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죄를 단절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보내 죄를 해결하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태어나면서 죄의 열매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죄를 단절시킬 방법은 없고 죄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죄가 단절됩니다. 죄는 전가되거나 유전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최초 사람에게 말씀하신바와 같이 “정녕 죽으리라”하신 것처럼 사람의 죽음과 함께 죄도 끝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였고 그들이 후손을 낳지 않고 죽었다면, 그렇게 죄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의 상태에서 자식을 낳으므로 태어난 자식들은 죄의 열매가 되었고 그들도 역시 죄의 상태에서 자식들을 낳기 때문에 여전히 사람들에게 죄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으로 우리도 죄의 열매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우리의 죽음과 함께 죄도 역시 같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다가 마치는 날 우리 안에 있는 죄는 끝이 나고, 우리가 낳은 자식들이 우리들의 죄의 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죄의 일생을 살게 되고 이런 반복적인 연속과정으로 죄는 이세상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단절하는 것은 우리가 자식들을 낳지 않고, 우리로 모든 인류의 종말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된 존재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반대 되는 것입니다.
창조는 존재하도록 하시는 것이지 그것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창조를 훼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음 받은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사라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존재하면서 죄가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한 방법을 세우셨는데 곧 메시아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는 목적은 인류의 죄를 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는 것은 사람들의 죄의 상태를 해소하고 타락하기 이전의 완전한 상태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메시아가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메시아를 통해서 하시는 일은 사람이 죄를 알고 그 죄를 죽이고 죄에 대항하여 죄로부터 스스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메시아가 직접적으로 죄와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사람이 죄가 무엇인지를 알도록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3:20)”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은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를 죄로 알지 못하였지만, 죄 때문에 사망이 왕 노릇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본래 이방 죄인이로되 복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복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오기 까지 율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습니다.
율법과 관계가 없으므로 죄와 관계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죄가 없었느냐?
아닙니다.
우리가 죄와의 관계를 모르는 것은 본성이 죄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의 본성을 죄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보내시는 것은 죄를 없이 하기 위해서 보내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죄를 없이 하는 것은 직접 죄에 대항하셔서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죄를 알게하고, 사람이 죄를 깨달아 알아 어떻게 죄를 피할 것인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선이시기 때문에 악에 대항하시지도 않으시고 악과 싸우시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완전히 해석하기까지 하나님의 선한 본성을 반드시 새기고 성경을 조명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죄를 단절시키는 방법은 직접 싸우시거나 혹은 대항하셔서 죄를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대항하여 이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심으로 사람을 율법으로 죄를 깨달아 알고 사람이 죄를 대항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율법이 말하는 대로 행하므로 자기 안에서 죄가 행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이 율법대로 행하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으로 죄의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본래 율법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그 사람에게는 자연적으로 죄는 단절되지만 사람이 율법대로 살지 못할 줄을 하나님은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율법에 기록된 온갖 명령대로 행하며 살아도 사람의 삶은 율법의 범위를 벗어나 더 많은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삶들이 죄이므로 사람은 결코 죄를 벗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완전히 거룩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줄 뿐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율법을 통하여 자기의 죄를 깨닫고 스스로 자기가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자각하여 죄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도록 하려고 메시아를 고대하도록 하셨습니다.
메시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지 세상의 나라에서 위대한 왕국을 건설하게 하여 세상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이방과의 관계를 온전히 알게 된다면 이방을 섬기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메시아가 어떻게 죄를 단절하게 할 것인가요?
율법에 약속으로 예언된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죄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보내심을 받을 것입니다.
메시아는 기름을 부음을 받은 자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약속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잘 찾아서 믿음을 가지도록 교육하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교회가 메시아에 대한 분명한 증언들을 말하지 않고 다른 것을 말한다면 교회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들이 백성들에게 성경을 해석하여 교육하는 내용들이 메시아를 바르게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니라 계명을 만들어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는데 국한하였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보냄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에서 말하는 메시아를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메시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0:28에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메시아는 섬기고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이 사명입니다.
메시아의 이런 사명이 사람의 죄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1, 섬기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메시아가 사람을 섬기려 온다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왜 이런 말씀으로 당신의 사역을 주장하셨습니까?
메시아가 사람을 섬기러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인을 섬기다가 오히려 희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왜 아벨은 가인에게 희생을 당하였을 까요?
아벨의 섬김은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인의 상태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가인과 같은 죄인의 상태로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심이 그에게 있었고, 그로 인하여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으로 가인을 주목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벨에게 하나님의 의식이 없었다면 결코 가인에게 맞아죽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를 허용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진 아벨은 성령의 조명하심에 의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아주시지 않은 것으로 가인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의 범죄로 인하여 영원한 저주를 안고 태어난 지옥에 처해진 사람이라는 것을 성령에 의해 알았기 때문에 가인을 불쌍히 여기고 가인을 향하여, 자기가 죄를 범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게 했다는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으로 가인을 섬기되 죽기까지 섬긴 것입니다.
아벨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으로 가인을 존재하게 한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원인이 하나님의 아들의 죄 때문이라면 지옥에 가는 것 또한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지옥으로 갈 가인을 낳지 않았을 것이고 가인에게는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 처해지지 않았을 것을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진 아벨은 가인을 섬기되 죽기까지 섬기고 가인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마땅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이 곧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의식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의식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태어난 이방인을 하나라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2, 대속물로 주는 것입니다.
대속물이란 빚을 대신 갚아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메시아는 사람들이 당하여야 할 마땅한 처분을 대신하여 당하셨습니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예수께서는 그 죽음을 대신하여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섬기고 사람을 대신하여 죽어주시고, 사람을 위해서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어주는 것인가?”에 있습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은 “메시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셨다”라고 아주 일반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누가 어떤 방법으로 죽였는지 그리고 그 의미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메시아가 죽어주심만으로 우리의 죄 값은 치러진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메시아의 죽음을 오늘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 보는 것이 매우 효과적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죄 때문에 필연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죄밖에 없고 그 죄는 우리를 적당히 이용해 이 세상에 죄를 쏟아내고는 결국 수명을 다해 죽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죽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죄가 없다면 우리는 죽을까?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지 않도록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셨는데 여전히 우리는 죽고 있습니다.
실지로 여기에 딜레마가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대속에 대한 회의인 것입니다.
메시아가 우리를 위해서 대속하여 죽었다면 본래 우리가 죄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죄가 죽었고 우리 안에 죄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방법으로든지 실재이어야 하고, 그 결과가 우리에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죄에서 죽었다는 논리에 대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죽어주셨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믿으라’라는 설득은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에 이 설득을 들을 때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대부분 이런 설득을 받아들이고 믿음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메시아가 우리를 위해서 대속하신다는 실재적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우리의 근원은 우리 조상의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죄 덩어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준비 되었을 때 우리 조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탄생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탄생의 근원은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허락인 것이지 하나님께서 아담 안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계획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 덩어리이고 죄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죄가 죽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태어나도록 허락하셨으나 우리가 일평생 살다가 죄로 말미암아 죽는다면 죄와 함께 죽어버리니 죄가 가는 곳으로 우리도 따라가고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는 남아있지 않는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 그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들에 피는 들꽃 하나도, 산속을 지배하는 야수도, 각양 각색으로 옷을 입고 들판을 뛰노는 들짐승들이나 하늘을 나는 새들도, 순한 마음으로 가지고 생명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 있을 때 그들의 존재가 인식되어지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 있지 않고 감추어져 있거나 모습을 잃어버린다면 그들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지워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에 우리를 어두움에 가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결코 하나님 앞에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려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래 죄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죄밖에 없어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면 우리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죽이면 우리는 죽지만 살아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를 살리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 안에 있는 죄는 끝나고 다시는 세상에서 죄를 드러내지 않지만 실지로 우리 자신도 함께 죽어버리기 때문에 우리의 죽음이 하나님께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고 하셨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기 위해 대신하여 메시아가 죽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죽음을 메시아가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대속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리라”(고전 15:17)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죄인이라면 그는 살아날 수 없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헛것이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조건은 자기 안에 죄가 없어야 하고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의미가 아니라 실재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인이 아닌 요소가 죄의 세계에 들어와서 죄의 모습으로 죽지만 자기 안에 죄의 요소가 없기 때문에 다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죽고 다시 살아나려면 우리 안에 죄가 아닌, 우리를 대표할 우리의 어떤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죄를 깨닫는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의 요소여야 합니다. 그 생명의 요소는 생명 자체이어야 하고, 그 생명이 사람으로서 자기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하며, 사람에게 나타나 보여 사람으로 인식되어서 사람 안에 심겨져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고,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보이심으로 사람에게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고 그를 본 자는 그 안에 생명이 심겨짐으로 자기에게 생명이 들어와 심겨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장대에 메달아 놓은 뱀으로 인용하셔서 사람을 살게 하셨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직접 사람들이 두 눈으로 봄으로 생명을 얻게 하셨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실재이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다.
구약에 약속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이 그 이름을 들음으로만 자기 안에 생명이 들어가고, 그 이름을 부름으로만 생명이 자기 안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 예수 그리스도,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우리 안에서 인식되어질 때, 그 인식이 우리 안에 들어온 생명의 씨앗이고, 그 생명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고 자신이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달아 알고 드디어 죄된 우리 자신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결코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인식된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으로 자라기 시작하여 우리로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 안에 죄를 벗어버리고자 노력하게 될 것이고 그 노력은 곧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보고 듣고 그 이름을 아는 그것이 우리 안에 자라남으로 그것이 우리 죄와 대적하여 죄를 죽이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복음서를 읽어보면 그리스도가 왔으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죄였기 때문에 그 죄로 그리스도를 왜곡하게 인식하여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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