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22편2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나이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기자는 숨막히는듯한 환경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황소가 나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대적들은 거칠고 잔인하고 위협적이며 사자같이 그를 둘러쌌습니다.
절제 절명의 순간과도 같고
피할 구멍을 찾을 방도도 없는 상황입니다.
자신을 둘러싼 적들은 용맹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 같고
포악하기가 사자보다 잔인했습니다.
하늘 높은 곳 까지 그 잔인함을 드러내고
다윗은 완전히 기가꺾여 살 용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참 생명을 붙잡고 있습니다.
“기도”
시편 50:15절을 보세요.
“환난 날에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우리는 환난을 당하였고,
적들의 위세에 두려움이 엄습하여 일어설 용기도 사라져 버렸는데,
이것을 계기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도무지 불가능한 사건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수많은 선배 신앙인들의 간증이 있습니다.
기적적인 사건들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죽음의 계곡에서 기적처럼 살아온 사람의 간증이 있습니다.
거의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일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오늘도 그런 일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적들에게 이미 우리의 정체를 드러내고 조공을 바치는 속국의 자녀들처럼 대부분 마음의 문을 열어두었습니다.
실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너울만 둘러썼을 뿐이지 우리의 속 내부는 세속화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잘못된 길을 가면서도 종교적 삶에 전생애를 바친 왜곡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보다 못한 점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희생하지도 않습니다.
삶에 순교적인 삶을 살지도 않습니다.
적들과 같이 서서 함께 즐기며 웃습니다.
저들 영혼의 비웃음을 알면서
못 본채 외면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초라한 자존심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요!
수없이 많은 날 동안 저는 이런 저급한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나름 떳떳하다고 하면서 주님을 속인 행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을 조금도 세워드리지 못했습니다.
한심한 사람이지요.
한때는 떳떳하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과 혹은 사람들 앞에서 신자임을 드러내는 부끄러움을 행한 적이 있습니다. 소외 당할까봐 두려워 한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임을 말하고,
아픔과 슬픔이,
외로움과 고독이,
우리의 삶이 될지라도,
주님을 찬양함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당당하게 받아들임으로 얻는 유익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드리워진 이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는
그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시고
영광을 받으시려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영광의 뜻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당하는 고통은 우리의 죄악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지금 자신에게 드리워진 고난이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주어진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라면 기자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을리 없습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개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폭삭 무너져버린 연약한 인생
낙담하고 좌절한 용기 없는 졸장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불쌍한 자입니다.
황소가 지나간 자리에 이리 때와 개 때들이 덤벼들어 흩어진 것을 쓸어갑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훝어간 뒷자리를 보니 상처투성인 죽음뿐입니다.
뭘 더 가져가겠다고 시체를 뒤적거리더니,
이제는 속옷까지 벗기고 그것을 서로 가지겠다고 제비를 뽑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우리에게 교훈합니까?
세상과 짝한 사람에게 준 시련입니까?
아무리 이 시를 읽어도 세상으로부터 행복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쟁의 승리자가 마음에 행복을 누리고 평안을 얻었으며 하나님을 부끄럽게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사자같이 덤벼들어 그리스도인들을 무너뜨렸으나
그 다음에 남은 흔적은 실로 고귀한 것입니다.
그 고귀한 흔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남았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완전히 실패하셨습니다.
주님은 처절하게 찢기셨으며 고통을 당하셨고
주님은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되어 침 벧음을 당하셨습니다.
아무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은 저주의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들 소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시편기자는 거반 죽어가는 삶속에서 처절한 부르짖음을 계속하였습니다.
저도 지금 저의 마음이 이런 부르짖음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주의 백성들과 교회들이 처절하게 패배하여 세상의 노예로 전락해버린 것 때문에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지속적인 낙담으로 일어설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저를 교회 밖으로 내 모셨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수난의 날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것 같은 저의 인생이 다시 숨을 쉬고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인생의 이력을 가지고 세상을 행하여 일어섰습니다.
시편기자는 뭐라고 말합니까?
그러나 그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나의 낮아짐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아무도 나를 돕는 사람이 없는 험악한 골짜기에서
사방에 둘러싸인 사자와 같은 힘쌘 적들에게 포위당한 우리는
살 수 있는 어떤 방도가 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그 영광을 목격한 적들이 물러감으로
적들에게 핑계할 수 없는 확실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심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가장 중요하게 새기고 생각의 틀 위에 고정시켜야하는 사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 하리이다.
우리의 신앙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종교적인 신념이 아닙니다.
누가 말하는 실패한 인생에서 성공하는 삶을 변화시키는 인생역전의 삶이 아닙니다.
어느 현자가 말하는 행복을 위한 지름길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기 수양은 더욱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자주 이런 신앙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하고 느끼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필요성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그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 아는 것이 우리의 삶에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그것들이 우리의 시가 되고 문화가 되어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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