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작한 글이다 보니 자칫하여 강변이 될수 있어서 간단하게 요약하려는 것이 자꾸 길어졌다.
내가 그에게 할말이 많은가 보다.
하지만 도올은 그리스도인이며 그는 반드시 변화되어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가 성경을 연구하고 그의 마음속에서 외치는 음성을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도올이 "로고스"에 대한 헬라적인 관점으로 요한복음을 해석하려고 했다는 점을 말했다.
그리고 요한 복음의 저자 요한은 헬라사회에서 정립하지 못한 "로고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의 사고이다.
내가 도올이 쓴 요한복음 강해를 읽을 때에는 도올의 사고를 정립하고 있어여야 한다. 아니 읽지 전에 저자의 사고를 정립하고 있다면 그와 친한 관계일 것이나 친한관계가 아닌데야 어떻게 저자의 사고를 정립하고 저자의 독자가 될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 앞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예비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과 증명"이다.
다시말하자면 요한복음이 역사선상에 일어난 사실만을 기록한 내용임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성경을 해석하려는 자들에게 성경이 역사선상에서 일어난 진실과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서 오류가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때 바르게 해석될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성경을 이야기할때 역사적인 사실의 책으로 인정하도록 해석해 달라는 마음의 텔레파시를 보내고 잇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올의 독자들이 자기가 발표하는 강해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렇치 않으면 도올은 자기의 생각을 강변하는 우를 범하고 요한복음과는 전혀 다른 요한복음을 강해하게 되 결국은 요한복음의 잘못된 해석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자기가청중앞에서 발표한 모든 강해들을 불신하게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그를 의지하고 다르는 사람들의 하나씩 떠나가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다시 "태초"로 돌아가겠다.
우리중에 가까운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받는 사람에게 글을 기록할때 보낸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을 기록한다.
전혀 다른 편지를 받는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려운 방언을 기록한다면 그 편지는 편지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말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요한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글을 썼다.
요한이 자기도 모르는 말을 기록했다면 독자들이 요한의 글을 받아들고 휴지통에 넣어 버렸을 것이다.
다시말하자면 요한과 독자들과의 관계에서 "태초"는 이미 이해되고 있었고 알려져 있었던 것이며. 독자들은 요한이 말하는 "태초"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요한은 그의 서신을 받아든 사람들이 오해가 되지 않도록 이미 여러번 언급되었거나 자주 말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요한이 말하는 "태초"는 헬라 철학에서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 요한이 경험한 태초"라는 것이다. 다시말하자면 사도 요한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태초"를 보았고 경험하였다. "태초"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도올이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그 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던 사역을 지켜 보는 관찰자 처럼 요한복음의 저자가 말한 것이다.
"내가보니 태초에 말씀이 계시더라" 요한의 글을 접한 우리가 볼때 요한은 시공간을 초월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증거하고 있다.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사역을 지켜 본 사람처럼 기록할수 있을 것인가?
요한은 요한1서 서신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1서 1:1)
이 말을 헬라 철학에 선포한다면 이렇게 된다.
"너희가 궁금해 하고 알고자 하는 그 로고스는 "태초부터 계셨고 우리는 눈으로 보았고 우리 손으로 만졌다."
헬라의 철학자들은 뭐라고 답할까?
보나마나 모독했다고 야단 났을 것이다.
아니다 다를까 그렇게 했다.
그들은 요한을 무시했으며 교회를 비난했다.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세상에 속한 철학자들을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아들과 세상의 아들(곧 마귀의 아들)에 대해서 기록한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한일서 4:2)" 이 말씀은 "로고스"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라는 육체를 입고 오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요한복음 서를 기록하기 이전에 이미 태초와 로고스에 관해서 편지를 보내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렸다. 그 서신은 바로 요한 1,2,3서였다.
그렇다면 가장 큰 문제가 있다.
저자 요한은 어떻게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경험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이것을 밝히지 못하면 요한복음도 아니 강해하는 내용도 모두가 헬라의 철학과 같이 사람이 깨우쳐 얻은 비 진실의 산물이 되고 말것이다.
도올은 바로 이 과정을 간과하였다.
요한이 경험한 "태초와 로고스" 를 찾아 냈더라면 아마도 역대에 길이 남을 훌륭한 요한복음의 강해가 되었을 것이며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에게 잠잠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도올의 말에 경청하게 되었을 것이다.
저자 요한이 "태초와 로고스"를 어디에서 경험하였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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