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연구

결론

생명있는 신앙 2006. 7. 19. 11:33
 

11. 결론 


먼저 필자는 본 내용을 연구함에 있어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올바른 방법 제시한다. 그것은 어느 누구나 성경이 확실히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성경 안에 충분한 증거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언어 유희를 즐기는 어떤 사람들과 같이 단어의 내용을 연구하여 단어의 의미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본래 성경의 의도와 벗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1).

방언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많은 신자들이 성령역사의 주관적체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깊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입장에서 명쾌한 방향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교회에 혼란을 가중해 왔고, 교회를 신비주의적인 현상으로 몰고 가 주관적인 체험 신앙을 성경적이라고 까지 말하여 기독교를 세속의 한 종교 형태로 둔갑 시켜버렸다.

확실히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 강림과 방언은 누가의 기록 의도에 아주 중요한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런 중심의 역할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난 에베소에서의 방언은 더욱 누가의 의도에 무게를 실었다. 그러므로 이런 의도를 배제하거나 혹은 문법적인 의미에 치우쳐 단어의 뜻을 고집하여 해석하려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 가운데 나타나는 두 가지의 중대한 실수를 기억하게 한다. 첫째로는 선지자 제도가 도입되어야 하는 신명기 18:15이하에서의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와 “우리에게 왕을 주십시오”라고 고집을 피우는 삼상 8:19에서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하리라”하는 장면이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만 하시는 일을 사람에게 일임해 달라고 고집을 부려 하나님의 권위가 약해지게 했다. 이런 실수가 신약의 교회에 와서 다시 재연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과 교통하려 한다. 자기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면서 하나님의 언어나 천상의 언어로 하나님과 직접 교통을 한답시고 성경과 전혀 다른 말을 한다.


성령께서는 지금 “누가의 말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주관적인 체험을 믿을 것인가?” 라고 질문하신다. 이제 우리는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해야 할 때가 이르렀다. 전도자 누가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사를 속되게 취급하고(방언의 신비함을 주관적인 체험에서 나오는 저급한 것으로 만들고), 결국은 성경 곧 누가의 가르침을 신뢰하지 않겠다는 도전이다. 어떤 사람들이 그럴지라도 이제 우리는 누가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지난날 오류에 빠졌던 실수로부터 벗어나자. 그러기 위해서 우리 다 함께 영적 부흥의 대 현장인 학사 에스라의 설교를 들으려 모이자. 그리고 낮 사분지 일은 성경을 읽고 낮 사분지 일은 기도하면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하고 회개하자. 신학자도 회개하고, 목사도 회개하고, 장로도 회개하고, 집사도 회개하고, 성도도 회개하자, 자신의 마음을 찢고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모습을 보고 울며 울자. 지금까지 우리의 입술로 행했던 온갖 더러운 위선으로 말미암은 허황된 행위를 위에서 내려오는 불같은 성령으로 태우고 인격적이며 진실함 속에서 뜨거운 믿음을 소유하자. 알아듣지 못하던 방언이라고 생각했던 말을 할 때 보다 더 하나님의 진실함을 체험하도록 하자.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 곧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에서는 방언, 이것은 교회에서 배타하고 터부시 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보편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이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확실히 말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한다. 또한 방언이 비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확실히 판단해주고 현대 교회가 오류에 빠져있음을 확실히 밝혀야 하지만 이를 외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결국 우리는 죄를 보고도 못 본체 하는 소경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방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방언은 분명히 주어지고 있다. 그것이 누구에게도 이해될수 있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하여지고 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증거임을 드러내 주시기 때문에 오늘도 분명히 주어지고 있다. 아마도 필자가 이를 간절히 원할 때 주님께서는 주실 것이다(요 14:14). 또 확신하고 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운데 게시고 성령을 한없이 보내시기 때문이다. 그 보내시는 성령은 이미 우리가운데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보혜사가 되시고 우리의 보증이 되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원하시는 자를 보실때마다 우리에게 역사하신다. 이때에 방언은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방언은 그야말로 方言이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무지함을 허물치 마시고 회개의 영을 부으셔서 내 속에 새로운 영을 창조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소서” 아멘.


사도행전 11:15의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우리에게 처음 임하신 것 같이 하는지라”는 제오순절 성령 강림의 계속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중심 사상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따라 지금도 성령이 강림한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다.

사도행전 11:15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계속되는 성령 강림의 역사’를 증거 하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이것은 성경이며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도 베드로의 말이기 때문에 이 말씀에 아무도 부정하거나 거부할 이유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계속적으로 강림할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역사하시고 강림 하신다는 연속성에 대해서 아무도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혹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이 시대에는 성령께서 강림하시지 않는다고 부정한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믿지 않은 사람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경 사용법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 성경 사용에 있어서 중대한 오류는, 조직적이며, 어떤 가설이나 신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러 구절들을 증거로 논증하려는 고집에서 온다. 행 11:15도 성령께서 계속 강림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학을 대변하는 말씀임을 굳게 붇잡고 있으며, 자기가 주장하는 결정적인 말씀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아무도 이를 부정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려는 것이다. 어떤 신학이든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진리에 대한 대변자로써 사용된다면 성경이라는 독특한 윤리와 규칙을 발견할 수 없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가 다른 한 쪽에서는 다르게 말씀하실 수 있는 여러 가지의 말씀이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양면성이라고 한다. 이런 양면성은 성경의 독자성을 완전히 파괴함으로 절대적인 표준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어 이것도 저것도 옳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 성경에서 다른 종교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다종교의 배척은 커다란 범죄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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