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연구

고린도서의 방언

생명있는 신앙 2006. 7. 19. 11:29
 

7. 고린도서 방언


1) 고린도 교회의 방언문제


앞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동안 성령 세례에 관한 사실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두고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가 고린도에 보낸 두 번째 서신인 고린도 전서에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문제가 언급되고 있다. 특히 방언에 관한 내용이 큰 문제로 등장하여 이를 언급하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당면한 문제들을 차례로 지적하면서 7번째에 대한 답변으로 방언에 관한 문제를12:10,30; 13:1,8; 14:2,4,5,6,13,14, 18,22,23,26,27,39,에서 언급하게 된다.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은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이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오기 전에 일정한 리더자가 없이 흩어져 있다가 바울에 의해서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바울의 일년 반 동안 사역으로 많은 성도들을 모아 교회를 든든하게 새운 바울은 새로운 전도지를 찾아 고린도를 떠나게 되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후임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울 사람을 세워두지 않고 떠났다는 것은 전혀 납득할 수 없다. 누군가 교회를 인도할 적격자를 세워두고 떠났을 것이다.

사단은 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의 후임으로 책임을 맡아 선택된 사람은 바울과 같이 능력 있는 지식을 겸비하지 못해서 교회를 온전히 유지해 나아가지 못했다. 사단은 이것을 이용하여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파당을 나누게 했다. 일부 교회의 회원들이 각자 자기의 주장을 내세웠고 결국은 여러 가지 이해 문제가 엇갈리게 어 결국은 의견이 대립하면서 그들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심각할 만한 문제까지 거론하다가 파당을 나누고 만 것이다. 그 가운데 교회 안에서 방언을 말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다고 뽐내거나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F. F. Bruce가 말하는 데로 이방인의 종교적 주술행위를 빌려와서 방언을 말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들의 은사 행위는 교회에 심각한 와해를 자초하고 분란을 가중한 것이 분명하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뒤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바울을 공격하는 모함 소리를 들었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게 다른 사도들과 다른 모습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은사 문제였으며 이 부분에 있어서 다른 사도들과 약간 상이한 부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판단하기를 바울은 지식적인 면에서 월등해서 구약을 해석하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가르치는데 열심인 반면, 이적과 기적으로 나타난 표적이 극히 적었던 점이 다른 사도들과 현저하게 다른 점이었다. 다른 사도들의 모습은 이적과 기적을 행하고 방언을 하는 등 놀라운 역사가 자주 나타났다. 그 중에 가장 관심을 가진 사건이 약 20년 전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몇 사람들 가운데 일부의 주장은 바울의 사도권을 결정적으로 타격을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당시 그들이 오순절 다락방에서 사도들에게 나타난 이적과 기적이 동반되는 것을 기억했다. 그 첫 열매로 방언을 하는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고린도인들에게 있어서 방언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은사 문제의 서두에 언급한 “12:1-3의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자.

바울은 고린도인들의 영적 은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져 한쪽은 바울파, 그리스도파, 게바파, 또 한쪽은 아볼로파로 나뉘어져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심한 어조로 비난하고 책망하는 글을 보냈다. 이 서신은 고린도 전서이다. 고린도 교회의 베드로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베드로가 오순절 이후 큰 능력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파한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게 들었다.1)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으면서 오순절 다락방에서 있었던 베드로와 비교해 보았을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특히 성령 강림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 또는 이적으로 병자를 고치는 일들은 이미 여러 고회에서 있었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으나, 바울이 오순절 다락방에서 나타난 성령강림의 사건과 전혀 무관한 사람이라는 것 등을 비교한 것이다. 만약 고린도 교회에서 성령 강림에 관한 사건들이 일어났다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았고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누가가 그 중요한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누가의 기록을 영감하시는 성령께서도 반드시 기록에 포함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하지만 누가는 그 기록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울에게서 베드로와 같은 성령 강림의 역사가 고린도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에게는 성령강림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성령의 충만한 은사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 충만한 능력에 의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임을 증거 했고, 여러 이적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났을 것은 당연하다.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에게 약점은 성령 강림의 역사와 같은 사도로서의 결정적인 능력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령 은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은사문제를 비중 있게 다룬다.

고전 12: 1-3 Περϊ δέ των πευματικων, άδελφοϊ, ου θέλω υμας  άγνοεϊν.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은 고린도 교인들이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 알도록 말하는 의미일까? 아니면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지 않으므로 오해하고 있는 것을 이제 새롭게 말하려는 의도일까? 일반적으로 이해하기는 고린도 교회의 은사 충만 주장은 교회를 세우던 그때에 자세히 가르쳐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변질되어 무질서하게 되었기 때문에 서신에 언급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들을 보게된다.

그러나 바울의 글은 전혀 그렇게 증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분명히 언급한 바와 같이 내가 너희 가운데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도만을 위해서 일했다고 하고(고린도 전서 1:22-23),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해서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 διό γνωςίζω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이제 알려 주겠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서 방언과 은사 그리고 온갖 이적과 기적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파했고 교회를 세웠다면, 그가 보낸 다른 서신에서 발견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바와 같이2)”이라고 하는 것처럼 자신이 전에 언급했던 것을 기억하기를 원하는 문구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어야 하지만 바울은 이런 경험을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고린도 서신 가운데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말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으로 바울은 “이방인으로 있을 때의 일을 기억하라”라고 언급한다. 이것은 고린도인들이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는 온갖 종교성에 빠져 있었다. 누구든지 종교가 없는 사람은 없었다. 그 종교들은 지식이 없었고 또한 온전한 교리도 없었으며, 구원의 확실한 지식도 없는 말 그대로 우상에 이끌려간 상태였다. 우리는 이와 같은 우상 숭배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우상이란 본래 어떤 지식을 근거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지식도 없이 단순히 권위에 억눌린 숭배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같지 않다. 또한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2절과 3절의 말은 신령한 것을 언급하기 위한 서론이다. 이 말에 의한다면 신령한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식에 근거한 은사의 종류에 대해서 말하려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또 한가지는 바울을 비난하고 있는 다른 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에게 은사에 대한 가르침을 듣지 않았던 것 때문에 바울의 사도권과 그의 선생임을 거부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더 능력 있는 사람의 제자가 되어 유명세를 등에 업고 존경을 받으려하는 사람들의 욕구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

그러므로 바울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는 고린도에 있을 때 은사와 성령 세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새롭게 언급한다는 바울의 의도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거나 은사에 관한 논쟁이 없었는데 바울이 언급했다고 하는 것은 불 속에다 기름을 붙는 격이다. 그들에게 이미 여러 가지 면에서 바울의 사도권이 도전 받고 있는 마당에 은사문제까지 언급하여 자신을 더욱 불신하는 쪽으로 몰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에 언급한 은사의 문제는 바울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게 그들 가운데 스스로 나타난 현상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은사를 강력히 행하여 자랑하려했던 사람이나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 이였을까?

앞에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이미 오순절 때에 성령 강림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보나마나 베드로파나 그리스도파에 해당한 사람들이었다. 베드로파와 그리스도파에 속한다고 자랑하던 사람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들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와서 교회를 소란스럽게한 말들을 듣고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의심하고 그들의 신앙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공공연히 방언으로 말하고 은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진실한 내용보다는 은사를 더욱 강조하는 신비적 경향과 이적과 기적을 복음보다 과장되게 추종하려는 주장이 강해졌다. 결국 그들은 신앙보다는 신령하다는 은사주의자들의 영향으로 물들여지기 시작했다. 바울이 고린도 전서 2:2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말한 의미는 은사 문제로 골치아픈 고린도인들에게 깊은 의미를 더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점을 발견한다.

지금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방언 문제에 관한 논란을 잠재울 만한 해답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바울이 경험한 방언을 살펴보는 것이다.

바울은 어디에서 방언을 경험하였으며, 그가 알고 있는 방언의 개념이 무엇인지 살펴 보는 것이다.

우리도 바울이 가진 경험으로 고린도서를 이해한다면 결코 방언에 관하여 오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는 3곳에서 방언의 나타난 현상을 언급하고 있다.

먼저는 오순절 다락방에에서의 방언(행전 2:1~8), 두번째는 행전 10:44~46 이하 고넬료 집에서의 방언, 세번째는 행전 19:6에서 바울에 의해 아볼로 제자들에게 임한 방언 사건이고, 이 세 사건은 공통적으로 성령이 강림하셨다는 표현과 함께 방언을 언급한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성령강림과 방언에 관하여 바울이 경험한 것과 오순절, 그리고 베드로와 고넬료의 집에서의 성령강림사건, 그리고 바울에게서 나타난 성령강림 사건을 연결하여 기록하므로 바울에 관한 변호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당시 누가는 제 3차 바울의 전도 여행을 따라 아시아에 있다가 마게도내지방을 거쳐 아가야 지방을 돌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바울은구속되고 자기는 안디옥으로 돌아가 있던 때이다.

이때 바울이 전도 여행으로 든든하게 세웠던 아시아 지역의 여러교회들이 율법주의파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점령해가고 있던 때이다.    

여기에서 만약 바울이 성령강림과 방언에 관하여 경험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방언을 말했다면 고린도서의 방언에 관하여 어떻게 해석을 해야할지 많이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대부분 한국에서 퍼지고 있는 방언주의자들이 바울에 관하여 전혀 이해하지 않고 자기 인식개념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에 빠진 것을 볼수 있다. 한 마디로 바울이 인식하고 있는 방언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필자는 앞에서 이미 사도행전의 방언에 관해 언급하면서 사도행전 19장 6절에서 아볼로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에 성령이 강림하시고 그들이 방언을 말하는 역사의 현장을 말했다. 

이때 바울에게 있어서 사도행전 18장 22에 따르면 바울이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지방을 다녀 에베소에 당도했고 그곳에서 아볼로의 제자들을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성령세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안수하며 기도할 때 성령이 강림하였고, 이때 강림한 성령은 오순절 다락, 고넬료의 집에서의 역사와 동일한 사건으로 사도행전 저자는 기록하고 있지만 바울은 자기로 부터 나타난 성령강림의 사건이 이전에 오순절에서 이어지는 역사선상에 나타난 사건과 일치하다는 생각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앞에서 사도행전의 기록자가 철저한 증거와 확인을 거쳐 분명한 사실만을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순절 다락, 고넬료집에서의 방언, 에베소에서의 바울에 의해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동일한 성령의 역사라고 증거한 것은 성령의 인정하심이 분명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런 사실에서 볼 때 바울에게 인식된 성령강림에 의한 방언의 개념은 사도행전 19장 6절에서 분명히 나타난 것으로 확인할 수 있고 바울은 이곳에서 나타난 방언을 성령의 방언으로 인식된 “바울의 방언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에 의해 확실히 증거한 성령의 증거에 따라 오순절 다락과 베드로 사도에 의해 나타난 고넬료 집에서의 방언과 에베소에서의 방언은 동일한 성령의 역사로서 동일 개념의 방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성경은 바울이 고린도서신을 기록 할 때는 에베소에서의 성령강림으로 인한 방언을 경험한 이후에 기록한 것으로 볼 때 고린도인들에게 나타난 방언과 일치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방언은 사도행전 19:6절에서 나타난 아볼로 제자들에게 보여줬던 방언이 바울에게 나타난 개념이다. 이 방언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에 의해 오순절 다락방과 베드로에 의해서 나타난 고넬료집에서의 방언, 그리고 바울에게서 나타난 방언을 연결하여 기록함에 있어서 바울의 사도권을 주장하는 의도를 가지고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고 이 주장에 의해 사도행전의 방언은 일치한 성령의 역사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자연스럼게 바울의 방언에 관하여 인식하고 있는 개념이 사도행전 19장 6절의 방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에서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서에 기록한 방언이 같지 않다는 주장은 옳지 않은 것이다. 바울의 기록에 의하면 사도행전에 나타나지 않은 방언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이 나타나고 있어서 이를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말이 될 수 있으나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자기의 인식 개념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바울의 방언 개념을 인식하고 다음으로 바울이 생각하는 개념으로 고린도서의 방언을 이해하여야 한다.

 

2) 고린도 교회와 이방 종교와의 관계


F. F. Burce 박사는 말하기를 방언이 본래 기독교에만 고유한 요소는 아니라고 한다. 델피의 아폴로 신전의 여 예언자의 말과 디오니소스 숭배자들의 열렬한 기원을 통해 오랫동안 체험을 해왔다. 따라서 바울은 성령의 임재와 활동을 입증해 주는 것은 “언어 현상이나 또는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실질적인 내용이라고 주장했다”했다. 그렇다면 고린도인들이 과연 이방 종교적 습관들 중 하나인 방언 현상을 기독교 안에 가지고 들어왔는가? 고린도인들에게 방언의 문제로 논란이 벌어진 것이 이방 종교적인 습관과 관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점에 대해서는 Bruce박사의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고린도에 있는 형제들은 상당수가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한 사람들로 구성되었거나 사도들에게 이적과 표적을 목격하였던 사람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2:10) 그들이 방언을 이미 경험했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방언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베드로나 아니면 오순절 다락방에서 세례를 받았던 사람, 브리스길라과 아굴라와 함께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어 로마에서 글라우디오 황제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당했던 사람,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어 아시아나 유대 지역에서 올라온 사람, 다시 말하자면 바울에게 세례를 받지 아니하고 이미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 그들 가운데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만한 사람들은 이미 오순절 성령 강림의 시기에 방언을 경험하고 알고 있는데 방언은 이들에 의해 얼마든지 판단을 받지 않겠는가? 만약 베드로파에 속한 사람들이 볼 때 다른 이방인의 습성을 가진 온전하지 않은 방언으로 성령 강림의 은사를 주장하려 한다면 당연히 멸시를 받고 교회에서 배척을 받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방언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방언을 했다면 반드시 오순절에서 보았던 것을 흉내 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 언급 문제는 성령 강림 문제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방인들의 습성(주문이나, 종교적인 언어)이 교회 안으로 들어 왔다는 Bruce박사의 주장은 쉽사리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 된다.

고린도 전서를 살펴보면 교회의 분열에 관한 문제(1:10-4:21)는 이방인과 전혀 관계없는 유대인에 관한 문제이고, 무시된 윤리문제(5:1- 6:20)는, 이방인들의 습관적인 행동들이다. 결혼에 관한 문제(7:1-7:40)는 성적 방종에 관한 문제로 고린도 지역의 특수한 지역성과 이방종교에서 왔으며,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너무도 안일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음행의 문제는 결혼의 문제와는 다른 주제이지만 간음이라는 문란한 성적인 관계를 말함에 있어서 이방인의 방종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방인의 습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 문제(8:1-11:1) 문제는 더욱 그렇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유일신을 말했으며, 또 말하고 있다. 이 세상에는 어떤 신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 시요.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들에게 경배하고 예배하던 제물을 도시에 내놓고 판매한다는 것은 실지로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들어왔을 때 유대인의 개념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였다. 엄격히 말하자면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는 이방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유대적인 문제였다. 공중 예배에 있어서 여자가 머리를 가리는 문제(11:2-16)는 곧 우상인 아프로디테 신전을 가지고 있는 여 선지자와 관계한 고린도의 특수한 관계가 있었다. 올바른 성만찬에 관한 문제(11:17-34)는 위의 문제들로 말미암아 결과된 사랑이 없는 교회의 모습을 드러냄으로 교회의 결과적인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방과 관계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영적 은사에 관한 문제(12:1-14:40)는 바울과 관계된 사도권과 연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근거에 의해 당시 고린도의 종교적 상황에 의해 판단하고 비교하여 이방인의 습성과 관계를 가진 문제로 보는 분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분이 Bruce박사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린도의 아프로티데 신전의 여 승려들은 신전에서나 혹은 그들의 기도 생활에 독특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것은 그 시대의 모든 종교에서 나타난 보편적인 의식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 같은 이방인들의 모든 행위를 철저하게 경계하도록 가르쳤고 유일신을 가르쳤기 때문에 주문을 읽고 외우는 이방종교 의식이 교회 안에 침투해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다고 말하는 것은 바울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사상과 철저하게 위배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5:1-58도 부활과 바울의 사도권에 관한 문제였다. 이점으로 보아 영적 은사와 바울의 사도권이 고린도 교회 안에 얼마나 혼란한 상태에 빠져있는지 곧 알 수 있다.

고린도에도 어느 다른 도시에서와 같이 사도들이 걱정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1). 그들은 “사도들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행 15:24)”라고 말한바와 같이 자기들의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해석한 자칭 그리스도인들에 해당한 사람들이다. 아마도 이들은2) 이미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들은 사도행전 2장에서 분명히 언급된3) 로마에서 온 다수의 사람들이 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로마에서 태어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들은 고린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통어인 헬라어보다는 부모로부터 배웠거나 아니면 회당에서만 사용되는 서투른 히브리어나 아니면 어려서부터 듣고 배우며 익혀서 대화하는 유창한 헬라어를 구사했다. 그런 이들에게 헬라어를 통해서 말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교회 안에서는 자기들끼리 통용하는 히브리 언어를 구사했을 것이다.

고린도는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상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여기에 바울의 전도로 교회를 형성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언어를 구사하면서 서로간에 교제를 하였는가? 그들 중에는 특별히 헬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모여든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각기 지역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이들 가운데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를 주관적으로 표현하려는 욕구를 가진 베드로파 사람들은 갈릴리 사투리나 히브리어 언어를 사용해서 성령은 자기들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셨다고 가장하려 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의 방언 문제를 이방의 종교 문제와 연관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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