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방언의 필요성
1) 예루살렘에서의 방언의 역사
필자는 “방언”에 관한 주제로 말하려는 것이지 “성령 세례”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1) 앞에서 방언이 이방인들과 깊이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넬료의 집을 통해서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예루살렘과 에베소에서 방언의 필요성을 말하려 한다.
최초 예루살렘에서 방언은 왜 필요했는가?
누가의 기록에 의한다면 베드로를 비롯한 12사도가 성령의 충만을 입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기 시작할 때 이 소란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들렸다. 이 소란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무리가 모여들었고, 사도들은 히브리어를 더듬거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그들이 모국어에 능통하지 못한다고 해서 염려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들을 통해 역사 하셨기 때문이다.
경건해야하는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소란을 유대인들은 불경하게 생각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모인 곳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일을 목격하고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기적의 현장으로 구경하려고 모여든 것이다. 성령께서는 사람을 이처럼 모아들엿다. 사도들과 120문도들은 술에 취한 사람들과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담대히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이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2)대로 성취하신 일이다. 수많은 인파들은 모여들게 되어 사도들은 좁은 다락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헤롯이 건설한 운동장으로 장소를 옮겼고, 12사도들은 모여든 군중들에게 너희가 죽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담대하게 증거 하였다. 이방에서 온 어떤 유대인 대표가 이 일에 대해서 기이함을 말한다. 우리는 이방에서 온 사람들인대 우리가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니 기이하다3).
“이 일이 어찌된 일이냐?”
“저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1) 갈릴리 사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는 각도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충청도 사람, 그리고 강원도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대구 사람과 부산 사람들의 말이 다르다. 또 대구와 영덕과 안동 지방 사람들과의 언어가 상당히 차이가 난다. 호남 사람들은 경상도 사람들이나 충청도 혹은 강원도 사람과 다른 사투리를 구사한다. 사투리를 사용하여 지방의 특색을 드러내준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도 명절만 되면 절기를 지내려는 순례자들로 가득찬다. 이들은 디아스포라로 각국에서 고향을 찾아 온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는 히브리어를 잘하는 사람보다는 좀 서툰 사람들이 많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비록 먼 타국에서 왔을지라도 히브리인으로서의 선민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비록 먼 곳으로 흩어져 살았지만 그들의 언어만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후대들에게도 언어를 가르쳤고 능숙하게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순례객들은 제자들의 소란스러운 광경을 보고 “저들은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라고 말한다. 필자는 순례자들이 한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120문도들이나 사도들을 보고 갈릴리 사람임을 쉽게 알아 차렸다.
120문도들은 갈릴리인 이라는 특별한 표식이 있거나 구별된 것은 아니다. 그런대 유대 지역도 아닌 윗쪽의 갈릴리 지역 사람임을 순례자들이 즉시 알아차린 것은 대단한 통찰력일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람과 관계를 가질 때 어느 지역의 사람인가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그것은 확인하려 해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확인이 되어진다. 이런 확인 절차는 대부분 언어를 통해서 하거나 그들의 특수한 복장을 통해서 하게된다. 순례자들도 120문도들을 볼 때 일단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제사하는 일과 전혀 관계없는 모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지역의 사람들이 모인 것인지 관심을 가졌을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120문도들이나 사도들은 그들은 대부분 갈릴리 사투리를 사용하였다.1) 그들의 언어가 그들 지방을 분명히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2) 우리가 난 곳 방언
또한 순레자들은 놀란 것은 그들이 갈릴리 사람인데 우리가 난 곳 방언 말함을 듣는 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뒤를 서로 연결하여 보자. 순례자들이 보기에 저120문도들은 갈릴리 말을 하고있는대, 또 다른 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곧 우리가 난 곳 방언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곳에는 분명히 두 언어가 각 사람의 귀에 들려왔다. 한 언어는 갈릴리 사투리였고, 한 언어는 그들이 난 곳의 방언이었던 것이다.
누가는 바울의 사도권 문제를 이해하려고 바울 사도에게 나타난 자신이 경험했던 성령 강림과 오순절 성령 강림을 마음속으로 비교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증거 해주는 사람에게 아주 구체적인 현상 하나 하나를 묻고 질문하였을 것이다. 누구든지 독자 자신이 누가의 입장이 되어보자. 당신이 누가이고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과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비교하려고 한다면 증거 해주는 사도 요한에게 어떻게 질문하겠는가?
첫째로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현상을 묻지 않겠는가?
둘째로 성령을 받은 사람의 현상을 묻지 않겠는가?
셋째로 본서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방언의 현상을 적극적으로 묻지 않겠는가?
만약 묻지 않는다면 왜 묻지 않겠는가? 그것은 성령 강림과 방언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묻지 않았을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이 성령 강림과 방언을 주제로 연결된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목적으로 기록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누가와 성령께서는 방언에 진지한 관심이 있었다. 그러므로 누가는 방언의 현상에 대해서 요한에게 질문할 것이다. 사도 요한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언급한 후 그 현상으로 방언을 말했을 때, 누가는 여러 사람들에게 들었던 그 사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귀가 번쩍 뜨였을 것이다. 그때 누가는 “120문도가 어떤 말을 했습니까?”라고 질문하였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자 사도 요한은 “저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라고 말했다. 실지로 이것이 이 책의 가장 중심의 되는 말이 될지 모르겠다. 현재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난 방언 현상과 누가가 말하는 방언 현상과의 관계를 조사하고 성령 강림에 대한 누가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지금 말하는 것이다.
성경을 기록한 누가의 말은 “성령이 말하게 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의 현상은 어떤 것인가?
누가는 어떻게 확신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기이하였다”.
“기이하다”
사도들이 각국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기이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이 이방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기이한 현상으로 보였을까? 성경을 해석하는 여러 사람들은 이런 말 한마디를 무의미하게 지나쳐 버린적이 있다. 그러나 누가가 이것을 기록하기까지 증거자의 강조를 생각하여야 한다. 당시 자기들이 각국의 말로 말하는 것은 전혀 기이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의 여러 나라에서 몰려온 이방에 속한 유대인들과의 관계에서 여러 나라의 말을 구사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긴 것이다.
“생각 해 보라”
누가는 성령 강림과 함께 다른 방언을 언급한다. 가시적으로 나타난 성령 강림은 곧 바로 그들의 현상을 증거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한 말이 무엇인가?
1:8에서 약속한 증거의 말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15:26-27의 사상과 아주 동일한 내용이다.
이것은 기이했다.
누가가 증거자 사도 요한의 말만 듣고, 기이하다고 기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늘 성경을 해석하는데 문제를 대두시킨다. 단적으로 생각해도 요한에게 기이한 것이 누가에게는 조금도 기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누가가 자신에게는 확신이 없는 현상을 요한의 증거를 토대로 기록하였다면, 그 자체가 모순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한다. 성경은 모순된 사상을 가지고 기록한 곳은 한군데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요한이 “기이하다”고 말한 내용은 누가에게도 “기이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말하기는 본문은 요한에게 기이한 것이 아니고 이방 유대인에게만 “기이하다”고 말한 것이다. 다만 요한은 이방인의 대표자들의 말을 옮겨준 것뿐이다. 그것은 이방 유대인들게 체험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사도들은 기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방 유대인에게는 기이한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그의 기록 여러 곳에서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1)고 기록한다. 나는 이 기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주의 사도들과 바울을 파송하도록 선지자들과 교사들에게 말씀하신 현상이 그들의 귀에 들리도록 음성으로 말씀했다고 해야하는가 아니면, 성령의 음성을 마음의 느낌으로 들었다고 해야하는가? 그러나 누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말은 얼마나 쉬운 개념인지 모른다. 증거자는 자기보다 더 확실하게 증거 해줄 요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성령은 영[하나님의 신]이시기 때문에 마음에서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성령은 신자의 몸을 성전 삼아 거하시기 때문에 신자 안에서 신자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갑자기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나타나서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의 정황과 자세한 증거들을 보아서 빌립의 직접 증거임에는 분명하다. 빌립이 주의 사자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보니 에디오피아 내시가 병거 위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다. 빌립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성령이 빌립더러 말씀하셨다.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또한 베드로가 욥바에서 기도할 때에 있었던 이야기를 누가는 기록한다. 그것은 고넬료의 집에서 있을 성령 강림을 예시한 말씀이다. 분명히 증거자는 베드로가 기도하는 도중에 “어떤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11:7). 그 소리는 다시 들려왔다(11:9). 그 소리는 세 번이나 있었다(11:10). 이것은 환상 중에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성령께서 명하셨는데 “아무 의심하지 말고 가라”라고 말씀했다.
또한 13:2에는 안디옥 교회의 교사들과 선지자들이 실루기아와 구브로의 교회 문제로 선교사를 보내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 금식으로 기도하고 있는 중에 성령이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 음성은 한사람만이 들은 것이 아니라 금식한 사람들이 함께 들었다. 성령께서는 바나바와 바울을 지명하여 보내게 했고, 이것이 바울의 일차 전도 여행의 시작이 된 것이다. 이때 누가는 이미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바울이 일차 전도 여행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누가가 마음에 감동을 받고 이차 전도 여행을 따라갔을 것이다.
성령은 이처럼 광범위하게 그리스도인이 된 회개한 사람들에게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성령은 음성으로 말씀하셨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증거자가 되었다. 그들은 집에서 사회에서 또는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했다. 사도들은 한결 같이 성령이 말씀하신 것은 성령의 역사 하심을 의미했다. 성령은 확실히 말씀하셨고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들었다. 그러므로 성령은 마음에서 우러난 어떤 감동이 아니었다. 누가도 이것을 확실히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방 유대인들이 사도들의 소동을 듣고 모였을 때, 그들의 가슴에도 뜨거운 역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사투리를 구사하는 갈릴리 촌놈들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거나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이 외치는 음성과 함께 성령의 음성이 함께 있었다.
이것은 누가가 에베소에서 직접 체험한 이 현상과 요한의 증거가 동일하였기 때문에 거듭 질문할 필요도 없었다.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해서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듯 요엘서의 말씀을 성취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사실을 그가 이해하지 못해서 요엘서의 말씀을 증거로 든 것이 아니다. 그들 앞에 그들의 증거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한 내용을 듣지도 못했고, 혹시 말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요엘서의 내용을 증거로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직접 약속을 받았던 마가복음 16:16-17이나, 사도행전1:8의 말씀을 증거로 들었다면, 유대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령 강림의 현상을 받아들이기에는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나 선지자들의 근거가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한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그들의 자료에 분명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을 보고, 그 행위를 따른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이나 선지자의 글에 확실치 않은 사건은 사도들의 신앙을 결정적으로 오해를 받게되고 오히려 배척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로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요엘서의 예언을 근거로 말하게 한 것이다.
그곳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3개월 전에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에 관한 이야기와 그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말한 유대인들의 거짓 소문을 들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 소문을 듣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대해서 비난하고 비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도들의 말을 듣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들에게 이미 성령께서 역사 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무식한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성령께서는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증거를 말하도록 베드로에게 역사 하지 않으셨다. 베드로는 성령이 주시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마음에 확인하고, 율법과 선지자에게 약속된 분이심을 증거한 후 지금 성령이 강림한 것은 구약에 약속되었고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12사도들은 분명히 이방인들의 언어를 분명히 알지 못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이방의 언어라면 고작해야 알랙산더가 통일시킨 핼라어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순례자들은 사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각종 이방어로 듣고 있다2). 이방 언어를 알지도 못하는 사도들이 어떻게 이방 언어로 말하였는가?
많은 사람들은 사도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 신비하게 이방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다고 말하고, 특별히 성령께서 사도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특별하게 역사 하는 은사를 주셨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누가가 기록한 문맥이 충분히 그렇게 이해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기본적인 지식만 갖추더라도 사도들이 이방 언어를 신비하게 구사하였다는 주장은 억측이라는 사실을 곧 알 수 있게 된다. 누가가 분명히 기록하기를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2:4)”라고 했다.
F. F. Burce는 이 내용을 황홀경의 언어를 표현한다고 말한다. 나는 Burce박사가 성경 외의 증거에 너무 집착해서 간과할 수 없는 실수를 했었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설교자들도 Burce의 말을 받아서 황홀경의 언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유입되는 신학에 너무 의존하고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려는 자세를 전혀 갖지 않았다. 그러나 Burce 박사의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사상이 전혀 아니다. 그 증거로 사도행전 안에는 Burce박사가 말하는 외증들 보다 더 정확한 충분한 근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이방에서 온 유대인들이 “이 말하는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라고 말했다고 기록한다. 성경에서 답을 찾지 않고, 다른 곳의 증거를 통해서 성경의 확신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이 말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수고가 결코 헛될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성령께서 확신 주지 않은 어떤 자료들에 휩싸여서 진실한 증거의 말씀을 너무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감한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가볍게 취급하거나 신학을 위한 고고학의 자료 정도로 취급하는 것을 쉽게 보아왔다.
Calvin 선생은 공관 복음서 누가복음1:1을 주석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인간적인 설명에 신뢰를 두는 것은 잘못이요,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신앙의 확신은 성령의 확증이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사람들의 증언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권위가 우선적이고 성령의 내면적인 확증이 사건의 역사적 지식을 주도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라야 인간들의 증언은 어느 정도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역사적 지식이란, 우리들이 몸소 보았거나 남들에게서 들은 사건에서 얻은 그러한 지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명백한 섭리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험을 믿는 만큼 목격자의 증언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또한 누가는 비공식적인 자료를 가지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복음 전도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서술해 나아가고 있다. 분명히 그는 그들을 인간의 권위 이상의 수준으로 올려놓고 있다. 이것은 자기에게 복음을 증거 해준 그들이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 복음을 전파하는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다3).
지금까지 여러 신학자들이 Calvin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성경을 연구해서 해석했다면, 필자와 같은 보잘것없는 이런 글을 기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끝으로 성령께서 성경으로 확신을 준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한 말인가?
이방에서 온 유대인들이 보기에 술에 취한 사람처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사도들과 120문도들을 ’갈릴리 사람‘이라고 보는 기준은 무엇인가? 사도들에게 ‘갈릴리 사람’으로서의 흔적이 무엇인가? 그들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특별한 표징을 갖는 것을 이방에서 온 유대인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들의 복장일까?
아니면 그들의 생김새가 다른 지역 사람과 다른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징표를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갈릴리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한 그들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특별한 명패를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이 구사하는 ‘갈릴리 사투리’가 있었고,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한 삼 개월 전에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사렛 예수의 제자들 이였다는 점에서 ‘갈릴리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라고 말하는 그들의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을 받은 주의 제자들이 지금 ‘갈릴리 사투리’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들이 ‘갈릴리 사투리’로 말하는 것 때문에 “이들이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12사도들은 대부분 ‘갈릴리 언어’로 말한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런데 이방에서 온 유대인들은 갈릴리 언어 외에 ‘다른 음성’을 또 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은 자기들의 난 곳 방언이었다(2:8). 자기들의 난 곳 방언은 갈릴리 사람들이 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 갈릴리 사투리를 말하고 있는데 이방인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말과 함께 역사 하시는 기이한 음성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다. 사도들을 자기들의 언어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과 귀에 역사 하셔서 그들의 언어로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이 음성은 확실히 성령의 음성이다. 누가는 이 사실은 누가가 에베소에서 직접 체험하였다.4) 또한 이미 세례를 받았던 동역 자들도 성령 강림의 현상을 분명히 목격했다. 그때 아볼로의 제자들에게서 방언을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음성은 사람의 음성과 성령의 음성이 동시에 들려온 것이다.
여기까지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것은 방언의 필요성이다. 방언은 확실히 언어 소통에 장애가 있는 곳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 하심이다. 인간의 언어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혼잡해져 서로간의 의사 소통이 어렵게 되었다5). 이와 같은 언어 장벽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해소할 수 없다. 더군다나 소통되지 않은 언어로서는 복음이 이방에 전파될 수 없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 장벽을 허무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사도들에게 성령께서 특별하게 역사 하셔서 사도들과 청자들간의 언어 장벽이 해소해 주셨고, 듣는 사람들이 분명한 한 음성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곧 방언이다. 그렇다면 이방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태어난 곳으로 듣는 말은 사도들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이었고, 이 음성은 사도들의 가슴에도 동시에 들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방언은 복음 전도 현장에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이는 조롱하여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2:13)”
이 말에도 해석이 분부하다. 어떤 사람은 “새 술에 취하였다”라고 조롱하는 자들의 한 말은 “문자대로 받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한다면 그들이 술에 취한 자들처럼 흔들거리는 의사표현을 하였다면 황홀경의 표현이 옳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이 단어의 역할 때문에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세례의 표징은 술에 취한 것과 같은 표징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오해가 있었기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일에 있어서도 오류에 휘말려, 편견과 잘못된 교리를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성령께서 방언을 하게 하실 때는 특별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하였다. 특별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그 상황에 요구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역사 하셨으며, 다시 말한다면 제자들이 증거한 내용을 이해하는 유대인들에게도 동시에 역사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사도들의 “말을 받는 사람들만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이를 분명히 뒷받침하고 있다6). 그렇다면 새 술에 취하였다고 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바로 그 관점을 우리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 관점은 바로 횡설수설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한다면 술에 취해서 기뻐서 뛰거나 떠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 무질서한 모습, 혼란스러운 모습, 또 기뻐서 떠드는 것으로 보였다고 말하는 것은 곧 불신자들의 관점이다. Calvin은 그의 주석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눈으로 목격하고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해석하였다. 베드로의 해석에 의한다면 이는 영적인 기쁨이 충만한 상태를 대답한 것으로 보아 사도들은 기쁨이 충만한 상태7)에 있었던 것을 새 술에 취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을 악용하여 방언이란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순절의 주장이 얼마나 비 성경적인 주장인가를 곧 진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새 술에 취한 모습이 신앙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완전히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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