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연구

마가복음의 방언

생명있는 신앙 2006. 7. 19. 11:31
 

10. 마가복음의 방언

필자는 여기에서 마가의 언급한 방언을 언급하려고 한다. 마가의 서신은 베드로와 관계가 있고 신약 성경 가운데 유일하게 마가가 방언에 관해서 언급한다. 마가복음 7:33, 35에서 나타나는 방언과 동일한 단어 γλώσσης αύτοΰ 는 혀로 번역되고, 16:17에서는 방언으로 번역되고 있다. 전자는 7:33, 35는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실 때 모습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침 뱉아 그 혀(γλώσσης αύτοΰ)에 대시며’라고 말 할 때 사용하였고, 35절에서 ‘혀의 맺힌 것이 풀려’라고 말 할 때 ‘혀’를 γλώσσης 라고 사용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방언’의 의미를 갖는 16:17의 내용은 그 진본 여부 때문에 연구의 가치에 대해서 관심이 된다. 만약에 16:9이하 내용이 진본이 아니고 다른 어떤 사람이 첨가한 것이라면, 마가를 중심으로 연구 자체가 무의미 할 것이다. 그리고 마가에게서 얻어낸 연구의 결론에도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가치가 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성령 세례에 관해서 언급한 많은 학자들이 자신들을 만족시킬만한 자료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마가의 방언에 관한 언급을 소홀히 여기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지나치게 사도행전이나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방언에 몰두하다가 마가복음16:17에서의 방언이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막 16:9-20에 나타난 방언에 관한 언급이 성경 전체 방언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왜 방언에 관한 연구 중에 마가복음의 16:17의 내용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것은 마가가 언급하는 방언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방언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방언에 관한 많은 논쟁들 중에 마가의 방언에 관한 언급을 얼마나 소홀히 다루고 있는지 다른 전문 Aticle들 중에서 발견했다. 그러므로 여러 연구서들에서는 마땅히 취급해야 할  ‘계시’에 대한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2:4 이하에서 성령 강림과 함께 나타난 방언은 언제, 어느 때, 어떤 방법으로 사도들에게 약속되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제기에서 온 것이다.

어느 누구든지 성경의 증거들은 약속에 의해서 나타나고 또 약속에 의해서 성취된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렇다면 방언이 언제 어느 때 누구에게 약속되었는지 분명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신학자들은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서 자료가 되는 안내서들을 뒤적거리게 되면 마 16:9-20은 [  ]의 부표로 따로 기록된 성경들을 보게 된다. 그 다음 이 부표 안에 있는 내용들은 각주로 설명하기를 “본문은 마가가 기록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참고 (역본이나 사본)문헌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자료들의 출처로 말미암아 본문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성경을 성경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  ]안에 기록된 내용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해석해야 하느냐, 아니면 인정하지 않고 해석해야 하느냐라는 중대한 물음이 제기된 것이다. 이것은 가나안을 행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경고인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모세는 “너희가 여호와를 전심으로 따르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실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여호와의 시험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한다. 계속해서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를 그 말대로 이룰 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명기 13:1-3)” 이것은 이스라엘이 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시험하신다는 말씀이시다.

마가복음 16:9절 이하도 역시, 오늘날 우리에게 ‘본문이 믿음의 대상이냐, 아니냐’라고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의적으로 시험하시지 않으셨으나, 성경의 진본을 찾아 나선 어떤 사람들의 연구의 결과로 시험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16:9-20이 마가의 글이 아닐 수도 있다는 내용들이 우리에게 밝혀지지 않고 그대로 성경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뜻밖에도 본문이 본ㄹ해의 성경과는 전혀 관계없는 글일 수도 있나고 주장하는 말들이 사실로 받아들여지자 우리까지도 본문에 대해서 깊은 연민을 두지 못하고 읽게 되거나 그냥 지나치게 된다. 이러므로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근거를 찾아 나섰다가 결국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피해를 주고 있는 샘이다.

하지만 본문은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방언 문제를 성경 신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필자는 강조한다. 방언을 계시의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위치에 두고 연구를 하려면, 본문이 어떻게 방언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밝혀내야 하겠다. 그러므로 본 연구가 편견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우선 진본 여부와 관계가 있는 두 입장1)을 살펴보도록 하고, 진본 여부가 방언의 연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우선 살펴보려고 한다.

 

1) 16:8-20은 마가의 기록이 아니다.


본문이 마가복음의 진본이 아닐 경우 연구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고 묻는다면 필자는 그 질문자에게 “성경으로서의 그 자체가 내포하는 불완전성을 어떻게 채우려고 하느냐?”라는 질문을 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마가복음 16:9-20이 성경으로서의 어떤 중요성을 분명히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삽입되었든지 그 자리에 편집하셨다. 이제와서 본문이 타인에 의해서 삽입되었던 편집된 자료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재외하자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본문이 다른 편집자에 의해서 삽입되었다고 할지라도 저자의 사고와 깊은 관계가 있는 삽입자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삽입했고, 삽입자는 저자와 깊은 관계를 가졌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서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약속이며 계시의 중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자세가 기본적으로 성경을 대하는 자세이다.

그런데 ‘본문이 마가의 기록이 아니다’고 말 할 경우 ‘본문을 연구해야 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라는 극단적인 선택의 귀로에 놓인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연구에 몰두하여 그 의도를 분명히 밝히려는 자세를 가지게된다. 연구할 가치가 없다거나, 본문을 소홀히 여기는 배타적인 견해들은 곧 마가복음의 방언이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나타난 방언에 관한 근거를 단절하는 샘이 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방언은 그 약속의 근거가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누가복음의 3:21-22는 계시사에서 언약적 의미를 가지기보다는 성취와 관계 있는 성령 세례를 의미하고 있고, 베드로가 증거로든 요엘서의 언급은 유대인이라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방언에 관한 약속의 근거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두 성경(고린도 전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은 요엘서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필자는 앞에서 사도 베드로가 어떻게 요엘서를 언급하게 되었는지 설명한바와 같이 베드로나 성령께서 사도행전 1:8의 예언을 유대인들에게 근거로 받아들이도록 납득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인식으로 예수가 사십일 동안이나 제자들과 함께있었다는 부활 이후의 사건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어야 하지만,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무덤에서 시체를 훔쳐 갔다고 믿고 있었거나, 예수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지어 ‘자칭 하나님이라는’ 신성 모독 죄로 사형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인식을 전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무식한 사람들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누구라도 예수님의 예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필자는 그가 [성령은 인격적]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을 경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는 성령은 자기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먼저 원하시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셔서 마을의 문을 열고, 믿음에 합당한 지식을 받아들이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복음은 반드시 전하는 자들에 의해서 믿음이 그의 마음에 들어오도록 역사 하신다는 것과 같다. 만약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는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복음 전도도, 오직 성령께서 역사 하시므로 우리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나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서 아무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아직 성령 강림을 구약적인 배경에서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대, 성령께서는 강권적으로 역사 하셔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근거를 들어 믿도록 하였다는 생각은 성령 자체를 모독하는 처사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근접할 수 있는 근거들은 곧 요엘서를 근거하도록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역사 하셨고, 선지자에게 약속하신 요엘의 말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이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의미와 같은 내용임을 베드로가 인용한 것이다.

사도행전에서의 방언은 성령 강림 이후 특별한 역사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다. 성경 신학은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특별하게 역사 하시므로 사도들이 방언으로 말하게 된 것을 방언에 관한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사건은 반드시 약속을 근거로 하고 있다. 구속사에 나타난 모든 구속의 역사는 반드시 약속에 근거하고 구속의 성취는 약속의 성취를 의미한다. 일례로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은 구약에 충분히 나타나 있고1), 사도행전 2장 4절 이하의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은 1장 8절에서 주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알 것이다. 물론 이 약속에 대한 것은 주께서 약속하기 이전에 에스겔서 36:27; 이사야 32:15; 44:3; 말라기 2:28;등에서 충분히 예언된 것을 주께서 더욱 확신케 하셨다는 것을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방언은 약속의 근거를 어디에 둘 것인가? 구약에서도 방언에 관한 약속들이 나타나 있다. 또한 신학자들은 이 약속의 증거들을 행 2:4의 근거라고 확실한 듯이 말하고 있다. 일부 신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그 약속이 확실한 방언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비록 사울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하여 예언한 예2)나 민수기 11:25-26에서 모세를 도울 백성의 지도자들이 성령에 의해서 예언한 사건 등을 비교한다해도 확실히 방언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사도들이 근거로 제시하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근거가 희박하다는 확신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사도들이나 복음 증거 자들에게 구약의 약속들로 방언을 근거로 들게 하시지 않고 복음서를 통해서 언급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면 성령 강림 이후 나타난 방언이 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어야 하는가? 필자가 성령 세례3)에 관해서 언급할 때 그들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의 역사가 반드시 근거를 가진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라고 말하려면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분명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약속에 근거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사라에게 아들을 주신다.

사라가 낳은 아들은 약속의 아들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서 아들을 낳을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들 사이에서는 아들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아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계시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시고 그들에게 약속대로 주신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의 모든 일을 행하실 때 반드시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서 이루시고 성취해 가신다. 성령 강림과 방언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일을 사도들이나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4)이 있었고 그 뜻은 그 약속의 근거로 해서 나타나 새로운 계시를 성취하실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이전에서는 마가복음 16:15-18,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확실한 언급이 발견되지 않는다. 본문이 마가가 기록하지 않고 후대에 어떤 사람이 성경 안에 삽입되었든지, 그가 독특한 의도로 본문을 삽입하려는 의도를 가졌든지 본문은 반드시 성경에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성령께서 삽입한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성경으로 삽입하지 않을 때에는 성경 자체 내에서 세 가지의 문제를 가져온다. 1)계시의 객관성에 대해서 문제이다5). 2) 사도들의 방언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다.  3) 방언이 성경적으로 아주 불확실하게 표시되고 있다. 는 점을 들 수 있다.

제자들은 성령 강림과 방언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임을 분명히 한다. 만약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시지 않았던 그 어떤 사건이 그들에게 나타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그 사건을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또한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그들에게 나타났다면 유대인들의 비난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그렇게 되면 사도들은 그들의 임무를 온전히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한 능력을 받았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 외에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역사임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마가복음 16:9-20은 성경의 진본 여부를 가리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본문이 마가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을 찾으려 나갔다가 찾지 못하고 주저앉아 지쳐있는 사람의 모습과 같다.

그러면 마가복음 16:9-20이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구속사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있는지 어떤 약속이 더 첨가되었는지 분석해 보도록 하자.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섯 내용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9-11의 부활하신 주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

둘째는 12-13에 누가복음에 기록하는 엠마오의 두제자와 부활하신 주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셋째는 열 한 제자와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의 이야기이다.

넷째는 복음전파와 성령으로 나타나는 은사에 관한 내용이다.

다섯째는 승천하시고 넷째에 말씀하신 증거가 나타나다라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본문은 증거와 약속을 포함하고 있는 본문이다.

(본문)

[예수께서 안식일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9-11)

그 후 저의 중 두 사람이 곁에 서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2-13)

그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14)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15-18)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두루 나가 전파 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 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니라(19-20)]

 

2) 본문 삽입의 의도


1) 삽입자는 마가복음의 전체를 읽고 끝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베드로의 사역에 대한 분명한 객관적인 확신을 배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은 마가의 독자들에게 아주 중요했으나, 가장 결정적인 다음에 있을 계시의 약속에 대해서는 불완전하게 끝맺고 있다. 고 생각한 것이다. 마가는 허둥지둥 글을 끝맺고 있다. 뭣인가 쫓기는 듯한 느낌과 그리고 긴박한 상황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받게된다.  결국 이 글 전체는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말하고 있지만 그 끝이 아주 불완전하여 저자의 의도를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끝까지 읽었을 때 너무 갑작스런 끝맺음에 대해서 누구든지 난감해지고 말 것이다.(16:8)

2) 삽입자는 로마인들 중에 몇몇이 예루살렘에서 세례를 받았던 자들도 있다. 그들은 베드로에 대해서 너무 잘 알 고 있다. 그런 베드로가 이방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삽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6:15)

3) 삽입자는 예수의 부활이 확실하지 않는 마가복음의 내용이 분명한 결론에 이끌기 위해서 반드시 부활을 확증할 필요가 있었다. (마 16:12-14)

4) 삽입자는 베드로의 설교에 정통한 사람이었고, 베드로의 설교 중에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이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사실을 말한 내용을 본 서신에 첨부해야 한다고 의식하였고, 제자들에게 나타난 초자연적인 역사들은 사도들의 개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심으로 나타난 것임을 확신케 해야 했다.(마 16:19-20)

 

3) 마가의 기록으로서의 본문


마가는 본문을 어떤 의도로 기록하였는가? 저자가 본문을 기록한 의도를 발견하려는 연구는 성경 신학이 언제나 관심을 가지는 내용이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뚜렷한 목적을 위해서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 의도를 밝혀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연구이다.

마가는 본문을 요약하면서 기록하는데, 그의 독자들 중에 상당수는 베드로를 직접 만났으며, 그 가운데 몇은 약 25년 전 예루살렘에서 오순절의 기적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을 말하려는 것보다는 예수가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16:9-20은 요약하여 결론을 맺어도 마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에는 충분했다. 왜냐하면 이미 독자들은 사도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와 그리고 사도들의 활동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고 사도에 의해서 충분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가의 의도는 요약된 내용을 약간이라고 상세하게 전달하고 싶었으나 워낙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인해 요약했다는 가정을 배제할 수 없다. 이중에 특히 15-18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빠뜨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이것은 이미 사도들은 이 약속이 성취되어 능력을 입히운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

누가가 본문의 자료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조사해 본 결과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이스라엘을 회복에 대한 물음에 답을 말씀하신 것으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내 증인이 되리라(행전 1:8)”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날 수동적인 현상을 중점 하여 기록한 점에 반하여, 베드로의 증거를 기록한 마가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이방전파에 중점을 두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라고 말함으로 제자들이 어떤 표적을 행할 것인지를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8과 마가복음 16:15:18의 약속은 같은 시간에 언급하신 주님의 말씀인데 증거자들은 일부분만을 기억하였다가 언급하게 되었고 기록한 사람들은 자기의 의도에 초점을 맟추어 기록하다보니까 약간 다른 내용처럼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가의 이 기록은 베드로의 언급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의 증거는 곧 베드로의 증거이다. 또한 누가의 기록은 사도 요한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의 기록은 요한의 증언이다. 이 기록의 배경에는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방언에 대해서 미리 언급하셔서 베드로에게 기억되게 하셨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강림하면 방언 현상이 나타날 것을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히 약속 받았다. 만약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 되심을 믿고 있었을지라도, 아직까지 체험하지 못한 신기한 현상을 경험하였고, 또한 약속 받지도 않은 현상이 자기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 사건이 구약에 근거한 것이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을까?1) 조직적이고 바리새적인 사람은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라고 비난하지 않겠는가? 실지로 그러지 않았는가?(사도행전 2:13).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라는 약속을 두 귀로 분명히 들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자신들에게 나타난 방언의 현상을 보고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약속한 것이 이것이구나”라고 받아들이고 기뻐하지 않았겠는가?

베드로는 그 사실을 마가가 듣는 곳에서 자주 언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사도행전과 고린도 전서 나타난 방언에 관한 약속이요, 그 근거가 되는 중요한 언약이다. 이 언약은 사도들에게 성취되었고 계시가 주관적으로 사도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다시 언급하자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을 주신 것이다. 성경 신학적으로 계시는 자신에게 임하여 나타났고, 이제 그 계시가 자신이 택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일만 남았다. 이 적용은 언약이 성취되는 것이고 구속이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적용에 대해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 해주시므로 당황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께서 언급한 바와 같은 믿는 자에게 해당한다는 분명한 객관적 계시의 표준이 되고, 이런 증거들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믿음의 근거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새 방언을 말하며”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나타날 일을 언급하고 있다. 사도들은 자기들에게 나타난 기적적인 일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이라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에게 성령 강림하신 일 또한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였다면, 그들에게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이 상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들에게 이와 같은 약속이 없었을 경우에 일어나는 현상은 그들은 그 방언의 현상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았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본들의 절대 다수가 본문에 삽입 되어있으나 몇 몇 사본들에서는 16:8에서 본문을 마감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2) 그럴지라도 분문이 마가의 기록일 경우이든지, 마가의 기록이 아닐지라도 본문이 가지고 있는 계시의 중요성에 대한 가치는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어떻게든지 본문이 성경에 포함되어 성도들의 귀에 읽히게 한 것이다.


기존의 성경 해석 방법은 본문이 자료의 진실성에 대해서 별다른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본문이 사도들에게 나타나 성령의 역사에 대한 중요성을 약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령께서 성경으로 본문을 이끌어 들인 것을 놀라운 역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마가는 그 기록을 베드로의 증언을 토대로 기록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사도행전의 내용과 약간 겹쳐져 있다. 그것은 마가가 베드로의 복음 선포 내용을 전적으로 기초하였기 때문이다. 성경 신학은 이 부분을 실수 없이 관찰하게 해준다. 마가복음 16장 14절과 15절 사이에는 많은 시간적인 거리를 내포하고 있다. 14절의 장면은 누가복음 24:36-43의 장면을, 요한복음 20:19이하에서 세번이나 나타나심을 언급한 그 어느 때이다. 그리고 16:15-18은 예수께서 사십일을 제자들과 함께 하신 이후 승천하시기 이전에 성령께서 임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날 표적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흔히 말하는 예언이었다. 그렇다면 14절과 15절의 거리는 약 40일간의 시간 간격이 있다. 또한 18절과 19절은 사도행전의 1:9과 동일한 내용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16장 17절에 말하는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주님의 예언은 사도행전1:9절에서 누가가 기록한 것에게 빠졌던 내용이며, 누가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내용을 마가를 통해서 입증하게된 샘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16:15-18의 자료는 주님께서 방언을 약속하였으며 승천하시기 이전에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요, 그 약속의 성취가 성령 강림하시므로 그들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여러 가지 표적과 방언의 현상에 대해서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결국 마가복음의 16:9-20은 마가의 기록이 아니라 할지라도 본문으로서의 역할로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고, 마가가 기록하였다 할지라도 중요성에서는 하등에 차이가 없다. 더군다나 본문에서 풍기는 저자의 의도와 삽입자의 의도는 일치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마치 한 사람의 생각과 같이 동일인의 자료를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이 성경으로서 계시의 중심적인 위치를 지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근래 개혁주의 신학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까지 본문을 부인하고 마가의 저작이 아니라 해서 주석하기도 꺼려한 분들을 발견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증거로 증거되고 있다고 믿는 본문이 성경으로서 가치가 아주 중요한 것임을 재 천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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