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죄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처럼 혼탁하고 신학의 혼란 속을 살아가는 세대에 확실한 개념이 정의된 신학을 듣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시간 우리는 거듭남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정의함으로부터 명료한 신학에서 주는 말씀을 듣고 우리 영혼이 진리의 지식으로 성장시켜 왔습니다. 거듭남의 명료한 지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죄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또한 죽음의 필요성이었습니다. 부활의 아침에 한 시간에 들을 수 있는 말씀이어야 하는데 우리 교회의 특성상 한 시간에 듣지 못하고 나누어 듣는 것이 조금 아쉬운 상황입니다. 그러면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말씀을 다시 간략하게 살펴 거듭남의 정의 무엇인지 다시한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와 최초 인류의 아들 가인으로부터 개념을 정리했습니다. 거듭남은 사람의 영혼에 복음이 심겨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은 영혼에 심겨진 복음을 성령께서 조명하심으로 지성이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반응하는 것을 회개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회개하도록 인식되는 자신의 정체성은 사람이 죄에서 태어났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버려져 있으며, 무서운 파멸과 영원한 죽음이 우리를 뒤덮여 있다는 사실과 즉시 하나님의 자비를 받지 않으면 자신이 얼마나 가련한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에 빠져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것은 복음 뿐입니다. 실지로 성경은 사람들이 죄에 빠져 있으며,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계에 속하여 죄만 행하고 살다가 결국은 영원한 죽음의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고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1)” 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교훈적이거나 혹은 현실과 다른 상황적인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라 현 상태 곧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저주 결과에 처해있고 심판 받은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태어난후 그들이 생애 동안 범죄한 비 윤리적 삶의 결과가 영원한 저주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태어나기 이전에 죄에서 잉태하고 죄의 열매를 가지고 죄로 말미암아 죄안에서 죄를 행하며 살수 박에 없는 존재임으로 저주는 이미 받았으며,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는 영원한 저주에 갖혀 있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빠져 있기 때문에 죄의 체계와 죄의 개념으로 죄악의 사고로 까지 죄의 정신으로 선악을 구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는 진리가 없고 죄로 말미암은 거짓과 왜곡된 지식만있습니다. 그들은 그 지식으로 판단하고 사고하며 인식하는 모든 판단과 지식은 죄의 개념으로부터 주어진 거짓과 왜곡된 지식 뿐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심각하게 타락해 있고 지금 당장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당신의 참 정체성을 결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우며, 거짓으로 가득 체워진 왜곡된 지식으로 살고 있으며, 여러분의 움직이는 삶이 여러분을 선하다고 판단할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이미 저주에 빠져 있는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여러분의 영혼에 진리를 보내셔서 그 진리로 인식하고 사고하며 행동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지 않으면 결코 영원한 저주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 것과 복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것이 미래적인 것이며 여러분의 노력과 함께 여러분이 간구하는 몸부림 때문에 거지에게 적선 하려는 마음의 갈등을 가지는 때와 하나님께서 하찮은 은혜를 베푸셔서 은혜를 줄까말까 저울질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마귀적인 생각을 지금 당장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과는 관계없이 자기들의 종교적 삶을 만족하기 위해 즐기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조차 구원의 긴박성에 대해서 왜면하고 있고,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에서 영원한 파멸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스스로 어느정도 선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고 구원을 받은 자신들이 죄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자기 성찰과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윤리적인 삶의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들이라고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신들이 아직 죄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언제든지 죄의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 비참의 존재에서 아직 해방되지 않았으며, 자기의 영혼에 심겨진 죄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덧입혀져 있는 거듭난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한 성화에 이르기 까지 구원의 투쟁을 멈출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까마득이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로부터 거듭난 존재입니다. 복음으로 거듭났지만 여전이 죄가 우리를 자기의 영향력 아래 두고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으로의 죄의 삶으로 이끌려고 혈안하며, 우리의 눈을 어느 쪽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이용하여 죄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루의 삶을 마치고 잠들고 다시 밝은 새날을 맞아 일어날때 우리의 삶을 주님께 의탁하지 않으면 우리의 하루의 삶은 죄를 만족시키는 저주받을 삶을 살 것입니다. 우편의 예수 십자가의 삶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으로 사는 것과 좌편의 죄에게 이끌려 영원한 저주의 삶을 사는 것,이 두 사이에 우리의 영혼은 쉼이 없는 갈등에 빠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하지 않고 복음으로 거듭난 삶을 살도록 기도하지 않으면 않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있는 갓 영혼의 지서에 복음이 갓 심겨진 어린 우리 형제들은 죄가 주는 달콤한 세상에서의 쾌락에 아주 쉽게 넘어지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들은 자기 영혼안에 거듭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이끌어온 죄의 속성이 남아 있어 전적으로 복음으로만 살기에는 복으로 말미암아 살수 있는 지식이 너무 미약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을 결정하는 그들의 마음에 여전히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위한 욕구에 이끌려 편하고 안일한 삶과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명예로운 삶의 죄의 속성으로 아주 쉽게 넘어지고 맙니다.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미약합니다. 죄에서 태어나 죄의 습성에 길들여져 뼈속까지 죄로 물들어져 있는 거짓과 왜곡된 지식만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선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여 그 선악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 인생 여정의 한 발 앞에 수많은 파멸의 함정이 놓여져 있고, 우리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희망은 사단이 주는 달콤한 위장행복이고, 실상 그 끝에는 영원한 저주와 파멸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가 내딛는 발을 잡아 안전한 곳을 내딛도록 끌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즉시 파멸의 나락에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혀를 속이는 달콤함과 쫄깃하며 환각스런 향기와 영혼을 혼란스럽게 하는 알콜을 입에 넣음으로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죄의 유혹을 끊어내지 못함으로, 몸속에 흐르는 혈액이 끈끈하여 심장을 순식간에 정지시키고, 다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는 영원한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수 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 앞에 저주와 파멸이 시퍼렇게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만 혼란과 어두움에 빠져버린 현대 교회의 성도들은 자기들이 참된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환상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사도와 교사들을 보내주셨으나 그들이 먼저 깨어있지 않으므로 먼저 올무에 걸려 넘어졌고, 그 뒤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까지 함께 올무의 덧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듭나게 하시려고 복음을 주셨으나 그들은 처음 사람 아담과 같이 다시 선악과를 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그들의 종말은 속히 파멸을 고할 것이고 오늘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다면 그들의 구원이 무익할 것입니다. 참 감람나무를 배어내시고 돌 감람나무 뿌리에 접을 붙이신 하나님이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를 배어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물론 우리의 교리에는 “성도의 견인”이 있지만 이를 악용하는 신자는 결코 이 교리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버림을 받아 영원한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에 구원의 긴박성과 필요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매우 무섭고 혐오스러우며, 사람을 토막내서 죽이고, 속이고, 빼앗고, 강간하고,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하며, 억울한 일들과, 거짓과 속임, 불평등과 편견에 시달리고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세상이 죄에 속하여 당연히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타락한 세상이며 그 세계에 지금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이 말을 이방인인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에서 선하다고 판단을 받고 정직하다고 인정을 받으려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정직과 선을 최고의 행복으로 믿고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정직과 선은 죄의 개념으로부터의 정직과 선입니다. 이것들은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고 속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한 우리에게 참된 진리의 삶을 살도록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의 삶의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하나님 아들의 의식을 가진 삶이었습니다. 섬기고, 용서하며, 이해하고, 사랑하는 삶이었으며, 그 교본을 디베랴 광야에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이것은 사람의 상태를 상술하는데 육체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관하여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의미는 육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에 관한 것이므로 그 영은 영혼의 지성의 상태에 관하여 말씀하셨고, 가인은 그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인식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까?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영혼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영혼 구원이라고 말하고 이것은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고 영혼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지식으로 은 살게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란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져 작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것이고, 전자를 생명이 있다고 말하고 후자를 무지한 상태, 곧 생명이 없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처음 인류의 타락에 적용하면,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왜면하므로 영혼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마져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궁극적으로 사람은 그 영혼의 지식으로 활동하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지식이 진리이면 진리의 사람이 되고 거짓이면 거짓의 사람이 됩니다. 최초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함으로 진리가 그 속에 없고, 행하는 것 마다 그 속의 거짓으로 행합니다. (요8:44) 이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라고 말씀하신 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기의 지성이 생성한 왜곡된 거짓지식으로 살 때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영혼의 지성이 거짓되고 왜곡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사람에게 “죽으라”라고 죽음을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죽을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부터가 아니라 사람의 선택으로 부터입니다. 그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 다시 유효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는 스스로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저는 이 진리 외에 누구라도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습니다. 만약 저의 설득이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설득을 받는 사람의 선택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너무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위해 복음전하는 일을 결코 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진리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영혼에 진리의 지식이 심겨져야 하고 그 지식이 싹이 나고 지성에서 작용함으로 진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이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제 거듭남이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지식이 심겨져야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음과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에 대한 정의를 살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신학을 정의하고 개념을 발견한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진리가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리가 아니면 결코 생명이 없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에서 정의한 거듭남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살펴 볼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복음이 새겨졌고 성령께서 그 복음을 조명하셔서 우리 영혼으로 진리를 인식하게 해준다고 생각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앞에서 세상에 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관한 이상한 관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이 얼마나 왜곡되고 거짓 되는지 설명하면 혐오스럽기 까지 합니다. 우리의 세상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한 치의 선을 발견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곳입니다. 우리가 한발을 내딛는 그 곳은 수많은 덧과 올무가 피할 수 없도록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앞을 향하여 나아갈 때 반드시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올무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단이 우리는 이끌고 가려고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예배를 마치고 나아가는 그 순간부터 사단의 올무에 걸리고 사단이 끄는 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달콤함과 향기로운 행복입니다. 명예와 영광과 즐거움이 우리를 이끌고 끝없는 항해를 하지만 그 마지막은 영원한 파멸뿐입니다. 교회에서는 거듭난 여러분은 이런 일을 당하지 않는 다고 말하지만 죄송하게도 성경은 우리에게 지금 현대 교회에서 말하는 것 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여러분은 지금 즉시 이 구원에서 떨어져 파멸을 향하여 갈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의 생명을 다하기 까지 구원의 문을 향하여 쉬지 않고 달려 마침내 영광의 문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고백하고(딤후4:7),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세계에는 우리에게 결코 안전한 터전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영원한 저주를 향하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곳에 태어났고 이곳에서 삶을 살다가 이곳에서 죽어 영원히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이곳은 지옥을 향하여 나는 대로이고 우리의 삶의 방향은 지옥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아가는 한발 한발은 지옥이 더욱 가깝게 되고 우리가 한순간 쉬는 그 숨은 지옥을 향한 카운터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영원한 고통의 파멸속으로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 이곳에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모략과 술수와 흉악과 강포만 있는 이 세상에 진리의 말씀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타락했기 때문에 진리의 삶을 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들어온 이상 죽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죽음이 아니고는 나갈 수 없는 세상, 곧 죽음이 지배하는 사망이 왕노릇 하는 세상입니다. 사망이 왕 노릇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태어나는 사람도 죽음의 운명을 벗을 수 없고, 이미 태어난 사람도 죽음의 운명을 벗을 수 없으며, 오래전에 태어난 사람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파멸의 죽음으로 이미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세상은 죽음을 향하여 가는 관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관문에서 태어났고, 다음 세상을 향하여 죽을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 존재 하게된 이상 우리의 영원한 삶에는 죄로 말미암아 비극을 벗어날 수 없다는 분명한 증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고 있는 이상, 우리는 이 진노의 세상에서 반드시 죽게되고 그 다음에는 지옥을 향하여 내려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 피할 수 없는 파멸의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세상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곳인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곳에 보내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는 단순히 보내신 것이 아니라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저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시고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저들을 대신하여 죽으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창조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셔서 대신 죽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보냄을 받으시고 죽으시는 시점에서 그 죽음의 두려움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 이후를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죽음은 영원한 파멸이라는 것도 알고,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순종하셨고, 결코 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 뜻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뜻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죽음에 자신을 던지실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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