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

어찌하여 세례르 주느나(요 1:19-28)

생명있는 신앙 2007. 3. 13. 20:51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1:19-28

1. 본문 연구

1. 본문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었,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었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2. 내용분해

1)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19-23

네가 누구냐 19

그리스도가 아니라 20

엘리야도 아니요 21

당신은 무었이요 22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23

2)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24-26

왜 세례를 주느냐 24

너희 중에 섰는 사람 25-26

3) 베다니에서 27

3. 본문의 의도

요한의 소문이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들려지자 지도자들은 요한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대망 하는 메시야가 오셨는지 궁굼해 한다. 그리고 야망을 가진 자들과 정권을 잡은 자들이 자기들의 때가 끝난 것을 안타까워하는지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4. 공통 성구연구

눅 3:15-17

마 3:11-12

막 1:5-8

위의 세 공관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은 같은 말을 사용한 내용이다. 그렇지만 이는 요한 복음의 내용과 일치하면서 그 장소가 다른 지역에서 세례 요한이 한 말이다.

2. 성경 신학적 연구

1. 저자의 사상적 배경연구

1) 자료 수납 과정

이 자료는 누구를 통해서 얻은 자료가 아니라 사도 요한이 직접 세례 요한과 함께 있다가 일어난 일을 기억하여 기록한 것이다.

2). 저자의 의도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선지자를 보내셨고 그를 통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선민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의 말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했다.

2. 역사적 연구

1) 본문의 역사

AD,27-30 요세푸스의 역사에 의하면 유대고대사 18권 3장, 유대 전쟁사 2권9장에 언급된다. 이것으로 예수님 당시 유대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 볼 수 있다. 세례 요한의 출현이 빌라도 부임 2년이라도 유대는 정치적인 갈등을 겪고 있다. 빌라도가 겨울 진영을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에 케샤르의 상이 그려진 기를 밤중에 들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와 세워 두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가 날이 밝아서야 그 모습을 보고 대거 분노하여 빌라도에게 쳐들어가 항의하였다. 이 항의로 말미암아 많은 유대인들이 처참하게 죽었다. 그 뿐만 아니라 고르반이라는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돈을 꺼내서 도수관 공사를 하는데 사용했다. 이를 분개한 유대인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많은 유대인들이 빌라도 군에 의해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 나타나서 세례를 베풀 때 전후해서 일어난 일이다.

여기에서 유대의 정치적인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유대는 로마 총독 빌라도와 심한 갈등 관계에 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종교를 말살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와 그리고 그들의 생존권 보장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런 유대의 상황을 알고 있는 듯 하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요한은 자기의 민족이며 잠시동안 유대의 권력자들을 [유대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요한이 기록하였을까? 사도 요한은 당시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유대의 권력자들을 자신과 구별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유대인이 아닌가? 사도 요한의 마음속에서는 “행 11:26”에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은 사람들의 시작으로부터 유대인이 완전히 구분되어져 있다. 사도 요한은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이 아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곧이어 언급할 ‘니고데모와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도 요한의 [유대인] 언급은 거듭남, 민족적인 변화, 그리고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으로 버림받은 유대인을 언급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들을 의식하는 요한의 마음에는 종교적 자만심에 빠진 사람들을 말한다. 정통 신앙을 무시하고 권력에 눈이 어두워진 야망인 들을 말한다. 소영웅주의자들, 부패되고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는 지도자들을 말한다.

그런 유대인들이 꼭두각시처럼 이용하는 하수인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례 요한에게 보냈다.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지주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란 말만 나와도 눈물을 흘릴 지경이며 감격한다. [예루살렘]은 그들의 정신이요 삶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중인 지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수치이다. 유대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야하고 예루살렘에서 제사해야하지만 반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광야에 있는 베다니로 하나님의 일군을 만나려간다는 것 자체가 유대인들에게는 수치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멸시는 당하고, 이방신상이 들어오고 그들의 율법이 침해를 당하는 등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속히 깨달아야 했다.

* 이 글을 읽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을 생각하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

분통터진 상황이다. 침략자 로마인, 선택받지 못한 야만인이 선민들을 마구 때려죽이고 있다. 주권을 잃어버린 민족의 서러움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편승해서 불법으로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똑똑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벨론에서 이거한 이후 유대 전쟁사를 살펴보면 이들은 전통적인 과정을 통해서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다. 분파 된 그들의 교리도 그렇고, 나누어진 민족도 그렇고, 그리고 지금의 대 제사장 안나스는 더욱 권력과 야욕에 눈이 어두운 자이다. 이들이 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요단강에 나타난 선지자 세례 요한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는 전혀 관계없이 새로운 말을 외치고 있었다.

억압과 주권이 상실되어버린 비극에 처한 선민을 구할 지도자나 선지자로서의 활동과는 전혀 동떨어진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것은 사사기나 여호수아 그리고 민족적인 여러 선지자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역대 선지자들이 국가의 권력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한점을 살펴보면 유대의 권력자들도 세례 요한을 다른 눈으로 볼만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상황은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의 활동과 말을 듣지 않는다. 세례 요한의 말은 “메시야가 이미 왔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 이전에 여러 가짜 선지자들과 메시야가 출현한 적이 있다. 그래서 비슷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바리새인들은 요단강에 나타나서 세례를 베풀고 있는 이상한 사람에게 사람을 보냈다.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는 그들의 정신에 비취진 세례 요한은 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반 미치광이 같은 사람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물은 것이다.

[당신은 누구요] 아마도 정중한 어투로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가 아니었고, 그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거나 로마와의 갈등을 해결해 줄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곧 실망하고 말았다.

우리도 이와 같이 우리의 상황에 휩싸여서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잘못 판단하거나 그르친 일이 많이 있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감싸고 있는 문제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세례 요한의 활동은 당면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은 분명하다.

[나는 ...아니라]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것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사람이 메시야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다윗의 위를 앉을 왕이다. 그러므로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왕을 의미한다. 민족적 메시야 용감한 왕을 ........

그러나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걸치고 꿀벌을 먹고사는 야생인이다. 광야의 사람인 것이다. 유대인의 눈에 비친 세례 요한의 모습은 한 마디로 우습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의 눈을 가리우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싫어하셨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메시야를 보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를 갈며 슬퍼할 것이다(마 25:30).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그리스도를 보고도 몰랐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의 말대로 그리스도를 소개하려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엘리야냐]

다시 오리라 한 엘리야를 의미한다. 엘리야는 불 말과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래서 다시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말라기 4:5에 선지자가 예언했기 때문에 예언대로 엘리야는 다시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선지자냐]

그들의 세계에 자주 등장하는 선지자를 의미한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상을 찡그리며 비웃는 보냄을 받은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다. 오만상을 지으며 가소로워 하고 있다.

얼마나 우수운 일인가?

큰 능력을 행한다기에 예루살렘에서부터 와서 자기에게 말을 걸었더니 손님 대접은 하기는커녕 가소롭게 성경을 인용하며 자기가 그 사람이라고 직접 말하니 귀가 듣기 싫어서 소리지를 지경일 것이다. 스스로 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치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다. 또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다. 바로 예루살렘에서 보냄을 받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그렇다. 그들은 스스로 정직한 사람들이다. 실지로는 온갖 아첨과 불법을 밥먹듯 하고 비리로 가득 차서 자기의 배만 불리우고 있으면서 마치 민족을 위하고 있는 것처럼 위선을 떨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의 모습은 호화롭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옷 하나 제대로 걸쳐 입지 못했다. 그런 자가 지금 뭐라고 말하는가?

“나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외치는 자의 소리다”

“너희들이 날마다 외우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된 그 광야의 사람이다”

세례 요한을 한번 생각해 보자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앞에서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들은 그 약속을 기다리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살았다가 어린 그리스도를 보고 세상을 떠났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분명히 약속하고 말씀하시기를 ‘메시야를 볼 것이다’고 하셨다. 그 일은 이루어졌다.

바로 이런 일이 세례 요한에게 있었다.

그가 광야에 있었든지 아니면 집에 있었든지 그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은 세례 요한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요단강에 가서 세례 주라”

“네가 세례를 주는 중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요 1:33).

이때에 하나님은 말씀하셨을 것이다.

너는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게 약속한 광야의 사람이다.

그러면 세례 요한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목격한 사람이 누구인가?

아무도 없다.

그런데 한가지 증거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세례 요한이 말한 대로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생략(성령으로의 세례[구 성학 저]를 참조)

4. 교리적 연구

1. 하나님의 섭리

2. 하나님의 주권

5.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