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9편
ג֭וֹיִם
“교임”이라고 발음하고 ‘이방나라’들을 의미합니다.
시편9편의 특징은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판단을 의미합니다.
이 시는 사람의 언어 표현으로 이해하면 많은 신학적인 난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시편 기자가 표현하는 원수들은 이방나라들입니다. 곧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나라들로서 이스라엘의 대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대적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되기 때문에 피조물들 간의 원수가 하나님께는 결코 합리적인 해석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만을 선하고 나머지는 모두 악하다는 생각은 결코 하나님의 입장에서 옳은 생각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방은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선한 뜻에 따라 창세전부터 계획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일 뿐이지 아담의 범죄와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창세기 16장에서 보면 이방이 태어나는 것은 사람의 꾀, 혹은 사람들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되지만, 이런 이방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분노와 증오, 그리고 미움을 낳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 하지 않았으면 이방이 없을 것이고,
이방이 없으면 원수관계도 없을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면 이방을 원수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섬겨야 할 대상으로 죄로 말미암아 불가항력적으로 솟구치는 정욕을 억제하지 못한 결과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졌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시편기자의 노래에는 조금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노래하는 지극히 이스라엘적인 노래라고 볼 수 있으므로 이런 해석들은 성경적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편애를 주장하는 것으로 결코 바른 해석이 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이 시편을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마음을 살펴보는 길 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의미로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여기에 등장하는 열방은 이스라엘의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이 되며,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을 원수로 생각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합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는 악의 그림자도 없으시기 때문에 마음에 악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원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다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니다.
예수께서도 공생에 기간 동안 사람들을 섬길 때 원수로 보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이 대상으로 보시고 불쌍히 여기며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다만 원수 관계 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입장에서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이 드러내는 표현인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빼앗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의적으로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어떤 세력이 있습니까?
창세기에는 이런 존재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와를 유혹하는 뱀, 곧 사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들 가운데 사람을 유혹하는 유일한 존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빼앗아가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 존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이 유혹에 넘어져 함께 동조하는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그중에 이런 상태가 나타난 것은 사람에게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전하게 지으셨으나 그 완전성으로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타락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완전한 독립체로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에게 자기의 행위에 책임을 돌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자신을 전적인 타락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죄에 대한 자기 책임으로 돌리거나 자기 행위라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실질적으로 자기의 행위가 아니라 자기로 행위 하게 하는 자의 행위라고 말합니다. 대부분 사도 바울의 말(롬7:17,21)을 인용하는데, 이는 철저히 오해하고 적용하는 말입니다.
선을 원하는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은 것은 내 안에 거하는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듭난 신자로서 복음의 씨앗이 자란 정체가 자신 안에 있는 불신의 정체를 향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신자의 입장으로 볼 때 죄를 행하는 정체는 바로 옛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옛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원수는 자신이면서 거듭나지 않은 옛 자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죄를 지은 사람은 한결같이 억울하다고 합니다.
자신을 죄를 행할 마음이 없었는데 자꾸만 죄를 행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기가 죄를 행한 것이 아니라 죄를 행하도록 유혹에 넘어져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것은 본질을 왜곡하는 잘못된 판단이고, 곧 자신을 변명하는 죄의 변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원수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지 않은 모든 존재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열방, 곧 모든 이방을 원수로 보는 것을 모든 이방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은 것 자체가 원수관계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은 문자 그대로 판단하고 해석하거나 인식하고 노래하면 죄의 감정을 더 깊이 쌓거나 미움을 표출하는 매우 잘못된 우를 범하게 됩니다.
오늘의 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읽고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피조물들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역시 유혹당하여 넘어진 존재로서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원이 적용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원수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식을 가지고 사람에게서 그 지식을 빼앗아가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 9편은 하나님의 아들의 노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하나님을 알지 않으려고 하는 것,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훼방하여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 이런 것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궁극적으로 영원한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아는 일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우리 자신에게서부터 추방하여, 모든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만 채워지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고 보는 모든 사람,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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