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22편1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시편을 읽으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제가 자주 말씀을 드렸던 성령의 마음이 드러난다고 했던 것을 느끼지 않으신가요?
고난을 당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증거를 드러내는 확실한 증거가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오면 우리가 이와 동일한 노래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내주의 증거는 항상 동일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온전하게 거듭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마음의 표현이 대부분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시의 내용으로 보아서 다윗은 지금 심각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데 하나님께서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시는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의 아들의 신음하는 소리는 고통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울부짖음과 같습니다.
시편 기자는 지금 심각한 위기와 환난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당하는 어려움 가운데 가장 힘든 고난의 시간일 것입니다.
저도 지금 제 마음속에서 이런 울부짖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르짖음이 예수님과 다윗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심각한 침체에 있거나
인생의 고난에 처해 해어날 수 없는 위기에 빠졌을 때
삶에 지쳐 일어날 수 없을 때
고칠 수 없는 질병으로 죽음의 위기에 빠졌을 때
사람은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앞을 보아도 길이 없습니다.
뒤를 돌이켜 나아갈 수 없는 고삐에 잡힌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의 삶이 억 만근 보다 무거운 고통 속에 잡혀 있었습니다.
그 누가 이 아픔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가는 길,
죄인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을 따라가는 이 길,
고통과 눈물의 아픈 날들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윗이 이시를 부른 때가 언제였을까?
한번 추측해봅니다.
사울에게 쫒길 때,
불레셋 아기스에게 잠시 기대어 있을 때,
아들 압살롬에 의해 도망자 신세일 때,
우리에게 이런 수없는 날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도 무수히 많은 대적들과의 싸움의 날들이 있었습니다. 이 날들은 하루 이틀이 아니고 수 날에서 수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라고 말할 수 없으나 고난의 어느 순간에 이 시를 노래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 고난의 터널을 지날 때 하루하루가 천 날 같았습니다.
밤낮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아뢰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만사에 기한이 있는 것과 같이 다윗에게는 마땅히 겪어야 할 여러 가지의 환난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드러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이것은 모세로부터 애굽을 탈출을 기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실상은 우리가 성경에 미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의 구원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고, 그것을 때에 따라 성취되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요?
고난과 아픔이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뚜렷한 구별이 있습니다.
고난의 끝이 없는 사람,
고난으로 인하여 더 한발 나아가는 사람,
저는 이런 사유의 종점에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 고난으로 인하여 더 나은 내일을 경험하겠구나,”
“반대로, 내가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사실에 관한 지식을 알 수도 없을뿐더러, 이 고난으로 인해 나는 나를 인식할 수 없는 그 무섭고 두려운 고통의 비극의 나락으로 빠지겠구나,”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앞에서 이미 답을 말한 것처럼 이 사실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가 아닙니까?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고난당할 때 그 고난을 벗어난다는 궁극적인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 하실걸, 저를 기뻐하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어달리셨습니다.
아무도 그를 변호해주는 사람이 없이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었습니다.
비난하던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주절거렸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나 보자.
마태복음 27:39-41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고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짖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게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가 없나이다.
시편기자는 자기의 탄생은 이미 하나님 안에서 작정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모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모친의 젖을 먹고 자랄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심으로 모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난지 8일만에 구별되었고, 할례를 받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가까이하며 자랐습니다.
그들의 삶속에는 하나님의 문화가 가득 있었고, 어려서부터 모든 삶을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는 대부분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고,
하나님이 아닌 이방중교를 가까이 했으며,
하나님으로 인한 사람의 삶의 문화는 쉽게 드러나지 않았고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이방 교회에 속한 성도들도 유대인들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기업을 받은 자손들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많이 알고 구약과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알 수 있도록 말씀의 비밀을 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을 통해서 진리의 길을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은혜이며,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소원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럴 지라도 우리는 본래 본질상 진노의 자여였으며, 이스라엘과 하나님에 대해서 원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을 읽으면서 더욱 우리의 구원의 가치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아닌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는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것보다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은 정말로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 기적적인 은혜의 적용을 받은 사람으로 더욱 하나님의 기업에 가치 있는 신앙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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