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 예배

베드로서 강해 1중생

생명있는 신앙 2017. 8. 28. 04:27

베드로 전서 1: 1~5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주시는 중생의 소망

 

AD 50~52년경 사도 바울은 제 2차 전도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교회를 세웠을 때, 그 지역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돌아가서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가 전한 복음의 진위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미 활동하고 있었고, 그리스도 옷을 입은 유대주의라든가, 아니면, 이방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 역사를 통해서 아시아 지역을 활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에 들어와 있는 비 복음적 요소들은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고, 복음의 본질마저 흐트러뜨려 왜곡되게 했습니다.

대표적인 서신이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스라엘에서는 북쪽, 터키에서는 동쪽방향으로 안디옥에서부터 에베소에 이르는 길 주변에 있는 교회들에 주는 메시지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3차전도 여행중 갈라디아 지역을 순회방문하고 지나왔는데 할례와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서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바울의 가르침을 멸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심하게 책망합니다.

갈라디아 1:6~9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고 경고합니다.
만약 이 시대에 우리가 갈라디아 지역에 거주한 그리스도인이었다면 바울의 주장보다 오히려 유대주의 그리스도인이 가르치는 할례와 율법 준수의 가르침에 더 치우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적 판단이 근본적으로 왜곡된 지식에 의해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서는 역시 소아시아 지역에 보내어진 베드로의 서신입니다.

이 서신의 수신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베드로서신과 갈라디아 서신과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갈라디아 서신의 수신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합 교회라면, 베드로서의 수신자는 유대인을 중심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서신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주요한 신앙의 가르침을 들어야 합니다.

실지로 베드로서는 AD62~64년에 기록한 서신으로 격려의 서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베드로가 그리스도 교회에 격려해야할 필요가 있는가요?

당시 교회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AD 647월 로마에 대 화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네로는 절대권력을 추구한 폭군이며 독재자로서 세익스피어가 쓴 햄릿에서 표현한 것처럼 사악한 사람입니다.

사람으로서 로마를 새롭게 건설하고자 하는 야망으로 로마시의 3/2를 잿더미로 뒤바꿔놓았습니다.

네로는 이 불타는 도시를 보면서 시를 읊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타키투스 연대기를 보면 네로는 전혀 다른 성군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로마가 불탈 때 그는 40Km 가 떨어진 안티움에 있었습니다.
화재 소식을 들은 네로는 달려와서 화재를 당한 시민들을 위해 광장과 건물들을 개방하여 피난처를 재공하고 불타버린 도시를 보고 매우 비통했다고 기록하고,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이상한 소문은 그를 괴롭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은 네로가 대 화재를 명령했다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민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이 더욱 그를 의심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네로는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본성에는 자기 방어라는 생존의 본능이 있습니다.

황제도 이런 본능이 작동하였고, 황제의 자리가 위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생명에 까지 위협을 느낀 것입니다.

네로가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을 당하고 있는 상황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 포파에아 사비나가 그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뭔가 속삭였습니다.
그녀의 말에 네로는 그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생각했고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녀가 네로의 귀에 심어준 말은,

너무도 분명한 반역,

모든 사람이 거부할 수 없는 아주 명백한 증거들은 완전히 갖추고 있는 로마의 화재를 일으킬만한 사람들을 지명하는 말이었습니다.
인면 수심인 사람에게 드러난 상상할 수 없는 행위,

범죄에 범죄를 더하여 더욱 죄를 뒤집어쓰고 죄에 빨려 들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네로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명령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라.
그들이 로마를 불태운 장본인들이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로마에 대항하지 않았으나, 신격화하는 황제를 거부하였습니다.

황제는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이들의 거부는 우상숭배라는 자기들의 종교의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버리고서라도 자기들이 고백한 신앙을 버릴 수 없는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나라는 네로가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고 영원한 주 예수의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육신만 로마에 있을 뿐이지 실지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되어 잠재적으로 네로의 통치 영역에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사람의 시채를 먹고 피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네로 자신의 통치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완전히 다른 나라,

예수를 주로 섬기는 예수나라 사람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백성들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정직하지 않은 사람의 지적인 사고의 틀에서는 결코 사람을 바르게 세워가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네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하신 것을 보면 이세상에 속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참 진리였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정의,

자연을 본성으로 하여 태어난 사람에게 있어서 그 나라,

아무에게도 통용되지 않은 자기만의 도덕적 양심,

이것은 마치 단단한 껍질 안에 있는 깨어나지 않은 잉태되고 있는 생명체와 같은 것입니다.

자기뿐인 세상에 살고 있는 껍질 안에 거하는 사람,

계란을 보십시오.

그 계란은 아직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은 병아리가 단단한 껍질 안에 있습니다.

그 껍질 안에는 자기 혼자 뿐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와 같은 사람들은 많이 봅니다.
남을 조금도 이해하지 않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그들은 누구의 말로 듣지 않으려는 완고한 사람

그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것 같습니다.

뭔가 덜 성숙한 사람처럼,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서투른 사람처럼,

자기중심 사고로 붙들려 있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린아이를 깨우치게 하는 아주 중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없는 외로운 곳에 잠시 두는 것입니다.

그가 드려움을 느끼고 혼자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면 곧바로 세상의 중요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유치원을 운영하는 한 선생님이 사회성이 부족한 어린이를 변화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을 한 가지 개발했습니다.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곤 남을 이해하는 사고가 발달하지 않은 자기중심적이거나 여타의 문제를 가진 어린이를 말합니다.

이 선생님은 문제가 있고 자기고집이 강한 어린이를 한쪽 구석에 의자를 두고 거기에 앉게한 후 벽을 향하여 보게하고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징벌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때 조건은 두 가지가 반드시 요구됩니다.

뒤 광장에서는 다른 어린이들이 떠들며 노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이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하고 일정한 숫자를 세게 하는 것입니다.

이 어린이는 숫자를 세는 동안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저기에는 나 아닌 다른 어린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하고 그곳에서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곧 자기 외에 다른 어린이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훈련으로 점차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시켜가는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자기의 느낌을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네로는 이런 교육을 많이 받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

그들은 자기에게 매우 소중한 친구라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네로는 자기의 행위를 뒤집어 씌울 명퀘한 해답을 얻었습니다.

절제 절명의 순간에 얻은 비책은 불륜을 통해서 빼앗은 여인에게서 나온 지혜였습니다.

포파에아 사비나!

이 여자를 친구에게서 빼앗아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 여자의 신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녀의 조상은 유대인입니다.

나중에 전언된 이야기이고 사실이 아니지만 이 여인의 본래 남편은 네로의 친구였습니다.

물론 당시의 권력에 한 여인의 운명이라는 것이 사람의 가치로 존중을 받는 것은 아니라 마치 권력자들의 소유물처럼 여겼으나, 비정한 운명을 타고난 여인의 삶은 자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말이라도 인간으로서의 도덕적인 기대를 갖지 않은 여인의 야비함은 선악과를 범한 그 후손임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실지로 그녀는 자신의 부정한 관계를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위하여 자신을 네로에게 보냈다고 생각하고 유대인의 원수인 그리스도인들을 로마에서 제거하기 위한 계책으로 스스로 에스더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처참한 비극의 현장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기가 막힌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그리스도인들이 거짓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대 공격이 개시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고 역시 네로가 통치하는 그 세계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위험,

숨 가쁜 인생의 로정에 놓은 수많은 올무들,

한발을 잘못 내디디면 얽매이는 인생의 두려움 앞에
우리고 속수 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지 않는 다면

하늘에서 우리를 감찰하시지 않는 다면

손을 붙잡고 우리를 이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안전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지어다.
물론 이 말씀은 선지자 다니엘의 예언을 해석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빛이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 말씀은 이 세상 종말에 일어날 사건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관점으로 볼 때 멸망의 가증한 것이 이 도시를 지배하게 된다면 이도시를 떠나라 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볼 것인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베드로는 로마 밖에 있는 교회에 서신을 보내 그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격려의 글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서신은 매우 급합니다.

실지로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로마에 불어닦친 위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남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예견된 핍박을 맞이하기 위해 마음을 강하게 하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네로의 명령이 군대에 하달되었고, 군인들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잡아가기 위해 교회를 급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드러내 놓고 예배하는 것이 제제를 당하지 않았었는데, 공격을 당하고 예배드리는 곳마다 불살라지고 사람들은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황제를 주라고 고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역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들이 주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로마를 불태운 장본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모아가고 있는 것은 결국 황제로부터 나라를 빼앗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순식간에 로마의 방화범이 되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은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비극은 공개되지 않은 두 사람만의 귓속말에서 시작됩니다.

거짓은 공개되면 안됩니다.

수군 수군거리고 자기들만 아는 비밀의 대화를 통해서 세상에 역사를 일으킵니다.
포파에아 사비나가 네로의 귓속 넣어준 그 말,

그리스도인들을 피로 물들게 했고,

짐승들의 밥이 되게 했으며,

역청을 발라 로마의 어두운 골목을 밝히는 횃불이 되게 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울부짖음이 불타고 남은 로마에 하늘 아래에서 자행되었습니다.

교회는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고,

로마 전역에 있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풍전등화와 같은 위협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실지로 로마 전역에 걸쳐 있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박해가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잔인한 수단을 통해서 죽어갔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반기를 들고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조용하 수면 아래로 들어가 때를 기다리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기 앞에 밀려온 어떤 위협을 감지라도 하였습니까?
서신을 읽으면 아직 박해로 인하여 고난을 당한다는 의미를 암시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뭔가 알지 못하는 임박한 어떤 사건을 예견이라고 하듯이 도사리고 있는 어떤 위협의 느낌을 감지하여 암탉이 병아리를 자기의 품에 모음과 같이 뭔가 의미심장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한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글을 쓸까요?

만약 베드로가 이방인 교회에게 서신을 쓴다면 이 의미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물론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에게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들리는 이 말은 감동이 다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택하심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버림입니다.

한 면에는 슬픔이 있고 다른 한 면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라면 그들이 거부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자신들 때문이라면 그들의 삶이 자기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우리의 중생의 근원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바와 같이 그가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소망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서는 명확하게 네로의 박해 시기중에 보낸 서신으로 봅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신의 위치를 바벨론이라고 기록한데서 볼 수 있습니다.

실지로 베드로는 이 글을 로마에서 실루아노에게 대필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문맥의 내용이 너무도 평온한 가운데 다가올 미래를 예건한 것처럼 보입니다.

 

당시는 네로 대박해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1절에 지명된 도시들은 당시 교회의 중심이 되는 지역입니다.

네로의 박해는 로마를 넘어 이제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장차 임할 대박해의 심각성을 암시라도 하듯이 본서에는 무려 21회에 걸쳐 고난이란 단어가 나타나고.

사도 베드로는 본서신에서 고난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피할 수 없는 과정임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고난과 연단을 통해 능히 믿음의 승리를 이룬 자들만이 하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임도 가르치며, 예수께서도 우리 위해 육체의 고난을 겪으셨으며, 이런 고난을 몸소 체험하신 주님께서 주님 위해 고난당하는 자들의 사정과 형편을 아시고 능히 도와주실 것을 상기시킵니다(4:1). 이런 주님이신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우리 성도들을 그냥 내버려두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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