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인간은 가장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이루었다.
우주 공간을 떠돌고 있는 지구와 가장 가까운 달,
밤을 밝혀주고 바닷물의 한계를 조정하며 때에 따라 변화하는 달을 인간이 기어코 정복의 첫발을 내 디뎠다. 이 사건으로 인간의 위대함이 입증되었고 인간은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인간이 달에 발을 디디기 이전까지 달은 그저 불가사이한 숭상의 대상이었고, 종교의 대상이 되며 사람들은 달에 자기의 소원을 빌며 무한한 기원을 했다. 달은 인간에게 무수한 꿈을 제공하는 상상의 세계의 주인공이었고,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사건 이후로 달은 상상의 대상에서 실재하는 존재의 대상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달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암스트롱이 전세계의 인류에게 달에 대해서 보고하는 인터뷰에 응했다.
사회자가 달의 모습에 대해서 질문했다.
“달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동녘 하늘 위에 떠오르는 둥근 달은 쟁반처럼 보이기도 하고 장신구의 고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변화하는 그 달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은 것이다.
달은 우리가 보는 대로 그져 둥근 상태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태평양이 떨어져 나가 둥글게 변해 지금의 달이 되었다고 추측하는 대로 달에도 사람이 살것이며 마치 계수나무 아래에서 토끼가 방아를 찢고 있는 것처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사람이 사는 동네가 있고 강이 흐르며 산이 있어서 토끼들이 자연 위를 평화롭게 뛰노는 평화로운 대자연 바로 그것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처럼 자기의 생각대로 마음으로 달의 모습을 연상하고 그런 답이 나올 것을 기대하면서 텔레비젼 앞에서 암스트롱의 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암스트롱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잘 익은 사과 같았습니다.”
이것은 비유였다.
잘 익은 사과는 탐스럽고 보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만져보고 싶은 그런 감정을 충동질하는 욕구의 시작이다.
암스트롱은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말했는지 알 수 가 없다.
이 말을 듣는 텔레비젼 앞에 모여 있는 온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당연히 놀라서 얼굴 표정이 휘둥그래졌다.
우리 가운데 비유로 흑백을 가리는데 사용하는 미담이 있다.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부유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지만 입심이 꽤 좋은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친척은 서울에 살고 있었고 가난한 사람은 서울에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의 정보를 통해서 서울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 집에 즐거운 소식이 날아왔다.
서울에 있는 친척이 방문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접한 부잣집은 온 가족이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여러 날을 서울에 머물면서 여기저기를 살펴보며 구경도 많이 했다.
말로만 듣던 서울을 보고 연신 감탄하며 많은 구경을 한 다음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이 가족은 여기저기에 불려 다니면서 서울 이야기를 들려주느라고 세월 가는줄 몰랐다.
동네 사람들만 모이면 서울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싸움이 벌어졌다.
말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서울에 다녀온 사람과 서울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서로 싸운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이상하게 벌어졌다.
서울에 다녀온 사람이 서울을 구경하지 않고 정보로만 서울에 대해서 말하는 입씸 좋은 사람과 논쟁에서 참패한 것이다.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말하는 사람이 입씸이 좋아 미사여구를 잘 꾸며대는 사람에게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전자의 의견은 무시당하고 후자의 주장이 인정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서울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서울을 더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말로서 상대방을 누르고 이긴 것이다.
사람들은 암스트롱이 밟고 온 달에 대해서 각자 자기의 개념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달은 이렇다라는 상상적 지식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한 암스트롱의 말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암스트롱의 말을 자기의 마음대로 해석하는 결과마다 전혀 다른 객관적 차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주장하지만 실지로 이것은 진리일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복음서 기자들은 상이한 배경에서 다른 수신지들에게 각기 다른 의도를 가지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네 복음서의 한결 같은 의도는 본질적으로 유사하게 복음 적이다(C.F.D. Moule, The phenomennon of the New Testament). 더욱이 4복음서는 이 목적에 맞추어 하나의 공통적 배경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 전승은 결국 예수 자신의 어록과 행적, 아울러 초기 기독교 제자들이 이것들에 관해 진술한 이야기들로 소급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각각의 복음서는 각각의 독자와 기록의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치한 전승으로 서로 다른 의도를 가지고 기록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4 복음서를 상세하게 연구하기 보다는 요한복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요한복음서가 무엇을 목적으로 어떤 독자들에게 글을 기록하였는지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이 요한복음서의 저자와 일치하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다만 분명한 자료에 근거한 주장만 할 뿐이므로 지나가는 글로 읽어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필자는 모든 복음서와 성경의 모든 책들을 이런 입장에서 살펴 보려고 한다.
성경을 연구하는 방문자들에게 약간씩이나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시간을 할해하더라도 꼼꼼히 읽어주기를 희망한다.
필자의 글을 읽고난 다음에 느끼는 성경에 관한 개념은 이전의 개념에서 전혀 다른 안목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자기의 사상을 바탕으로 기록하였다.
비록 하나님꼐서 사람에게 말씀하신 내용과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들을 기록한 내용들이 있으나 여전히 그 말씀은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바탕으로 기록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사람의 사상이 배경이 되는 이 말씀들이 성경인데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신학적인 주장일까?
성경이 성경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어떻게 믿을까?
요한복음은 성경 중에 가장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복음서 가운데 한 책이다.
이 글이 드러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증언은 일반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가장 쉽게 기록되어 있고 접근하기 쉬우며 그리스도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록하였다.
쉬우면서도 깊고 오묘한 내용과 그리고 폭넓은 의미를 함의한 요한복음서가 전도에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라는 말씀은 너무 이해하기 슆고 알아듣기 쉬우면서 그 의미가 함의한 내용은 성경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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