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과요한복음

도올 | 메타노이아 2

생명있는 신앙 2007. 3. 3. 12:56

내가 이글을 연재하듯이 기록하는대에는 이유가 있다.

도올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이다.

 

앞의 글에서 도올이 생각하는 메타노이아가 무엇인지를 말하려 했었다.

도올은 "메타노이아"를 "회심"이라고 정의했다.

나는 여기에서 메타노이아의 언어적인 개념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

요한의 사고속에서 나타난 메타노이아를 언급하는 것으로 한다.

놀랍게도 요한계시록에서 사용한 회개에 관한 단어는 10회를 사용하였는데 한결 같이 행위에 대한 돌이킴을 말하고 있다.

 

신학자들이나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이나 이정도 되면 손들고 말것이다.

그리고 회개는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우를 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성경이 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 해석자라면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에 대한 신뢰를 중시해야 한다. 도올이 생각하는 것처럼 드라마의 원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도올이 해석하는 요한복음서는 요한이 창작한 드라마 원고로서 요한복음은 헬라의 영향을 받아서 헬라의 문화의 언어를 정교하고 지적으로 조합하여 만든 당대에 위대한 작품이었고 교회는 이것을 기독교의 경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요한복음은 저자가 경험한 일부의 역사적인 사실에 헬라의 영향을 받은 창작으로서 저자의 사고속에 갇혀 있던 지적인 충만이 한편의 영화로서 그려진 것이다. 이것을 받아든 독자는 필름이 다하고 불이 꺼지면 머리속에서 기억으로 남는것 뿐 아무것도 아닌 허무한 작품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올의 요한복음에 대한 사고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은 아직 젊은 힘이 약간 남아 있는 노년에 접어든 사도였다. 그가 도미시안 황제의 박해로 말미암아 밧모섬으로 유배를 갓는데 그곳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에 이끌려 환영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환영은 눈을 감고 머리를 하늘로 향하며 행동이 멈추어진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는 보며 들으며 기록하면서 환영을 보았다는 점이 다르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는 요한의 환영에 천국의 개입을 허락하였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역사안에 개입하시는 전능하신 사역으로 요한에게만 드리워지고 있는 기적의 사건이었다.

이때 요한은 천국을 목격했고 사역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놀라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었다.

 

요한이 기록한 성경은 그 단어에 있어서 거짓이나 꾸며진 것이 아닌 사실에 입각하여 저자인 요한이 경험한 객관적인 진실들로 구성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들보다 더 위에 성령의 감동이 있는데 여기에서 성령의 감동을 언급하면 마치 요한의 사고와는 전혀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기록된 경험되지 않는 창작 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일관적인 메시지 내용은 간단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언급한다.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신다.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고 지금도 진행중에 있는 미래의 일을 요한이 보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과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계시록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은 세상에 관하여 일을 하시고 세상은 하나님의 결정에 의하여 역사안에 현실로 나타나고 성취되어져 간다. 모든 결정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하신다.

여기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이세상에 있다가 돌아간 영혼들과 이미 그곳에서 있는 존재들 그리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존재들 또한 세상의 신자와 불신자가 등장한다.

요한은 이 모든 사실들은 눈으로 보고 자기의 의식으로 인식하여 이해하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글로 기록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장을 인간의 의식에 인식되게하는 매게 역활을 요한이 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천국을 이해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며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보여준 미래에 대한 기록들로 말미암아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그날을 인식하고 깨닫게 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나라는 세상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안에 세상이 있으며 세상은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작업 현장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표현된 내용이다.

그러면 하나님나라와 세상은 구분된 것이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사역의 현장이었으므로 하나님은 세상에 있으시며 하나님나라는 세상을 포한하여 앉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분명하다.

더 확실하게는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 있으나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있으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을 일부로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세상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세상은 이대로는 존재가 불가능한 위기상황에 놓여 있다.

세상은 이제 그 한계에 도달한 상태이다.

그래서 세상을 심판할 어린양이 나타나 예정된 인을 떼므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드리워진다.

이것이 계시록이 말하는 내용이다.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나라로 건짐을 받아야 하는 필연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이다.

곧이어 세상은 없어져야하는 위기의 순간을 향하여 다가가고 하나님의 심판의 결정은 이미 내려저 있고 세상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아야 하는 필연적인 상태를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에서 보게 된다.

그렇다면 구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의 결정으로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원인에 대해서 한번 언급한다.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여기에 묘사된 내용은 이렇다.

하늘에 전쟁이 일어 났는데 그 전쟁은 천사들간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 하나님의 사자 미가엘과 용과의 전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용이 미가엘과 전쟁에서 패하여 있을 곳이 없어서 세상으로 쫓겨 났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단의 방종과 자기의 의지대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천사가 보여지고 있다. 사단은 이 세상의 사람들까지 미혹하여 하나님을 대항하여 불순종하게 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미혹하여 죄에 빠뜨리는 사단을 벌하고 미혹당하여 넘어진 사람까지도 벌한다. 사단이 사람들을 미혹하는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던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거부를 선언하게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사단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하는 유혹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하나님을 떠났으며 마귀에게 속하고 만 것이기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의 본래 상태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존재임을 내포하는 것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필연적인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을 의미하고 있다.

 

도올의 메타노니아 개념에 의하면 사람은 태어날때에 죄를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즉 교회에서 언급하는 "원죄"문제응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살면서 지은 온갖 죄를 깨닫고 마음을 돌이켜 회심하여 죄와 멀어지고 새로운 마음 가짐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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