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과요한복음

도올 | 메타노이아 1

생명있는 신앙 2007. 3. 3. 11:37

도올의 요한복음의 강해는 이미 종강 녹화를 했다고 들었다.

그로 인하여 기독교와 분쟁을 일으키려는 네티즌들이있었으나 굳이 논쟁을 할 필요까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한마디로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는 그가 출판한 "요한복음 강해"를 읽어보고서는 기독교 신학의 입문서도 되지 못한 세간의 비평에 해당하는 글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따르기 좋아하는 한국 사람의 특유의 성격에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좋은 리더가 있음을 보고 기뻐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도올이 성경을 강해하기는 아직 부족한 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앞에서 도올이 말하는 태초에 관해서 도올이 모르는 "태초" 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글을 실었다. 이제는 도올이 착각하고 있는 "메타노이아"를 살펴 보려고 한다.

 

도올이 말하는 메타노이아는 한마디로 아무런 깊이가 없는 세간의 언어에 불과하다.

메타노이아란 그의 말대로 회심이든 기독교가 주장하는 회개이든지 그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겉만 핱고 지나가 버렸다.

 

우선

도올이 요한복음을 강해 하였으므로 나의 변증을 요한복음에 국한하려고 한다.  만약 주제에 대한 명확한 논증을 열거하려면 성경과 또는 성경시대의 각종 자료들을 참고하여야 하고 그렇게 참고하게 되면 아무리 많은 데이터 저장고라도 부족하며 독자들은 그 내용을 완전히 읽지 못하고 이생을 마쳐야 하는 비극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요한복음의 한계내에서 메타노이아 를 독자들이 이해할수 있도록 설명할 것인가?

당연히 그렇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메타노이아가 무엇인지 언급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사용한 단어를 이해하고 기록하고 있었다.

 

내가 한결 같이 놀라는 것은

도올은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아 헬라문화에 그리스도를 짜집기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내가 존경하는 석학이라는 사람이 고작 이것밖에 안되는가?

나는 한편으로 두려운 마음까지 생겼다.

왜냐하면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지적인 욕구를 채우고 있는데 실상 도올은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조차 자기의 철학으로 접근하고 있다니 말이다.

 

우선 도올은 요한복음을 강해하기 앞서 요한의 사고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요한이 당연히 헬라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으며 헬라 문화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변증하는 것으로, 아니면 헬라문화를 이용하여 기독교를 정립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도올 | 그가모르는 "태초"에서 언급한 것처럼 요한이 기록한 5권의 책을 살펴 보았더라면 아마도 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한의 사고는 요한계시록에서 확실하게 정립되고 요한 1,2,3서를 기록함으로써 발전을 거듭하다가 요한복음이 사고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함으로 요한계시록이 요한복음의 사고를 이해하는데 오류가 있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경험에 의해 확립된 사고는 독자들에게 자기가 설명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요한의 사고에 의한 "마타노이아"의 개념은 무엇인가?

도올은 그의 책 104페이지 하단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여기 회개하라라는 말의 원어는 "메타노이아이며 그것은 노이아의 메타 일 뿐이다.여기에 괄호를 하고 (a change of mind), 즉 마음의 상태(노이아)의 변화(메타)뿐이다. 그것은 회개가 아닌 회심이다." 라고 했다.

계속해서  확실한 표현으로 "즉 마음의 방향을 트는 것이다.  악한 상태에서 선한 상태로, 이기적 욕정에서 보편적 사랑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라."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repent)라는 것은 원죄를 뉘우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바르게 회전시키면 곧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성큼 다가선다는 의미이다. 회심은 우리에게 다시 태어남을 요구하며, 새로운 주체성, 새로운 사회관계, 새로운 세계인식을 요구한다. 바로 그것이 천국이다. 라고 했다.

큰 실망을 했으나 계속해서 책을 읽기로 하였고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예수님과의 대화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궁금해서 읽어 내려갔다.

예수님은 유대의 지식인 니고데모를 밤에 만나는데 이때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중에 회개와 관계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그 말씀은 3장 7절에 있는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도올은 이 구절의 말씀에 대해서는 해석하지 않고 요세푸스의 기록을 살펴본 정황으로 설명하고 말았다.

도올에게 이 구절을 해석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요한의 5권의 책을 살펴 보지 않았고 가장 먼저 이해하고 있어야할 요한 계시록을 간과하였으며 요한1,2,3,서의 서신의 내용을 무시하였기때문이다.  아니면 도올은 요한서신과 계시록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신학지식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도올이 요한복음을 해석하는 오류는 이미 예건된 것이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도올은 교회의 설교자중에서 가장 지식이 부족한자의 성경해석의 기본조차 무시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도올이 자칭하여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 데목에 대해서 그의 마음이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요한 복음 3장  36절의 말씀을 보고 틀림없이 놀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가 되고 싶은 것처럼 "나도 예수를 믿는다"라고 말한 것이다.(다음에 이 내용에 대해서 언급하겠슴). 그래서 나는 그를 기독교에 던져진 혜성이라고 블로그에 글을 올렸으며 그는 지금 마음의 갈등으로 거의 미칠 지경에 있는 자신의 상태를 감추느라 고통스러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올은 지금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

성철스님의 유시를 생각하게한다.   .

 

생평기광 남녀군 - 일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미천과업 과수미 -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신보다 더 크다

활염아비 한만단 -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갈래나된다

일륜토홍 괘벽산 - 한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이 말은 성철의 죽음 불과 몇분전에 남긴 그 유명한 시이다.

놀랍게도 성철은 성경을 7번이나 통독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 외에도 정말로 놀랄 만한 많은 글들을 남겼다.

 

과연 도올은 그가 믿는 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가 누구라고 고백하는가?

 

과연 그는 "메타노이아"의 의미를 알고 있는가?

 

도올은 마크트웨인의 동화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도올 요한복음 108 페이지).  이것은 교모한 갈등을 조장하는 표현이며 하나님에 대한 악의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교묘한 논증 들이다.  도올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원론의 관계에서 세상에 오시기 위해 어쩔수 없는 방법에 의해 육신을 입어야만 하는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교묘한 도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간단하게 속아넘어 갈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분명하다. 하지만 도올이 생각하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요한복음이라는 영화 원고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당연시 하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저자가 다른 복음서에서와 같은 상세한 내용들을 삭제한체 하나님의 아들로 당연히 그리는 창작, 즉 요한복음서 저자의 사고에 있는 성육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사고에서 창작해낸 하나님의 아들로서 "실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도올은 요한이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예수가 로고스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었고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였으며 결국 요한복음은 요한의 창작인 것이다. 다시말하자면 도올의 사고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 그의 하나님은 만들어진 하나님인 것이다.  

이 얼마나 교묘한 속임수 인가?

같은 말로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다른 신을 믿게하는 교묘한 방법인 것이다.

 

 

이 말은 실지로 요한의 저자가 요한복음이라는 작품의 원고를 적어 감에 있어서 당연한 사실들의 자료들을 제거하고 자기의 의도에 꼭 필요한 것들만 취합하여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드라마의 작가로 묘사하고 있다. 도올은 요한복음을 해석함에 있어서 해석의 재료가 되는 요한복음은 성경이 아니라 드라마 원고에 불과한 역사에 위대한 문학 혹은 종교의 경전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는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사고에 대해서 [도올 | 그가 모르는 태초]에서 "기록의 사실과 증명"을 언급한 것이다. 

무엇보다 도올은 요한 복음서의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증명을 선행 했어야 했다. 이점을 간과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지금까지 수많은 강의 를 해 왔던 강해 들에대한 신뢰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도올은 그의 모든 강의를 자기의 지식속에 있는 허구를 쏟아내 왔다. 이 모든 것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 언급 한 것처럼 거짓에 불과한 것들이다. 요한복음 강해 뿐만 아니라 그가한 모든 강해가 사실에 입각한 강해가 아니라 그가 깨닫게 된 그의 사상일 분이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메타노이아를 뭐라고 하는가?

과연 요한복음의 저자가 말하는 사고로 말하여 요한복음의 저자와 일치하는 생각을 우리에게 말하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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