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1,
에베소서 4:22~24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데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새로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성경은 우리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정죄합니다.
시편 34: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 도다.”
시편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등 악인에 대하여 구약에서 260번을 언급하였습니다.
악인이라는 말은 라샤임 רְשָׁעִ֣ים 사악한, 죄를 범한, 범죄의 라는 형용사이고, 죄인과 구별하는데, 곧 죄인으로서 객관적 행위를 범한 사람을 ‘악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들 종말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이 세상의 종말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데, 실질적으로 이 세상의 종말은 곧 ‘악의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악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사역을 하시고 계십니다.
먼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그들로부터 세워진 부족을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세상 속에서 고난을 당하게 하신 후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시고 세상과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모든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여 범죄 함으로 그 나라를 흩으시고 세상 속으로 흡수 되게 하신 후 2천년동안 세상에서 비참한 처우를 받아가며 살게 하셨다가 다시 나라를 세워 이스라엘을 있게 하셨습니다.
이제 단하나 과정이 이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 강림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날입니다.
그날에 이 땅에 악인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죄인이 하나도 없는 악의 종말을 맞이하는 새 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까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에도 한 동안 죄인이라는 점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성령의 강권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인이라는 점을 조금씩 인정하면서 삶 가운데 행하여진 양심적인 죄들을 떠올리며, 그것들로 인하여 미래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죄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우리의 삶 가운데 행하여진 양심에 벗어난 행동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처음부터 죄로 세상의 삶을 시작했고,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자녀들이며,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영원히 멸망에 처해지는 비참한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17:9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렘17:9)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신 3:10~16,18 에서 시편의 말씀들과 선지서의 말씀의 일부를 인용하여 말합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시14:1~3,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다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53:1~3, 동일 )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시편5:9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에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시 140:1~3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강포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저희가 중심에 해하기를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시 10:7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여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사59:7 그 발은 행학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시 36:1,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이 지적은 어떤 특수한 지역이나 혹은 별도의 장소에 구별된 사람들을 지칭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19절)
라고 말하므로 온 세상 아담의 후손 전체를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단순히 죄인일 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행하는 악한 행위들로 인하여 악인이라고 단정지어져 있습니다.
요한복음 8:44에 살펴보십시오.
처절하고 잔인하며, 빠져 나갈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듣게 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물론 이렇게 지적을 받은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러나 지적을 받은 이스라엘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칭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가 말하는 대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사람을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자요”
이는 가인입니다.
하나님의 지적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있는 죄를 다스리려 하지 않았으며 숨기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우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 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수님은 여기에서 거짓과 진리를 명확하게 구별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본래 태어나면서 거짓의 유전을 받고 태어나며, 거짓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는 거짓뿐이고 진리는 한 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도다.”
이것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거짓뿐이니까, 예수께서 진리를 말씀하셔도 그들은 거짓으로 진리를 해석해서 왜곡시켜버립니다.
자기 안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를 해석할 수 있는 일치한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하나님의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유대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방인인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사도가 지칭한 대로 성경은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재난 가운데 빠져 있으며,
우리의 본성은 전적으로 멸망했고,
결코 피할 수 없는 큰 화근이 사람의 가슴속에 몰래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고 오늘 까지 살면서 반드시 멸망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이 비참한 소식을 듣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이 살기위해 태어났느냐 아니면 죽기 위해 태어났는가? 라는 질문 속에 빠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처럼 사람의 운명을 비참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까지 비참한 운명적 질병의 원인과 우리 몸 안에 짊어지고 있는 타락의 요소가 발견되지 않았고, 그로 말미암은 통증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집어삼키고 파멸시켜 버리는 불치의 병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불치의 병이 사람을 점령하고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발진하는 그날,
사람은 그 발진을 억제할 어떤 방법도 찾아내지 못하고 실질적인 부패에 휘말려 들어가고 결국은 사망에 사로잡혀 육체의 생명은 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죄가 사망을 도구로 인생을 사로잡고 있는 것을 왕이라고 했고,(롬5:21) 곧 사망이 왕 노릇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질병이 무엇인가요?
사도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엡 4:22)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구습’이라는 말은 τὴν προτέραν ἀναστροφὴν 로서 특별한 어떤 의미가 없이 단어 그대로 사람의 삶에 부가된 옛 부터 행하여온 몸에 배인 습관이고, 이 ‘구습’이 κατὰ τὰς ἐπιθυμίας τῆς ἀπάτης이고, 영어 Kjv는 according to the deceitful lusts; Niv는 by its deceitful desires 라고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Niv 에서는 단순히 desires 를 써서 욕망이라고 했는데, Kjv 에서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Lusts, 곧 성욕에 사용하는 단어를 택했습니다.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으나 두 단어의 차이는 욕망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종류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아무튼 사람에게 있는 질병은 욕망입니다.
많은 사람은 욕망을 구분하여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선한 욕망은 절대적 가치에 있어서 사람이 삶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욕구를 의미하고, 악한 욕망은 선한 욕구가 그 선을 초과하여 넘어서는 것과 또한 별도로 악한 의도의 욕망으로 구별합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선한 욕망이라는 것은 존재에 필요한 것이라고 구분하지만 실지로 이런 것들 상당수는 생명체에게 반드시 필요한 감각적인 욕구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이런 욕구는 타락의 욕구라고 볼 수 없지만,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와 구별이 안되는 이유는 사람의 지식에 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사람 안에 있는 욕망이라는 질병이 있는데 deceitful 곧 부정직한, 속임수, 기만적인, 이라는 것을 지칭하여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고, 사람을 파멸하며, 곧 썩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욕구가 아니면 세상은 발전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삶의 형태를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며, 윤택하게 하는 것이 욕구를 기반으로 하는 열정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삶으로부터 떠나라 명합니다.
그 삶은 하나님의 백성이 취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삶은 진노의 날에 멸망할 세계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이 장망성을 떠나 구원을 얻으려고 결단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많은 미련들을 과감히 뿌리치고 출발했으나, 자녀와 사랑하는 아내와 이웃의 친구들이 그를 붙잡고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사실 크리스챤을 붙잡은 것들은 그가 가장 사랑하고 애지 중지하던 것들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크리스챤은 자기의 삶의 터전이 곧이어 심판의 날에 멸망을 당할 것이고, 자기가 사랑하는 그것들에게 붙잡혀 있으면 멸망의 날에 자신도 함께 멸망당할 것이라는 것을 깨우친 것입니다.
야고보서 4:4 에서는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니라”
요한일서 2:15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한복음 12: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그래서 이 세상을 좇아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갈등 속에서 헤메는 단순한 소설이나 시대적인 문학의 한 장르가 아닙니다.
크리스챤의 고백은 우리에게 있어서 실전이고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 파멸되어가고 있는 장망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난 이 성이 장차 우리와 함께 파멸할 장망성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을 살며,
부한 자는 부를 누리고,
가난한 자는 삶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성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인생의 결과에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미래를 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전쟁의 소리와,
예기치 않은 대자연의 분노,
사람들의 실수로 인한 예측하지 못한 사고와
미움과 증오로 말미암은 쟁투,
이런 것들로 인하여 세상은 정말로 아비규환이고,
한발을 편하게 내 디딛을 수 없는 불안한 곳이었습니다.
한날 한날을 더해 갈수록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자신이 불쌍하고, 어깨에 매어진 삶의 무게는 자기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심령이 새롭게 되어”
ajnaneou'sqai de; tw'/ pneuvmati tou' noo;" uJmw'n:
심령이 새롭게 된다는 말은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거듭남,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되 마음과 영을 명확하게 지명하여 새롭게 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말하는 영을 무엇으로 이해했을까 하는 신학적 연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영”이라는 의미를 지나치게 헬라적인 의미로 이해한 오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헬라어로 서신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과연 헬라적인 의미로 이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을까요?
바울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히브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헬라어에도 능통하지만 더욱 히브리를 그의 사상의 모태로 한 히브리인이며 로마인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적 사고에 있어서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욱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6:63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씀은 진리였으며, 영이였으며, 생명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의 지식이고 예수님의 지식입니다.
이 말씀 곧 지식이 생명이었고,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지식을 간단하게 자기의 감동에 우러나는대로 의미없이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였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를 통해서 목격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13에서 너무도 분명히 확인하였는데, 11, 13, 16절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담대하게 요한복음 1장 1절을 기록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령은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이란 새로운 씨앗을 의미합니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서 나는 거짓이 아니라 복음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에 새롭게 심겨지는 새사람을 말하고 사도는 이를 바탕으로 육신의 사람과 영의 사람을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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