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42~47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때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우리가 여기에 모여서 이렇게 예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시편을 찬미하고,
찬송의 시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어떤 사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그 부름에 반응하여 하나님께 나아갔기 때문에 예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까지 살았던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결코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창조적인 사역의 하나로서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곳 부르심의 사역입니다.
사람의 부름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른 만물들을 지으시는 것과 구별되는 방법으로 지으셨습니다.
사람은 직접 흙을 빚어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되게 했습니다.
각종 공중의 새와 짐승들은 흙으로 지으셨으나 그들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사람과 다른 점입니다.또한 하나님께서는 각종 새들과 물고기들에게는 하신 것과 같지 않게, 사람에게 말씀하셔서 사람을 불러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들이나 물고기들은 그들을 부르심으로 존재하게 하셨으나, 사람을 먼저 지으시고 다음에 부르심으로 살아 있는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부르심은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처음 사람에게는 이렇게 부르셨습니다.아직 의식을 가지지 않고 사람 안에 지식이 없어서 지적인 활동을 하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심으로 의식을 깨어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사람의 지성은 비로써 작용되기 시작했고, 의식이 일어나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순수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지성은 작동되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성대로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이 타락하게 되자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짐으로 하나님과 관계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평상시 늘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던 영혼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가까이 있으며 늘 함께 거하시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도 없었고, 하나님을 인식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다시 깨워야 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시 부름이고, 타락한 죄인인 아담에게 다가오셔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부르심은 어떻게 이해하는지 제가 잘 알 수 없으나, 아담은 이 부르심으로 두 번째 하나님의 창조적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이 부르심은 모든 인류를 향한 부르심이 아니라 아담 개인에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가인에게 다가오셔서 죄를 깨우치도록 하셨으며,
아담의 6대손 에녹과 동행하면서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9대손 노아를 부르시고 홍수를 대비하게 하셨으며,
17대손 아브라함을 다시 불러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을 드러내셨습니다.
타락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은 처음 사람이 부름을 입은 것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사람이 많을지라도 창세전에 정하여진 사람을 별도로 사역을 진행하셨습니다.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의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여 창세전에 정하여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을 낳게 했다는 것이 하나님의 부름에서 명확하게 증거 되고,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되어진 아들들을 구별하여 부르심으로 당신의 의를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에게 다가오셔서 부르심으로 사역하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자를 부르시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동물은 호기심이 매우 많은 존재입니다. 게다가 자존심마저 매우 강해서 하나님의 부름을 자신의 신앙 감정에 기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부름을 받지 않았는데 부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심겨진 종교성은 신들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깊은 성향이기 때문에 참신 거짓 신을 가리지 않고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자연의 결과물까지도 신의 흔적으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경배하고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 그것들에게 매입니다.
왜곡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기안에 있는 종교성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을 가진 것처럼 경배하고,
성도들의 모임에 함께 참여하며,
신앙인들의 행동을 본받아 같이 행동하며,
믿음을 가진 것처럼 성도들과 함께 행동하지만,
돌아서서 자기의 삶의 터전에 들어가면 신앙을 내던져 버리고 타락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부름을 받지 않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이 아닌 자진 참여는 결코 하나님을 영광을 맛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종교성이 하나님을 찾는 것처럼 가장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하는 슬픔을 만나고,
이런 사람들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시는 그날에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같이 천천히 또박또박)
저들이 가르침을 받습니다.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에 전혀 힘씁니다.
이런 일은 한 마음일 때 가능하고,
하나의 관심에 같이 동참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실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의 주된 내용이 바로 42절입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무리였습니다.
12제자들과 함께한 120문도들을 포함하며, 나중에 회개한 3천 여명의 성도들도 포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