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바울의 방언과 누가의 방언
앞에서 언급하였기 때문에 간략하게 하려고 한다. 고린도 전서 나타난 바울의 방언은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변증 구절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누가는 방언을 신비적인 언어이며 언어의 장벽을 해소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임을 분명히 언급하였다. 그리고 누가는 사도행전 19장에 나타난 에베소에서 경험한 방언을 직접 목격했다. 고린도 전서의 방언을 언급한 바울로부터 역사한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은 아볼로 제자들에게 임한 방언을 목격했다. 그런데 만약 바울이 고린도에서도 방언 은사가 나타나는 성령 세례의 안수를 행했고, 그 사건을 목격한 두 사람의 의견에 차이가 있다면 누가는 큰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의 실수만 아니라 구속사를 집행하시는 성령의 실수라고 말해야한다. 만약 이와 같은 큰 실수를 성령께서 실수가 없는 것처럼 성경에 기록하도록 영감하였다면, 누가 성경을 진리라고 받아들일 것인가?
누가는 에베소에서 성령 강림이 있기 전까지 어떠한 성령 강림에 관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또한 누가는 고린도가 방언문제로 휩싸여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바울의 3차 전도 여행기간에 있었던 일이고 누가가 바울을 동역하고 있을 때 이 문제에 대해서 함께 탄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대해서(고린도교회의 시끄러운 상황에 대해서) 사도행전에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 바울이 고린도의 전도 여행을 하는 동안 성령 강림과 방언이 없었다. 2) 또 나중에 문제가 된 고린도의 방언은 에베소, 고넬료의 집, 오순절 다락방에서의 방언과 일치하지 않았다. 이 둘 중에 한가지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언급한 고린도의 방언은 무엇인가?
이것은 너무도 분명하게 누가가 살펴보기에도 어처구니없는 현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고린도의 방언을 언급하지 않았다. 필자는 누가가 베드로에게 나타난 방언과 바울에게 나타난 방언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조사 능력을 인정한다. 그에게는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고 있었다. 또 우리의 신앙은 그의 기록한 내용,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누가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주관적 체험을 신뢰해야 한다. 하지만 성경은 주관적인 체험을 참된 기독교의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린도의 주관적 체험을 누가는 철저하게 부숴 버리는 것과 같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방언의 역사의 기적을 보았다. 물론 그는 사도들에게 나타난 예루살렘에서의 방언의 역사를 목격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에베소 이전까지 바울에게는 성령 강림과 같은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사도들에게만 나타나는 특별한 역사가 없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그 놀라운 역사가 나타남으로 바울의 사도성이 더욱 견고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