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롬5:2)

생명있는 신앙 2015. 1. 3. 08:26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2)

우리는 앞에서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느니라라는 말을 살폈고, 성경은 이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쉬운 말로 이해하면 믿음을 가진 성도가 은혜의 집안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해 되도록 말한 것입니다. 부언 하자면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하고, 믿음은 우리 자신으로가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감으로 인하여 우리 영혼의 지성에서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지식에 의해 당연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께서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일어나고 이로 말미암아 피조물인 사람에게 나타나는 효과인 것입니다.

믿음이 본질상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앞에서 충분히 살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자연인의 본성으로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지 아니하기 때문에 믿음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그 어떤 기대도 자연인의 영혼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이끄실 때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지식을 심으시고,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심으시는 지식을 지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지식으로 전인으로 행동하게 함으로 우리에게 믿음이 나타나게 하실 때,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지식을 조명하셔서 타락한 자연인에게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생성된 지식은 타락한 자연인의 지식과 순전히 구별되고 이 지식은 점차 성장하여 자연인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변화시키는 씨앗이 됩니다. 이 지식은 순수한 지식이고 이 순수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피조물인 사람으로 살게 하셨던 삶을 살 것입니다.

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이런 지적인 작용을 가진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지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성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조명 받아 생성한 지식이기 때문에 순전한 진리의 지식이고, 영혼의 지성으로 하여금 이 지식을 행동으로 드러내도록 의지에 반영합니다.

사람의 전인에 있는 마음은 피조 세계의 한 개체로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의지의 기관입니다. 사람 영혼의 수많은 지식을 담고 있고, 그 지식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행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표현하는 의지를 발하는 기관이 필요합니다. 지성이 지식을 마음에 반영하면 마음에서는 의지가 일어나고 그 의지는 감각적인 행동을 하는 육체의 기관에 전달됨으로 지식을 표현하는 행위를 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사람을 이끄실 때 하나님의 지식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여 지성으로 하여금 반영하는 대로 지식을 생성하도록 합니다. 이 지식은 사람의 지성에 심겨지고 지성은 이를 지각하여 마음에 반영합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일어나는 지적인 작용의 과정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연인의 본성인 영혼의 지성으로 생성한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조명한 지식으로 행한 행위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것은 자연인의 본성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것입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찾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다가오셔도 인식하지 못하고, 영혼이 이를 지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처음 믿음을 드러낼 때 자기 지식과 지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의 영혼에서 하나님을 조명해 주심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지성에 반영되어 비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로서 그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 지식으로 행동하게 되었는 것인데 이때 지식이 본성으로 생성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생성한 것입니다.

자연인의 본성은 타락하여 지성에서 생성한 모든 지식이 거짓되고 왜곡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서 작용하고 있는 모든 지식들이 반드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들로 하나라도 진리대로 된 지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조명함으로 생성한 지식은 우리 본성의 지식과 구조가 다른 진리입니다. 우리 본성의 지식과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생성된 이 두 지식은 같지 않습니다. 어떠한 상태에서도 결코 하나가 되거나 본질상 같은 의미를 가진 지식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한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말미암아 지성에 생성된 지식은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입니다. 그러나 본성의 지식은 하나님에 대해 결코 지식을 생성하지 못합니다. 본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조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식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성의 지식에는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지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성령께서 조명해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은 혈과 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우리의 지식이 되어 우리로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으로 반응하여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3:3~8)

이렇게 거듭난 사람에게는 본성의 지식과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말미암은 두 가지의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 두 지식은 한 사람 안에서 자신의 지성이 생성한 지식이지만 같은 지식이 아닙니다. 본성의 지식은 자기 지식으로 생성한 지식이고, 다른 지식은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생성한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성령께서 그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조명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생성하도록 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하여 반응하게 하도록 하는 지식을 가지게 한 것을 말합니다.

본성의 지식에는 두 가지의 특질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지이고 다른 하나는 결함입니다. 무지는 말 그대로 그 사라의 지성에 객체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 객관적 실제와 관계를 가지나 그것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그 실제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힘입고 살고 있으나 하나님에 대해 반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지입니다.

두 번째 결함은 본성으로 가진 모든 지식은 반드시 결함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결함이란? 반드시 함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 부분이 없는 상태로서 포함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의 지식은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그 지식의 부족함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계속해서 지식을 생성하고 그 지식으로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모든 지식에 반드시 함의 되어야 할 한 가지 이상의 지식이 함의 되지 않으므로 우리의 지식은 거짓이 되고 왜곡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으로는 결코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진리를 발견하거나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인류가 존재한 이후 이 땅에서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성인이라 칭함으로 받으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남긴 지식의 유산들이 결함이 있으며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진리를 말하지 않았고 자기의 본성으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고차원의 지식을 말한 것 뿐입니다. 플라톤을 비롯한 수많은 철인들에게서, 아시아의 성자 간디나, 유교의 창시자 공자에게서도 인생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나, 현대 철학의 기초를 말한 데카르트에게서도 진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니체를 위시로 하여 현대 철학자들에게서도, 사람은 본성으로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한 가지 분명한 진리만 드러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의 모든 지식에는 하나의 지식이 빠져 있다는 사실과 모든 지식들에 결함이 되는 그 지식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사실을 드러낸 것입니다.

놀랍게도 철인들은 이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들의 지식에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의 학문과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세계에 이르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철인들은 자기들이 깨달은 그 이상의 어떤 지식이 무한한 영역의 세계가 있다고 보았고 그 세계는 자기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지식이 이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플라통의 이데아, 데카르트의 진리 너머의 신, 현대철학자들의 무한반복의 변화, 이런 결론은 그들의 지식에 빠져 있는 모든 문제의 해답인 진리의 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결함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궁구하고, 찾고, 고뇌해도 자기의 모든 지식에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있다는 이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의 지식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결함으로 조명하여 생성된 모든 지식이 반드시 결함을 가지기 때문에 본성의 모든 지식에 반드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일 뿐입니다.(8:44)

아브라함이 데라의 집에서 데라의 아들로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부르셨지만 하나님께 대해서 반응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는데 그가 전혀 반응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람은 환상으로든 아니면 실재로든 어떤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브람이 모르는 것은 자신에게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던 상태에서든지 그는 지성으로 지각하고 감각되는 분명한 음성을 들었고,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그 음성에 사로잡혔지만 그 음성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하시는 분에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 안에서 누가 자기에게 말씀하시는지 모르지만 그분에게 반응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적인 신관에 따라 어떤 신이, 아니면 당시 자기의 마음에 가장 확신하고 있는 어떤 신으로 이해하는 그 신이 자기에게 말씀하셨다고 단순히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중의 어떤 사람이 종교성만 있고 아직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음성으로 나타나 사명을 주셨다면, 그가 자기에게 말씀하신 그 신을 하나님이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관을 지지하는 것도 아닌 다양한 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지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여러 신들 중 어느 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아브람에게도 동일한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고, 인류의 조상 가인에게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만나주시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한 것 같이 아브람의 의식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의식할 수 있는 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신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 있는 한계는 자기의 지성이 가진 신 의식에 대한 한계 안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소년인 어린 사무엘에게 잘 나타납니다.

실지로 사무엘은 신에 대한 지식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그의 지성에 조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 음성을 제사장 엘리의 음성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는 세 번씩이나 그 음성에 반응하였으나 그가 알고 이해하고 있는 지식의 한계를 벗어나 초월적인 하나님께 반응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에게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지식은 영혼의 지성에서 바르게 지각되거나 혹은 우리의 의식에서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영광이라는 말도 사람의 의식에서 뚜렷하게 지각되는 말이 아니라 막연한 추상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영광을 느끼거나 경험을 하게 되면 영광에 대한 감동을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광은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광이란?” 자신에게서 발하여진 빛이 주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지각되는 빛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영광은 진정한 의미에서 영광이 아니라 영광 화된 감정입니다.

실제가 아닌 사실에 영광 화한 것으로 사람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는데 이를 인용한 것입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는 영광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광을 부여했을 때만 가능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위선된 신앙으로 쉽게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성공주의나 혹은 신비주의 신앙인들에게서 더 자주 언급되고 대중들이 위를 향하여 손뼉을 치며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영광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영광을 돌린다라고 까지 말합니다.

자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이런 대중적인 표현은 정말 교회 안에서는 행하여서 안 됩니다.

이 말을 잘못 오해하면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나타난 빛을 하나님께로 돌린다는 표현이 될 수있습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5:41)”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분명히 이해할 것은 사람에게는 진정한 영광이 없습니다.

나타날 수도 없습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타난 영광에 신자들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골로세서 3:4에서 사도가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은 표현상으로는 좋은 의미로 말하는 감정일지 모르지만 실지로 우리의 무지와 결함이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는 감성적인 표현임으로 매우 유의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은 영광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분명히 알 것은 영광은 하나님께만 있고, 하나님에게서만 나타나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광을 주셨을때 이를 돌리는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께 주시는 영광은 대중들의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사고는,

레위기 9:6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리라

이사야 6:3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리라

이사야 35:2 “레바논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광이 하나님께만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영광이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사고에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라는 말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은 신자가 하나님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그의 영광의 빛을 느끼고 지각할 수 있는 감정으로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고 그 찬란한 영광에 우리 영혼이 적시고 감각하며 지각하여 노래하지 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찬양,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할 수 있는 것, 이 마음을 우리에게 부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 예수를 믿을 때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요11:40)  믿을 때는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조명하셔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심으셔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지식을 가질 때 그 지식으로 이끌림을 받는 순간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으로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