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 여김을 받는 믿음(롬4: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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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두 가지 사실이 의식적으로 동의가 되어 받아들이는 믿음을 요구 하신다”고 말한다. 첫째는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창세기 15장4~6에서 드러난 믿음으로 “네 몸에서 날자가 상속자가 되리라”라는 말씀과
둘째는 우리와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다”라는 약속이 사실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며 동의하는 “믿음”을 의로 “여김을 받는 믿음”이라고 한다.
이 사실들은 실제로 일어난 상황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뿐이지만, 이 말씀이 사실로 드러나는 것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따르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전자에게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 되도록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자기의 모든 자존심을 포기하고, 자기 몸종 하갈을 남편의 품에 안기게 하여 이스마엘을 낳게 한다. 이것은 사래가 하나님 약속의 말씀에 매여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사실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일종의 순종이라고 볼수 있지만, 아직 믿음이 견고하지 않은 그녀에게는 자기 포기였을 것이다.
그녀가 실지로 ‘하나님의 약속하셨다’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기의 위치는 매우 애매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래는 아브라함이 다른 여인을 취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 약속이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고자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분명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자기가 포기하고 다른 여인으로 아들을 얻어 속히 상속자를 낳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하고, 자신이 아브라함의 아내로 있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렇다고 다른 여인을 아브라함에게 들이고 자기의 모든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매우 슬픈 현실이라고 괴로웠을 것이다.
과연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아브라함이 자기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아브라함이 욕심이 생겨 변심함으로 자기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취하려는 속샘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으니 말도 안 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래는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고, 이 약속에 대하여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취할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여자로서의 상태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자신이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유일한 대안으로 하갈을 취하라고 한 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는 것은 사실로 받아들인 사래의 믿음은 아주 순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순수함 속에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아브라함의 아내 자리를 잃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는 얄팍한 꾀도 숨겨져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래에게 있어서는 위기였기 때문에 사래는 여러 가지 중에 최선을 택하여 자기의 안위를 보장받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브라함의 아내 자리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버림을 받게 될 비극적 운명이 눈앞에 훤히 드려다 볼 수 있었다.
사래가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하는 것은 자기가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이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되도록 한 것은 아닌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사실이라고 확고히 믿었다.
아무튼 사래는 무자한 운명으로 평생을 마음조이며, 남편 하나만을 의지하며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인생을 완전히 비극으로 내몰리게 되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녀가 지혜롭게 판단한 결정으로부터가 아니라, 사래에게 들어간 하나님의 약속이 그녀를 사로잡고 그녀의 본성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짓되고 왜곡된 판단을 억누르고 드러낸 행위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창세기 15장1~6을 보면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조카 롯을 구하고 개선장군으로 환영을 받으며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영혼 안에 밀려온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자기가 의로운 행위로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터를 향하여 달려가 조카를 구해왔고 잃어버린 소돔의 전리품을 되찾아오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태를 돌아볼 때, 자기가 엄청난 일을 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은 지금 가나안 여러 부족과 평화롭게 애굽을 오가며 양과 소 때를 키우면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향하여 창과 칼을 퍼 붓고 적대적인 행위를 한 것이 자기의 안위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지로 가나안의 여러 부족들은 견고한 성을 구축하고 부족들의 연합국을 이루고 있는 반면, 자신은 천막을 치고 야영생활을 하는 떠돌이 목동과 같은 처지에 저들이 연합으로 자기를 공격하면 단숨에 파멸하고 말 것이라 판단을 하고 크게 두려워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한 행위가 어떤 행위인지를 깨닫는 순간 자기의 모든 것을 다메색 엘리에셀에게 양도하고 자기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이, 낮에 공격한 적들의 공격에 채념한 듯이 대비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300인의 군사로는 발달된 가나안의 연합군대를 결코 당할 수 없었다.그래서 두려워 했던 것이다.
이때 하나님이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것을 엘리에셀에게 양도할 것이라는 뜻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가셔서 하늘의 뭇별을 보이시고 엘리에셀이 너희 후계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자가 네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15:4~5).하나님의 말씀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들어갔고, 그 말씀에 대한 확실한 확증이 요구되는 마음을 가졌는지,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에 대한 약속으로 언약을 맺기를 요구하셨다.약속의 말씀에 사로잡힌 아브라함은 자기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받아들였고, 이 말씀으로 희망을 가지고 온전한 상태를 갖게 되었다.
만약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면, 그의 상태가 평온을 유지할 수 없었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였을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으로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그의 본성에서 나온 생각이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다.
사도는 이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 약속이 사람으로 반응하게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 것이다.
두 번째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이 말씀은 복음서에 자주 등장된 말씀으로 인자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을(막 8:31) 근거로 하고 복음의 핵심내용이 된다. 사도는 우리가 구약의 약속을 이어 받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약속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일지라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개념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이라는 의미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믿음을 드러낸 것이라면,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개념으로부터 드러낸 모든 행위를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예수께서 직접 비유로 말씀하신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부터 더욱 명확해진다(마13:19~23).
하나님의 말씀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에서 비롯된 어떤 지식과 융화되거나 혼합되지 못한다.
모든 사람의 본성의 지식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무지와 결함을 함의 하고 있다.
비록 진리라고 판단된 어떤 지식들도 그 지식의 본질은 무지와 결함에 의해 이루어진 지식이고 그 지식으로 판단한 거이기 때문에 참된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지성에 들어가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조명하심으로 비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면 그 지성은 진리의 지식이 새겨진 것이고 이 지식은 지성에서 작용하여 사람으로 행동하게 하는데 이지식이 하나님을 향하여 드러내는 반응이 곧 믿음인 것이다.
사도는 로마서 4장에서 사람이 드러낼 수 없는 의롭다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람이 반응하여 드러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곧 아브람은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을때 그 약속이 자기의 영혼에 자리잡았고, 그 약속에 아브라함으로하여금 반응하도록 한 것이지, 아브라함의 본성이 말씀에 반응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본성은 본래 타락햇기 때문에 어떤 진리의 말씀도 왜곡되게 해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은 믿음이란?
타락한 사람의 본성의 지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지적이거나 철학적인 깨달음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반응또한 아니다.
자기의 본성의 지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살펴 보았을때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다는 그 어떤 지각된 인식도 참 하나님은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지식인 말씀이 지성에 표상되고 그 표상을 성령께서 조명하심으로 사람의 지성에 하나님의 지식이 생성되어 새겨졌을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지식으로 거듭난 새로운 사람으로 의식활동을 하게 된다. 이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지만 자기안에 타락된 본성이 함께 있으므로 죄는 언제나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받지 않은 것은 타락의 본성의 지식이 죄를 범한 것이지 복음의 씨로 말미암아 거듭난 지식으로부터 죄를 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의 씨앗이 심겨져 새사람이 된 거듭난 사람은 최초 창조시에 지음을 받은 처음 아담과 같은 상태의 사람으로 회복되어진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거듭난 사람은 최초의 사람으로 살수 있고 아직 타락된 본성으로도 살 수 있는 두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이 사람은 죄를 알고 죄를 범할 수도 있으며, 타락할 수도 있으나, 처음 아담에게 주어진 자유의지가 회복되어 성령의 조명을 받음으로 죄를 택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곧 처음 아담과 같은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이고 그 사람이 자기안에 있는 죄의 속성으로 인하여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살수있는 새사람을 지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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