히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은혜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했고 극한 감정으로 대적하여 내쳐 버렸고, 이것을 이방인에게 보냄으로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게 되었고, 이 처절한 십자가의 저주가 이방인 자기의 죄를 죽이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도록 내어주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이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되고, 결국 그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도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이, “! 내가 예수를 죽였구나하는 탄식의 지각을 가지지 않고는 결코 참된 회개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으면, 비록 우리가 교회에 나아가서 예배하고 찬양하며 열심히 봉사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

이것은 먼저 화목 되어야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