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2 (롬5:3)

생명있는 신앙 2015. 2. 15. 06:14

결론적으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삶의 형태가 성령께서 이끄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은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객관적으로 성령의 이끄시는 삶의 형태라고 판단을 받을 수 있는 삶에 대해서 구술해 보려고 합니다.

사도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화평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 보편적 사람에게서 신자가 지향하는 것인데 이런 신자에게 있는 또 하나의 삶의 형태를 환난-인내-연단-소망으로 진술하는 것입니다. 곧 신자에게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주된 삶의 목적과 대비되는 정 반대되는 다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삶의 첫 번째로 환란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런 삶의 모습은 구약 시대뿐만 아니라 신약에 있어서도 모든 신자에게 마땅한 모습으로 증언되는 삶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신앙인들은 신앙의 주된 목적을 성공적인 삶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사도가 말하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 오늘의 기독교는 기독교 신앙을 삶의 가치 증진과 명예, 그리고 부를 얻는 도구로 생각하고 이를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과의 차이는 아래의 그림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비그리스도인에게 없는 진리의 지식이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이 진리의 지식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느냐? 그것은 자기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을 뿐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대한 위의 두 가지 주장으로 갈리어 신학이 혼란스러워졌고 결국은 신학이 기독교의 정결성을 훼손하고 말았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자기의 의지로 가능한 것인지에 관한 결정을 말하는 것인데 신학자들은 모든 신학의 최종 결정에 대한 분명한 Canon 을 성경이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진리를 향한 생명을 내건 희생과 헌신으로도 성경에서 그 canon을 발견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드러냈기 때문에 훼손되어가고 있는 기독교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공주의 기독교를 양산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제제를 가하지 못하였고 결국은 기형적인 기독교의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행위로 말미암아 그 사람 속에서 사람의 삶의 이끄는 주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아무리 일반적인 삶의 행위라 할지라도 그 행위를 이끄는 주체가 본성의 지식인지 아니면 진리의 지식인지에 따라 그 사람의 주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나아가는 신자의 삶의 형태에 있어서 환난과 인내와 연단, 그리고 소망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비신자에게 있어서의 삶의 형태와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비신자는 자기 안에 진리의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에 자기의 지식으로 자기의 삶을 판단하고 결정하게 됩니다. 자기의 지식은 본래 왜곡된 거짓으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이기 때문에 그 지식의 판단과 결정 또한 왜곡과 거짓의 결과뿐입니다. 비신자는 실지로 자기 안에 어떤 Canon 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삶을 아무렇게나 방치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방치함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부과되는 어떤 책임도 없습니다. 마치 맹수가 선한 동물을 물어뜯어 죽이고 자기의 배를 불리우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맹수를 심판하는 어떤 규범이 그들에게 통용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사도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양심을 부여하심으로 스스로 자기의 행위를 돌아보고 그 행위가 자기와 사회에 주어지는 결과에 대하여 판단하게 하였다고 말하고(2:12), 개혁신학을 지켜오고 발전시켜온 우리의 선배들은 하나님께서 비신자들에게도 그들의 삶이 어느 정도 안전을 유지하도록 최소한의 canon을 부여하셨는데 그것이 일반은총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를 부여하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논하지도 못한체 페허가 되고 시랑이가 우글거리는 볼품사나운 피조세계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비 그리스도인의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반은총이 그들의 삶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지켜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지로 그들의 삶에게 있어서 죄를 향한 욕구를 억제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함으로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불만이었습니다. 즉 비 그리스도인의 삶은 충만한 죄의 삶을 누리지 못함에 있어서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아무리 천성적으로 선하고 무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내부에 들끓은 죄의 도사림을 결코 피할 수 없고 그들의 영혼 깊숙이 심겨진 양심이 그들에게 얼마나 강력한 대적으로 대하고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의 삶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없는 삶이지만 실지로 거짓과 왜곡된 지식으로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사람의 본질에 관하여 말하면 이야기가 곁길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이미 앞에서 충분히 말했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고 위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본성의 지식의 사람일 때에는 진리에 대하여 원수였으나 진리의 지식이 우리에게 들어와 삶을 살게 할 때 비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는 참된 목적과 그 뜻이 무엇인지를 점차 알아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은 우리 안에는 옛 본성의 지식과 믿음에 이르는 진리의 지식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우리 영혼 안에 있는 영이기 때문에 그 영의 정체에 따라 우리의 삶의 모습이 다르게 됩니다.

곧 영은 지식으로 그 본질이 지식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영에 어떤 지식이 담기느냐에 따라 그 지식의 사람이 된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의 구별은 창조주의 지식을 가진 하나님의 영과 지음을 받은 피조물의 영입니다. 또한 창조물과 피조물은 존재론적인 방식과 삶의 양태에 있어서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존재론적이라 할 때 창조주는 모든 면에 있어서 무한이지만, 피조물은 유한합니다. 삶의 양태에 있어서는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양태를 가지시지만 피조물은 창조주에 의해 부여된 기준의 삶만을 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창조주의 지식을 가지거나 혹은 그 지식을 인식하거나 지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의 지식은 피조물의 지식과 구조적으로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은 피조물이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는 자기지식을 가지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지식을 가지는 방식은 앞의 글 영혼에 관하여 지식 생성을 설명할 때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와 같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지식의 조명을 받아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신 지식마져 망실됨으로 인해 사람은 더욱 왜곡되고 불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께서 지으시기로 작정되어진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만 적용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 함으로 타락하여 낳은 이방인에게는 이것 마져 적용되지 않은 그야 말로 비참한 운명의 존재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발 한발 우리 앞으로 걸오 밀려오는 환란의 정체와 그 환란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지 그 배경으로 이끌려 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에서 어디를 말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들과 이방인이라는 주제의 중심으로 항상 밀려들어갑니다. 원인은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보게 된 것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입장에서 정체성을 찾는 다면 시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자만 하나님의 아들들의 입장에서 자기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본문을 대한다면 이 본문이 전혀 다른 시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실 때 계획되어진 아담의 정통 후손이라면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1) 가진다는 말은 자신이 만족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기준을 좋아하신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