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하나님과 화평을 3,(롬5:1)

생명있는 신앙 2014. 12. 10. 09:08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

이것은 먼저 화목 되어야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너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은즉이라고 앞에서 말하면서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화평은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화평누리자고 말한 것이지 믿지 않은 사람에게 화평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주체는 복음이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 구절을 다른 말로 하자면, ‘믿음으로 말미암아성령의 사역에 이끌림을 받은 사람이 되었은즉,’ 이라고 바꾸어 말하고 의롭다 함을 받았은즉타락하여 죄의 열매로서 의를 행할 수 없는 존재인데 의롭다 칭하여 주심을 받은 것은 순전히 자기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대한 판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서 의를 발견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순전히 성령의 뜻에 따라 우리는 전혀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택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끌림을 받고 있으므로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을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으로 아브람을 이끄신 것처럼, 복음을 보내시고 그 복음으로 우리를 이끄셔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에 속하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는 아브람의 삶의 자취를 잘 살펴서 하나님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신앙 성장의 과정을 닮아가는 것은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상기 그림의 과정에서 볼 때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후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지식을 가지기 까지 오늘 날처럼 성경도 없었고,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사도와 목사와 교사가 없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면서 스스로 깨닫기 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직접 교통하는 관계를 가지는 동안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이 절대로 요구되었고 실지로 성령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도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경이 있고 이를 가르쳐 주는 목사와 교사가 있으며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처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믿음을 가지고 교사들로부터 집중적인 교육을 받게 되면 단시간에 신앙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진리대로 이끌림을 받기 위해서는 진리의 조명을 받은 교사의 인도를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이런 진리안에서의 신앙을 유지하는 삶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개혁교회가 밝혀준 구원의 서정으로 인하여 성령의 사역중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6:33)” 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께서 이끌어주셔야 하고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목이라는 주제에 대해 집중적인 조명을 받아 올바른 이해를 발견하고 우리의 위치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이유로 우리와 화목하셔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시지 않으면 하나님께 어떤 손해가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와 하목하셔야 하는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이유를 발견한다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유익이 되겠습니까?

저는 이제 그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 세상에 사람 지으실 것을 계획하셨고 아담을 지으셨으며, 아담 안에 모든 사람들을 계획하셨습니다. 이 계획은 창조적 관계에 속한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심으로 인하여 어떠한 갈등도 없으며 사람과 화목이 필요한 조건들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음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분명히 잘못은 창조적 관계에 속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있고, 이들은 창조적 관계에 속한 계획에 의하여 존재하도록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경이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은 것 같으나 사도에 의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사도는 이를 약속의 아들과 종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과 이방인으로 구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관계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범죄는 정욕으로 명확하게 드러났고 그 정욕으로 인하여 이방인을 잉태하여 낳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인의 출생으로 정의하고 가인의 삶을 통해서 명확히 보여 주었습니다.

지음을 받은 인류의 조상이 타락으로 인하여 나타난 정욕이 낳은 열매는 하나님의 창조적 관계와 다른 죄의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것이 이방인의 탄생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점을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부분입니다.

누구든이 최초에 지음을 받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고 불순종으로 인하여 나타난 죄의 결과가 정욕을 일으키는 것이고 이 정욕으로 가인을 낳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엇 커다란 걸림돌이 되어 바울이 말하는 서신들을 이해하는데 필연적인 오류를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해석들이 개혁교회에서 말하는 이방인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에 대해서 창조 계획에 속하였다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논리입니다. 이제 개혁교회는 냉정하게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경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창조적 관계와 죄의 결과적 관계, 허용적 작정에 관한 관계를 드러내는 복음의 중심에서 성경을 볼 때 진정으로 각자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가치함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복음의 긴박성을 발견하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대 사명을 주시는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학에 있어서 여기에서 정욕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태어난 이방인의 정체를 냉정한 판단으로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열린 사고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긴박성에 대해서 솔직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의 지배를 받음으로 정욕이 일어나 이방인의 조상인 가인을 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 부터 모든 창조적 관계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지속적으로 정욕을 일으켜 죄의 열매들을 양산하였고 아브라함에게서도 이런 현상을 나타나 하나님을 만난이후 인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려는 열정에서 이스마엘을 낳는 엄청난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뭐라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는 것은 인위적인 열정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창조적 관계와 무관한 죄의 결과를 드러냈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삐뚤어진 영혼의 지성이 가진 왜곡된 지식으로부터 왜곡된 판단의 결과로 자기의 몸으로부터 아들을 얻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열정으로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의 탄생하게 할 것을 미리 아시고 허용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욕으로 인한 죄의 결과적 산물들로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들로서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허용적인 결과적 산물이라는 것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존재적 가치가 무엇인지 이미 파악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거나, 혹은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관계에 속한 아담으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기로 계획된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은 정욕이 아니면 우리는 태어날 필요도 없고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미리 아시고 허락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태어났을 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의 존재를 계획하셔서 아담의 허리에서 태어나도록 작정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이방인들은 순전히 죄의 결과적 산물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하나님의 선이 우리의 존재의 억울함에 대해서 하나님의 책임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책임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의 존재,

오늘 우리는 엄청난 신학적 비밀들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집을 향하여 돌진하는 데모하는 군중들처럼 돌격의 태세로 모여있는 것 같은 연상을 가집니다.

우리는 늘 우리를 존재하게 한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한시적으로 재한 되어 있고,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존재하는데, 불멸하는 영혼을 가지게 해놓고 우리에 대해서 무관심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해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사고가 영혼의 지성에 뿌리박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우리를 이렇게 만드실 수 없다라는 우리의 지성이 만들어낸 합리적인 정의가 하나님의 존재를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의 아들들이 존재하도록 계획하고 창조하였는데 그들이 범죄하여 정욕을 일으켜 너희들을 존재하게 하였다.’

나는 저들을 선하고 아들답게 지었으나, 저들은 나의 뜻을 저버리고 내 말에 불순종하여 너희들이 존재하게 되는 이 엄청난 일을 하고 말았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무관하심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친히 지으신 아들들이 행한 범죄를 마음 아파하시고 이를 통하여 태어난 이방인들에 대한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보실 수 없으실 만큼 마음을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해 한 아들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 이세상에 오셔서 어떠한 삶을 사실 것인지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께는 악이 없으십니다. 미움과 분노가 없으시고 원망과 갈등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은 그림자조차 없습니다.

어떤이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들어 서슴치 않고 분노하시고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옳은 공의로운 일로 피조물의 아픔을 모른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악행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공의로운 악행이란? 옳지 못한 행위에 대한 반응적 행동으로 인하여 피조물이 자기의 죄로 고통을 당하도록 미움과 분을 드러내시는 직접적인 행위) 하나님께는 미움이 없습니다. 악에 대하여 미워하시거나 진노하시는 것은 본질상 하나님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 있다면 모든 미움과 분노와 원망 이러한 악행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악행은 공의로운 판단에 의한 행위든지 정의로운 반응이든지 모두 사람의 왜곡된 지식에서 비롯되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오직 이방인의 영혼의 지성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방인의 영혼은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결과로 비롯된 자신의 존재와 미래에 대한 비참에서 자신의 존재의 근원들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미움으로부터 시작되는 악행은 이방인의 영혼의 지성에서 분출하는 왜곡된 지식이 만들어내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는 참된 목적은 창조관계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중단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정욕적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가 중단되면 그 시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들은 정욕적인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죄의 결과적인 사람들이 탄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는 죄로부터 용서받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이방인들의 분명한 구별이 보이게 됩니다. 사도는 이것을 깨닫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그 바라는 것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8:19~21)”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 뿐아니라 또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8:23))”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죄의 열매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것을 고대하는 우리 영혼이 추구하는 갈급한 소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의 아들들로 태어났고, 영혼을 소유한 피조물들입니다. 우리의 영혼에는 지식이 있고, 이 지식은 하나님의 본성을 닮은 상태대로 피조 세게에 창조적인 행동과 열매를 드러나게 하는 원인입니다. 이 지식이 세상을 만들고 바꾸며 건설하는 원동력이라면 타락된 세상은 이 지식으로부터 흘러나온 행위들의 결과입니다. 이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 있고, 영원한 멸망을 안고 죄의 열매인 정욕의 아들로 태어난 비극적인 존재인 이방인은 불멸하는 영혼의 세상에 들어갈 탠데 그곳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의 세계가 다시 이루어져서는 결코 안됩니다. 불멸하는 영혼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함께 할 수 없고, 별도의 장소에 가두어 둘 수 밖에 없는 부득이한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혼이 자기의 지성의 지식을 지각하지 못하는 지옥을 만드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혼은 불멸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불멸하는 존재가 처하여지는 곳이 영원한 지옥이고 이방인의 영혼은 필연적으로 이곳에 처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존재의 처참함을 이해하십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아 태어난 우리들,

우리의 영혼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코 들어올 수 없는 비극적인 존재,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수 밖에 없는 소망 없는 존재가 이방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사하셨다면,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이 직시하고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용서 받고 구원을 받은 그들이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입니까?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죄를 범하여 한없이 정욕을 일으켜 이 세상에 지옥 가는 이방인들을 낳았으니 그들을 낳은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지옥갈 수 밖에 없는 이방인들을 낳은 것을 죄스럽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무한정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이방인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하다면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이방인들을 섬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이방인들에게 죽임을 당해도

원망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의미들을 살펴 보십시오.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동행하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라 했으나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랑.

이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자기는 죽은 삶을 살라고 하셨고,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삶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여러분이 죄를 범하여 저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믿는 여러분에게 제가 권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 삶을 살기를 권합니다.

여러분이 죄를 범하여 정욕으로 낳은 이방인들을 위하여 여러분 자신을 내 놓으세요.

교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화목하셔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에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 이방인들을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자기의 몸을 내 놓으셨던 것입니다.(에베소서 2)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시려고 하시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정욕으로 우리를 낳게 되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내 놓으시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게 된 원인이 자신의 범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정욕때문인 것으로 여기시고 우리를 섬기시되 죽기까지 섬기시고 우리와 화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께서 화목하셨으니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