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보내심을 받았으며 무죄하신 상태로 사람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야 하는 이유(보내심)에도 비밀이 감추어져 있으나 더욱 죽으심에는 큰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이 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심에 근거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의 아들을 보내셔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은 것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아들을 보내셔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고 사람으로 인식되게하실 만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에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1서 4: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에 매여있는 우리를 살리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의 목적은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멸망에 처해져 있는 것을 벗어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일이 왜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죽으셔야만 하는가?라고 반문 할 수있습니다.
그냥 죄를 용서하시고 사람을 살려 보리면 되는것 아닌가요?
이런 신학적인 질문들이 무수히 많은 토론들을 이어지지만 오늘을 왜 예수께서 죽으셔야 했는가 라는 주제로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예수 죽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한분이십니다.
본래 죽으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죽음을 경험하시는 것으로 밖에 생각할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경험하셔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가있습니까?
죽음이 단순한 어떤 과정을 통과하는 의례나 참고 견디면 지나가는 그런일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 자신이시라면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만물이 그에게서 낳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는것이라고(요1:3, 고8:6,골1:16)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면, 그분이 죽으시면 이 만물은 어떻게 되는건가요?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생명자체이신 그분이 죽으심은 만물은 당연히 그와 함께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2:20과 롬 6;6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도 이미 죽은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그분이만물을 붇들지 않은 그 상태는 이미 죽은것이나 다름이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금요일오후에 죽으시고 안식일 전까지 속히 무덤에 들어가셔야 했기 때문에 장사 되어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하루가 지나고 안식후 다음 날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시간이 있었다면 이 기간동안은 정말로 매우 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안식일에 죽으신 것이 만물에게는 참으로 다행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안식이 아닌 일하시는 날동안 죽음에 계셨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은 모든 창조 세계의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마침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한결 같이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생명도 그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골1:16~17, 히 2:8, 요 1:3, 창2:1) 만물이 그에게 붙들려 있으면, 그가 죽었으니 불들린 만물 또한 그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해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복음서와 사도의 서신을 무수히 많이 읽고, 수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나, 예수의 죽음을 단순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한 사람의 죽음으로 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바로 우리가 역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도, 성령의 보호하심도, 무의미해지는 순간에 이른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당연히 그의 죽으심과함께 마땅히 죽음에 이끌려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이날이 다행히도 안식이었기 때문에 모든 생명과 존재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죽으심에도 만물은 그냥있는것 같이 보였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에는 아들이 죽음에 있는 동안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의 힘있는 보호가 아니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안식일 동안 이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삼위이시고 일체로 존재하시는 분이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에는 삼위일체의 믿음을 버리고 전혀 다른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서 흔히들 빠지기 쉬운 양태론의 위험에 빨려들 수 있는 위험스런 사유에 휘말려들수 있습니다. 양태론이란?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구약시대에는 아버지로 신약시대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그 이후에는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에 의해 예수의 죽음과 하나님의 죽음 사이에 혼돈을 겪고 위험한 이단에 치우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한분이신 유일하신 유일신이시면서 위격으로 서로 다른 구분된 사유를 가지신 분이시고 분명히 함께 일체로 계시지만 사역을 각기 구별되고 계시된 모습이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양태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일체로 계시기 때문에 예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죽으심이 되고, 하나님의 죽으심은 궁극적으로 성부 성령 하나님도 같이 죽으심이 되셔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것입 때문에 예수의 죽음에 하나님의 죽음을 언급하는 양태론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결코 옳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나누이심으로 보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인성을 취하시고 신성을 버리시면서 나누이셨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아들 하나님은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안에는 아들 하나님이 세상에 계시고 성부와 성령만이 하나의 일체로 계시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오셨을때는 분명히 나누어 지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심으로 그 보내심을 받은 사명을 다 마치신이후에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셔서 한분 하나님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안에는 분명히 3위격이 하나의 본체안에 거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옷을 입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본체안에 하나로 계셨습니다. 본체안에서 아들은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의 생명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보내심을 받았고 인간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기 이전에 이미 이 일을 계획하셨고 하나님께서 이미 결정하신 일이었기 때문에 그 정한 때에 이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죽으셔야 했습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만물을 새롭게하시는 것입니다. (계21:5)
이전 만물들은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에 놓여졌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만물이 스스로 그렇게 했고 처음 지음을 받은 상태에서 목적과 전혀 반대되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사람의 타락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람의 타락에 원인이 있습니다.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죽으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타락은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필연적 결과를 불러들어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이나 계획과는 전혀 무관하게 순수히 사람이 선택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있어서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한 타자로서의 객체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이 하나님의 의지로 붙들려 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매여 있으며 여기에 사람도 포함되었으나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독립적인 존재로 우주에 우뚝 서게하셨고 자기안에서 자기의 의식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완전한 객관적인 관계를 성립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별개의 독립개체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존재의 탁월함을 아시고 아들을 보내어 희생하시면서까지 구원하실만한 가치를 인정하셨습니다.
사람의 탁월함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자기의 의식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인지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스스로 찬양할 수있는 그 찬양을 생산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가치를 초월하여 그 지으심 중 가장 탁월하심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받아들이시고,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시고 구원하실만큼 온 마음을 다해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하나님의 아들은 당신이 자원하여 사람으로 보내심을 받았고,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의 기쁨과 완전한 만족을 위해서 자신의 희생 따위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2, 피조된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사람을 지으시기를 계획하셨을 때 삼위 하나님이 이를 동의하시고 사람을 지어 그들로 만물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지음을 받은 사람이 아담이었고, 아담으로 말미암아 하와가 나왔으며, 이들이 동침하면서 비로서 이세상에 피조된 사람들이 존재하시 시작했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동침이 사람을 잉태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선에 합당한 행위였는지가 문제입니다.
다시말하자면 타락한 사람이 둘이 연합하여 동침할때 사람을 잉태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잉태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한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후손을 생산하는 능력은 그들의 마음에 있습니다.
이 마음으로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으로 계획된 아들들을 낳게하여 결국은 정한 모든 사람을 이세상에 태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
그러나 타락은 사람의 마음에 정욕을 일으켜 하나님의 계획과 다른 아들을 잉태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남녀가 연합하여 동침함으로 사람을 잉태하는데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온전한 절제를 갖게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후손을 잉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하지 않은 사람은 성적 욕구에 대해서 지극히 선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만 타락한 사람의 자기 행위의 결과에 대한 무지 때문에 무절제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출생은 하나님의 아들은 인류의 최초의 사람에 의해 그 신분이 구별된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존재는 작정된 아들이지만, 정욕으로 말미암아 계획되지 않고 태어나도록 허락되어진 존재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됩니다. (엡 2:12)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기 어떤 상태와 어떤 모습을 하든지 모두가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이지만 계획된 작정의 아들과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은 죄의 열매로서의 이방인과의 구별은 필연적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존재하도록 계획하셨느냐? 라고 묻는 다면 "아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음에 처하게 되었고 구원의 필요성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 구원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사람의 범죄와 같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은 죄가 없는 무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죽음 무죄한 상태에서 죽으심입니다.
죄의 상태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죄의 공격에 의해 죽어 버렸다면, 그는 죄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죄가 아담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은 반드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게 될 것이고, 다시는 죄에대해 공격을 받더라도 죄에 넘어지지 않을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죄와 같이 사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의 노예가 되어 죄가 행하고자 하는대로 행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는 죽음은 자기안에 죄가 없기 때문에 죄로말미암아 죽은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죄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죄가 다시는 그를 주장하지 못합니다.(롬6:9~10)
그러면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안에 있는 진리가 아닌 왜곡된 지식입니다.
그 지식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대적하여 죄로 정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죄는 생명체에 기생하는 존재처럼 사람안에 있는 왜곡된 무지와 결함을 가진 지식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무지와 결함으로 행동하게 하며 자기의 노예가 되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범죄하여 타락하자 무지와 결함을 가진 왜곡된 지식이 지성에 자리를 잡고 사람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는 전혀 관계없는 정욕을 일으며 가인을 낳게합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아들이시기 때문에 자신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모든 지식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며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을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요1410)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려고 세례를 받으시자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때 죄가 예수님을 굴복시키려 했는데 그 죄의 본성은 거짓되고 왜곡된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에 시험하는 자의 지식을 금방 분별하실수 있을 뿐만아니라 거절하셨습니다.
이렇게 거짓에 굴복하지 않게 되자 사단은 예수님을 떠났고, 예수그리스도는 사역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안에는 거짓이 전혀 없습니다.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셨고 진리 자체이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타락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죄로 죽음에 내어줌을 당하시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으나 죄에 대하여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는 다시는 예수를 시험할 수 없고 죽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죄의 목적은 죄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는 사람을 죽엿으니 죄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죄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죄 자신이 그리스도안에서 권세를 잃고 죽게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예수를 죽이는 죄가 죽음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죄는 더 이상 권세를 행할 수 없게 되었고 세상의 주권을 상실했으며, 세상에서의 모든 세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제 죄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영혼 속에서만 남겨져 있을 뿐 그 존재가 죽어버렸습니다.
사람의 영혼에 남겨진 죄는 주인을 잃은 폐전한 폐잔병처럼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의 영혼에 복음을 새겨 심기면 죄는 세력을 잃고 맙니다.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죄에 대하여 죽은자 되었으니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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