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1, 서
예수 탄생을 기준으로 세상은 기원전 과 후로 역사는 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예수께서 오셨을때 유대인들은 제사에 생명을 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AD 70년 로마 티토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생명을 다해 지키던 성전이 무너져 버렸고, 유대인들을 추방하여 세계 곳 곳으로 흩어버렸습니다. 그후 바르코크바 대 반란이 일어나기 까지 60년동안 유대인들이 돌아와 정착하려고 했으나 135년 로마는 이 도시의 이름을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 라고 명명하고 유대인의 거주를 금지하여 거룩한 땅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완전히 몰아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유대의 선지자 이사야가 "자기 땅에서 자기 백성들이 쫓겨나 세상에서 방황하리라"고 예언하였던 일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전세계를 방황하며 가는 곳마다 핍박과 조롱을 받으며 살았으나 제 1차 세계 전쟁 과정에서 독일의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600만명이 홀로코스트에서 몰살 당하는 비참한 일을 당하였고, 그 이전에도 수 없는 세대가 이방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교회가 그 일에 앞장서 왔으며, 유명한 설교자들이 그 일을 더 부추키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민족성을 잃지 않고 견디어 왔습니다. 세대를 거듭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민족성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내년에는 꼭 예루살렘에서 다시 만나자"라는 그들의 송별인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이런 인사는 예루살렘을 향한 온 마음의 그리움과 설움이 온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그 예루살렘에서 드려져야 하는 하나님을 향한 속죄 제사를 강렬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제사를 드리고 2천년이 넘도록 소원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화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유대인에게는 자기를 세상만민 중에서 선민으로 택하여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부여하신 유일한 약속의 징표인 땅입니다.
그들은 그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언약하실 때 그들의 죄를 사하는 속죄의 제사를 명하셨습니다.
레위기 4장에 기록되어 있는 속죄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는 제사입니다.
이 속죄제사는 하나님과 화목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고, 결국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지 못하였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소원해졌으며 그로 인하여 평화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최대의 사명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고 지성소 안에 언약궤를 복원한 다음 자신들의 죄를 대속할 짐승의 피를 뿌려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은 당당히 국가를 세우고 독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일부를 점령하여 (2018년 12월)작년에 미국의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함으로 이제 성전을 재건하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 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레위기 4장에서 명하신 그 속죄제사를 지내기 위해 온 열망을 다하고 있으나 세계는 유대인의 제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최대의 걸림돌은 AD 638년 무슬림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알아크사 모스크를 건설하였으며, 692년에 옴미아드 왕조 칼리프, 압드 알마리크 의 명령에 의해서 무함마드가 승천을 기념하는 바위돔(황금돔사원)이 세워져 있어서 성전 건축의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최대의 숙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속죄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제사를 지내지 못함으로 독립을 했으나 아직 진정한 독립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이 멸망한 이후 레위기 4장에서 명한 속죄의 제사를 단 한번도 지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가운데에는 한 사람도 속죄함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왜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부정할까요?
그들이 속죄의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2천년 동안이나 그들 앞에서 지성소가 사라져 버렸으며, 속죄의 피를 뿌리지 못하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그들의 죄가 그렇게 했고, 속죄의 제사만 드리면 그들은 하나님과 다시 회복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하박국서 4:2의 말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참된 의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이루신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한바와 같이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4:22)"
역사의 반복
이 역사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내 백성 아닌 자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으나 결국은 그들도 역시 이스라엘이 타락 해버린 것처럼 교회도 또한 타락 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수차례 말씀하시기를 말세에는 교회의 모습이 사랑이 식어지고, 노아 홍수 때와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욕망의 세계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전 과거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살았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말하는 타락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설명을 들었으므로, 오늘 우리의 세대, 종말을 치닫고 있다고 믿고 있는 현재 교회의 모습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어럼풋이 이해하였으리라 믿습니다.
지금 세대라고 할 때는 세상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초림하실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것처럼 예수께서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오늘 이 시기에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교회의 본질
교회의 참된 본질이 무엇입니까?
오늘 제가 교회가 무엇인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교회하면 다양한 개념들을 떠올릴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교회에 나왔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온몸을 다하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교회,
여러분이 믿고 있는 교회에 관한 정의,
그 정의가 과연 옳은 것인가요?
성경을 근거로하는 논리적으로나 혹은 철학적으로 살펴 볼 때,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정의 됩니다.
정답입니다.
건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이 의미는 세상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다른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모여지지 않았거나,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지 않았다면, 교회가 아니거나 속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과 관계가 없고, 전혀 다른 씨앗으로 구성된 완전히 독립된 하나의 다른 세상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는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가 거짓된 지식이라면,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 라고 말하면서 성도들을 세상과 구별시켰습니다.
세상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구성되듯이 교회도 사람으로 구성되지만 반드시 교리적으로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소명된 사람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세상과 교회는 사람을 구성요소로 합니다.
사람이 없으면 세상도 없고, 교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세상과 교회를 있게 하셨는데, 본래 하나님 원하시는 세상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였던 것입니다.
이 교회의 참된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셨을 때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고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이전 이스라엘은 눈이 감겨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속한 교회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눈이 있고 귀가 있으나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 때 이사야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사6:11) 앞절에서 말한 바는 "어느때까지 소경이 될 것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성읍들은 황패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토지는 황패하게 되어,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겨 이 땅에 사람이 없을때 까지니라, 그중에 1/10이 아직 남아 있을 지라도 이것도 황패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 나무가 배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록한 씨가 이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2~1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이 이미 실현되었고, 오늘 교회시대에도 다시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본 황폐한 땅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 예언이 오늘 우리에게 적용될 때에 황폐한 땅은 교회입니다.
유럽의 교회는 이미 황폐해져 버렸고 세속화 되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소경이 된 것처럼, 오늘 교회에 속한 우리도 역시 소경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모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3, 하나님의 나라
우리는 2천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소명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천군천사를 대동하고 강림하시는 어떤 화가의 그림을 보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고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해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 장면이 오랫동안 저의 지성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때마다 이 사고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분명히 복음을 왜곡시킨 미련한 자의 거짓된 설명이고, 스콜라철학이며 그리스적 사고를 일깨우는 이성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앞에서 말한 의미를 보면 세상은 사람들을 구성요소로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세상도 없습니다.
곧 세상은 사람들에 의해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들에 의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사고는 하나님의 나라는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하나님들이 계시는 그 나라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 앞에 있는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하나 밖에 없는 천국에 한 사람의 요소가 들어가고 재한된 공간에 구성요소들인 사람들이 많이 들어감으로 하나님나라는 포화 상태가 되어갑니다. 이것이 그리스적인 이성의 사고로서의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실재로 하나님나라는 동참의 의미로 덧붙여지는 더함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미 있는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비롯하여 그 사람에게 덧붙여 더하지므로 점차 확장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그의 몸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공간적 개념은 이미 있는 공간에 나를 던져 넣어 1+1=1이 되고, 1+2=1입니다. 그러나 동참은 1+1=2, 이고 2+1=3으로 확장되고 성장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간의 부피 개념을 이해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앞의 개념처럼 하나의 공간이라는 하나님나라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들어가서 하나 그대로 하나님 나라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공간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이르게 될 그 부활 후 종착지는 이미 있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하나의 요소로 그리스도의 몸에 덧붙여 지고, 같은 생각을 가지는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1+1=2로 확장되는 것(부피의 확장)입니다.
그렇다면 세상도 역시 이미 있는 공간에 포화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어린이들 하나 하나가 세상에 더하여 짐으로 개 개인으로는 점점자라면서 세상화되어지고 세상의 부피는 확장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어떤 공간으로 지어져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하나님 나라는 더욱 공간일 수 없습니다. 모두 사람들을 구성으로 하는 서로 다른 집합체입니다.
3, 하나님 나라의 통치
욥기 1장 6절에는 하나님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탄에 관하여 문학적인 표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욥기는 이스라엘 족장시대에 기록하였으니 구약성경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한 책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 앞에서 동방의 의인 욥을 칭찬하셨고, 그를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지배력을 방해하시므로 욥이 하나님의 편에서 의롭게 산다고 말하였습니다.
사탄의 말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합니다. 즉 욥이 세상에 속하지만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기 때문에 사탄 자기 지배력이 미치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탄은 욥에 대하여 두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멀리하시고 거리를 두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를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관계를 끊으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계략은 욥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을 흐트러 뜨려서 결국 하나님을 불의하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탄의 일(욥을 치시는것)을 하시므로 자기의 지배에 있게 하려는 계략과, 자기가 지배하게 되면 아무리 의인이라도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오만을 부린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탄의 말대로 욥을 치시거나 직접 관여하셔서 징계하시는 일을 하신다면 하나님은 사탄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버린 것입니다.
사탄의 교묘한 계략은 자기 지배에 하나님의 개입에 관한 월권으로 부당하게 맞서서 항의하는 사탄의 모습처럼 보이고, 그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지로는 세상은 자기의 지배아래 있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의 세상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은 모두 자기의 세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지식의 한계는 하나님의 나라를 절대 보거나 인식할 수 없습니다. 지음을 받은 모든 사람은 자기의 소유이고 자기에만 관계하고, 욥도 당연히 자기의 지배권 아래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의 지배권 아래 있는 욥을 간접적으로 간섭하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사탄은 하나님께 왜 내 세상을 간섭하십니까? 라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을 맡기시고 그의 생명만은 해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욥은 사탄의 지배아래 들어갔고, 사탄은 욥에게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퍼부었으며, 욥이 누리는 모든 축복을 빼앗아버렸습니다.
심지어 자녀들의 생명까지도 앗아가 모든 기쁨을 착취하였습니다. 다만 욥의 생명만은 하나님의 명령때문에 빼앗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고 원망하지도 않았고, 사탄은 욥을 지배하려고 하지만 욥은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욥에게 고통과 두려움을 주어, 자기가 지배하는 모든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부정하게 하고, 왜면하게 하려고 했으나, 욥은 자기의 결백을 굽히지 않고 더욱 하나님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의 집합체이고 그 집합의 개체들로부터 공급된 사상(지식)으로 구성된 지식의 유기적 연합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사탄은 모든 사람들의 지식으로 구성된 유기적 연합체계가 인격화된 표현입니다.
세상은 개개의 사람에게서 공급되는 지식으로 구성된 이념적이든 아니면 자연적이든 유기적으로 연합된 인식되는 지식체계입니다. 이 체계는 자기에게 지식을 공급하는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기도 하며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는 영적 인격체 처럼 독자적으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이런 개별적인 활동성이 곧 사탄이며, 마귀인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에게 지식을 조명하여 자기 지식을 생성하게 하면서, 나아가 사람이 생성한 지식을 자신의 체계를 유지 확장하고 그 지식으로 활동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사람에게서 공급받은 활동하는 지식체계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계시고 사람들과 천사들이 있으며, 각종 건축물들과 조형물들이 공간에 배치되어 천사가 수종드는 활동하는 영역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나 하나님 나라를 세상과 대조되는 다른 나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라고 말씀하시므로 대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든 세상이든 사람들이 이해하는 공간적 개념으로만 인식하지만 실지로 세상과 같이 육체를 가진 사람이 하나씩 건설해가는 유기적으로 연합된 인식 가능한 지식체계입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이든 하나님 나라든 육체를 가진 지적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면 두 세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창조의 최종 목적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자연적 본성의 지식들의 유기적 연합체라고 본다면, 하나님 나라는 복음을 기반으로 하는 유기적 연합체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물과 기름과 같아서 유기적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구성요소인 지식은 완전히 다른 코드로 형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땅에서 나왔으나, 하나님나라는 위에서 내려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당신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지만, 사람의 지식은 세상의 조명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 속하였거니와 사람의 생각은 땅에 속한 것입니다. 땅에 속한자의 형체가 있고 하늘에 속한자의 형체가 따로 있어서 하늘에 속한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자의 영광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나라와 세상은 그 근본부터 다릅니다.
이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15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가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책 55장에 이 일들이 일어날 것을 이미 예언하기를 "이사야 55장" 세상에서 나와 하나님나라로 오라고 외쳤습니다.
마태복음 12:28, 누가복음 11:20에서는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때에 임하나이까"
예수께서 답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19~20
사도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말했을까요?
고린도전서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는 얼마나 스콜라적이며 그리스적인이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을 회개해야 하고 이 지식을 멀리해야 합니다.
스콜라적이며 그리스적이라는 말은 문자를 이성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적으로나 아니면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폐단을 속히 뜯어 고쳐야 합니다.
또한 성경은 해석하는 자마다 다르게 해석된다고 하는 생각을 속히 지워버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의 표준에 따라 사고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의 지도를 받게 해달라고, 성령의 인도함으로 인하여 감겼던 눈이 열려지게 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 사고를 즉시 바꿔 하나님나라는 공간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에서부터 세워져가는 나라라고 이해 해야 합니다.
그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인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법은 사랑입니다.
그 나라의 질서 역시 사랑입니다.
그 나라의 통치 역시 사랑입니다.
그 나라는 바로 우리 개개인의 생각에서 시작되고 건설되어집니다.
"너와 나"라는 관계속에 사랑이 개입하고, 우리라는 한 단위의 가족 안에 사랑이 지배하며, 교회와 사회단체, 그리고 나아가 한 국가 단위에 사랑이 통치 한다면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너와 나 사이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우리의 지성이 사랑을 생산해내는 관계를 먼저 가지는 것입니다.
말이나 행동이나 관심이나 혹은 모든 관계에서 사랑이 개입하여 사랑을 드러낸다면, 가족으로, 나아가 개개인이 속한 사회단채에 사랑의 인자가 누룩처럼 퍼져 전체의 사회가 사랑의 나라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사람의 육체가 없으면 결코 지어지지 않은 나라입니다.
사람의 육체는 먹고 마시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지식을 생성하는 일을 합니다.
사람의 육체가 하는 일중에 그 어느것보다 중요한 일은 보고 듣고 생각하여 지식을 내는 것입니다. 그 지식이 복음을 기반으로 하느냐 아니면 자기의 본성을 기반으로 하느냐에 따라 세상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나라에 속한 것인지 구별됩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복음에 기반하는 지식을 많이 생성하여 하나님 나라가 더 확장되어 활동적인 역할을 함으로 치유의 역사와 그리고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랑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통해서 사랑이 나와 우리 공동체가 사랑으로 구성된다면, 그곳에 치유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온갖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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