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에서 나는 도올이 "태초"를 해석하려는 시도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이제 나는 그가 범한 오류를 지적하고 성경이 말하는 "태초"를 설명하는 결론을 얻고자 한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5권이 책을 기록했다고 했다.
3권은 서신이요, 2권은 책이었다.
가장 먼저 쓴 글이 요한 계시록이며 그 다음으로 요한 1,2,3서 서신을 기록한 다음에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요한복음을 교회에 남겼다.
다섯권의 글들이 한결 같이 심오하고 깊은 내용들이지만 무엇보다 요한복음은 평이한 책이며 읽기에 편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언어학 강의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교재로 체택을 한 것으도로 보인다.
도올은 요한복음을 해석하면서 구문마다 주석을 하듯이 설명을 했었다.
그러는 도중 핼라의 철학과의 관계에서 요한복음을 해석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중에 하나가 지금 처음으로 언급하는 "요한복음 1장1절의 내용중의 한 단어를 설명했다.
도올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기록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문장속에 "태초"라는 시간개념을 가진 단어를 "한 처음"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다른 신학자들의 해석을 오역하였거나 기독교 교회들이 잘못 해석을 하고 있는 것가 같은 뉘앙스를 던졌다.
나는 도올이 성경을 잘못보고 있다는 것을 지금 말하고 그의 해석은 그의 지식에 미치지 못한 경망한 태도라고 지적하고 있다.
도올은 성경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였고 그의 지적인 능력으로 성경쯤이야 별거 아니라는 생각으로 요한 복음을 대면하였다.
하지만 도올은 성경이라는 크고 깊은 산을 설악산이나 금강산 그리고 백두산과 같은 큰 산들로 생각하였으며 철학적인 식견과 능력이 있다면 능히 정복할 수 있는 보잘것없는 산으로 취급하였으나 애석하게도 깊은 산속에 조그마한 골짜기 한줄 파 해쳐 보고 산을 다 알았다고 한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 기록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는 말은 아래와 같다.
저자와 "태초"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선 저자는 "태초"를 어떻게 경험하였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과감히 말할 수 있는가?
* 도올도 많은 책을 쓴다" 원고를 집필한다. 그렇다면 그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는 그의 사상이 들어 있는 말이다. 그는 그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를 자기의 글에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단적으로
그가 요한이 말하는 "태초"를 "한 처음" 이라고 말하는 것은 "태초"에 관해서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이다.
이렇듯
요한복음의 저자도 마찬가지이다.
요한이 "태초"라는 말을 도올이 말하는 의미 "한 처음"으로 이해하였다면 도올과 요한은 같은 사고를 하고 있는 샘이다.
나는 도올이 요한의 사고와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요한이 말하는 "태초"의 개념은 요한계시록에서 분명히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요한 계시록은 아래와 같은 인식이 없이는 이해할수 없는 책이다.
1. 요한복음의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치 담 넘어 하나님의 집을 살펴 보다가 들켜서 안으로 끌려 들어간 모습과 같다. 그후 저자는 하나님의 집안에서 하나님나라와 창조의 세계의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하심을 지켜 보게 된 것이다.
실지로 요한은 밧모섬에 이끌려 갔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박해때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함) 여기에서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고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게 된다.
2. 밧모섬에서 경험한 사건은 초자연적인 정신세계의 사건이지만 요한에게는 실제 있었던 일이며 환상이나 망상에 의해 기록한 사건이 아니었다.
3. 요한은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목격하는 경험을 한다.
4. 요한 계시록의 책은 인간의 이성이나 각족 철학을 이용한 해석이 가능한 책이 아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마음의 동의가 없이는 이해할수 없는 역사위에 실재했고 역사를 이끌어가는 가늠자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데로 이끌려 가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을 상기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서 신자와 불신자가 구분된다.
또한 요한복음의 해석이 차이가 나게 된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22:17-21에서 이렇게 말한다.
(17)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믿음이 아니고서는 받아들일수 없는 자기만이 경험한 역사위에 사건(자유주의 자들이 말하는 계시와 역사와의 스파크"라고 할수 있을까?)을 인정했을때 성경의 모든 책들을 해석할수 있게 된다.
계시록에서 태초는 이렇다.
계시록 4장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보좌를 본다.
또한 19장에서는 장엄하고웅장하며 권위가 있는 심판의 주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만왕의 왕 곧 만유의 주를 본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자기의 피를 흘려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렸다(계시록 5:9)고 기록된 사역자 어린양이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보좌에 앉으신 분이셨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셨다.
그가 계신 그때,
요한복음의 저자가 경험한 밧모섬에서의 시간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닌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에게는 환상처럼 보이지만 요한에게는 실재 했던 사건의 경험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경험하여 목격한 것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창조의 시간과 공간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하면 시간과 공간 너머를 또다른 차원의 공간의미의 개념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나는 여기에서 언급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인간이 머리나 이성 혹은 지적인 능력으로 이해하는 "인식의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철학자들이 종종 그들이 입으로 "무"를 언급한다.
"무"란 무엇인가?
"무"는 없는 것이다. 시간도 공간도 없는 것이다.
인감의 이성은 무를 "인식" 할수 없다.
없기 때문에 인식할수 없다.
어떤 무식한 사람들이 말하는 존재 차원으로 1차원, 2차원, 3차원, 이런 개념으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는 1,2,3차원 모두에서 에서도 "무"이다.
"무"는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되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없기 때문에 "인식"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설명되어질수 없고 말할수 없는 것이다.
"무"를 설명하는 많은 철학자들이 있다.
그들의 의식은 "무"를 인식하고 있다.
없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지적인 오만으로 설명할수 없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지적인 오만이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과 존재 구조가 다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 구조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는 차원이라는 인식의 문제로 이해되는 관계가 아니라 결코 인식이 불가능한 존재적인 다른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 해 주셔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하게 해주지 않은 이상 결코 하나님과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이 어떠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적인 오만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아시고 인간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 방편이 "로고스" 곧 "말씀"이다.
결국
"태초"를 인식의 개념에 의해 인식할 수 없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구조적인 존재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할수 없다. 하나님의 세계를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계시록에 나타나심으로 하나님의 세계가 열러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로고스를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셨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보이실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결국 "태초"는 하나님 안에서의 인간의 표현 개념으로 시간과 공간 세계일뿐이지 인간의 지적인 능력과 인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보이셔도 인간은 하나님을 알수 없다.
하나님께서 도올 앞에 나타나시고 귀에 대고말씀을 하신다 해도 도올은 느낄수 없고 알수 없다.
하나님과 인간은 존재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계시가 필요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셨을까?
서로 다른 존재에서 의사 소통이 이루어 지는 것은 기적중의 기적, 이것은 깊은 기도나 명상으로 결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인간의 이성에 착상되는 것이 아니고서는 켤코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인간의 이해의 수준으로 성육화 되셔서 계시하신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이며 요한 복음의 모든 내용이다.
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신자들이라고 인식할수 있는 것이 아니며, 분명하게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시공간의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라고 말하는 도올의 말은 도올의 지적인 인식 세계에서의 시공개념일 뿐, 하나님께서 계시하셔서 알려준 기적적인 사건의 지식이 아니라 지극이 미미한 인간 수준의 개념에 불과하다.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사고의 변화 과정을 거치지 아니한 순서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반드시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의 사고를 발견하고 해석하여야야만 한다.
이것은 도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에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끝
계속해서 도올이 해석한 요한복음 강해의 내용들을 살펴 보려고 한다.
다음에는 회개에 관한 내용을 다루어 보려고 한다.
계속....
'도올과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올 | 메타노이아 2 (0) | 2007.03.03 |
---|---|
도올 | 메타노이아 1 (0) | 2007.03.03 |
도올 | 그가 모르는 "태초" 4 (0) | 2007.02.27 |
도올 | 그가 모르는 "태초" 3 (0) | 2007.02.27 |
도올 | 그가 모르는 "태초" 2 (0) | 2007.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