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

나를 보내신이의 뜻 4:27-38

생명있는 신앙 2007. 3. 13. 21:07

나를 보내신이의 뜻 4:27-38

본문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니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등장인물

제자들, 사마리아여인, 저자, 사마리아여인들,

사건의 내용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l하는 것을 본 제자들이 이상히 여겼으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사마리아 여인은 동내로 돌아가서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예수님의 목적은 여기에 있다. 누구든지 자신을 만나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구원이르게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보내신 독생자를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는 것이 목적이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구원이 이루어지게하신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져 고개를 떨구고 물떠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셨으며 제자들이 마을에서 먹을 것을 사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다면 그 여인은 그리스도를 만난 축복을 누리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버림받은 인생에서 구원얻지 못하고 슬픈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슬픈인생을 사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가?

생수를 떠먹을 수 있는 우물가가 어디인가?

오늘날에는 이런 우물이 흔하다.

여기저기에서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곳이 아주 많이있다.

그러나 진실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은 찾기 힘들다.

한결 같이 진리를 말하고 천국을 이야기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나는 방법 대해서는 옳지 못하다.

그리스도는 설교자의 입을 통해서 만나야 한다. 설교자가 진실한 마음과 확신을 가진 믿음으로 성령에 충만하여 전한 말씀가운데 함께 거하셔야 한다. 설교자가 말씀을 외치는 가운데 청중들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청중들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보이고 청중들은 설교자가 증거하는 그 말씀가운데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만남은 쉬지 않고 계속 되어져야할 뿐만 아니라 이 만남으로 거듭남의 역사가 계속 되어져야 한다.

본문 요약

본문은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동문서답을 기록한 것 같다. 제자들은 선생의 곤한 시장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을까지 들어가서 먹을 것을 구해가지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드렸다. 그리고 구한 먹을 것을 잡수시기를 권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곤한 시장기를 이미 해결하셨다고 대답하자 제자들이 [누가 예수께 음식을 드렸는가]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신일이 무엇이며, 그리고 그 일이 먹는 일 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 제자들에게 일깨우신다. 그리고 뒤에 대답은 제자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만약 이해하였다면 저자들은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이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사람이 거듭나는 일은 당장 해결해야하는 긴박한 굶주림 보다 더 급한 일이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먹는 일도 중단해야 한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를 만남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제자들이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기는 것은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하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상종하지 아니한다. 또한 그 여인과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죄인과 함께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생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자기의 의식과 개념을 가지고 있다. 자기의 개념에 합당치 아니하면 배척하는 것이 사람이다. 제자들의 개념으로는 사마리아인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곧 더러운 죄인과 함께하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죄를 범하거나 아니면 예수께서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판단 받는다.

사람은 자기의 개념으로 예수님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고 하늘의 일을 하신다. 에수께서 하신 일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이며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일이며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상하게 보이고잇는 것이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여자가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는 동안 그의 범상치 않음을 발견한다. 특히 자신에 대해서 즉시 말하자 놀라우리 만큼 신통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지자라고 말한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길으려 왔다가 선지자를 만났다. 그 선지자는 자기의 과거의 일을 훤히 꿰뚤고 있다. 자기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다는 사실을 즉시 알았다. 이들에게의 ‘선지자’라는 개념은 유다에 의해 영향받은 것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인들도 실상은 유댕니들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종교는 유다와 동일한 신앙이었으나 이것이 인위적으로 변질된 것이다.

어 어떻게 사람을 보기만 하고 모든 것을 알 수 있을까?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 여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다. 게다가 버림 받고천대 받은 여인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축복을 누린 것은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리스도는 민족의 소망이요 인류의 소망이었다. 버림을 받았고 천대를 받았던 이 불싸한 여인도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있었고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이세상에서 고통과 고난에 휩싸여 있는지 이해할 수 있으며 그의 삶이 얼마나 처절한 삶인지 곧 말해준다.

이 여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을 자기만 알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전하지 않고 견딜 수 없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가 기다리는 메시야이기 때문이다.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사마리아 여인이 동내로 들어가사 여인들에게 소리쳤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러자 동내 사람의 처음 반응은 어떠 했을까요?

이 여인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였을까요?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이 여인이 한 남자 아래에서 정숙하게 살았고 안 가정의 아내였더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정숙한 가정의 여인이 기쁜 소식을 전하면 함께 즐거워하고 그녀에게 감사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이런 결과가 일어나 지 않았다.

이 불쌍한 여인이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건만 이 여인은 감사의 답례를 받기 보다는 오히려 이여인에게 들은 것이 부끄럽다는 듣한 말을 듣는다(39). 이것은 동내의 여인들이 이여인과 같이 함께 있기를 꺼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이 여인의 비참한 삶이 들여다 보인다.

비록 메시아를 만나 소개했건만 칭찬을 받지 못하고 소외당하는 이 여인의 아픈 마음이라!

정말로 이여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에 합당한 사람이다.

그녀가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에수께서는 자신의 해야 할 일이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음을 제자들에게 보이셨다. 주님께서 하실일은 절망에빠진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다. 우리 주위에는 정말로 절망과 좌절에 빠진 영혼이 널려 있다. 여기 저기에 많은 사람들이 울부 짖으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영혼은 절망에 빠져 있기 때문에 소망을 잃어버렸다. 그들에게서는 아무론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

어떤이는 병들었으며, 어떤이는 삶을 포기했으며, 어떤이는 자기의 정신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에게 달려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위해서 보냄을 받았음을 제자들에게 보이셨다. 예수께서 할 일은 버림받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 것이 주님께서 배불리실 양식이다.

[나의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신 뜻을 행하는 것이 급하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에 급하게 긴박하게 진하시고 이루셨다.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을 받아야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추수할 때]

주님의 추수는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의 할 일도 너무도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쉬지 않고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우리 주위에 좌절과 막망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서 달려 가야한다. 우리는 이 일에 부름을 받았고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추수는 희어져가는 영혼들을 거둬들이는 것이다.

희어져 가는 영혼들은 세상에서 좌절하고 낙심한 영혼들이다.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은다]

누가 영생에 이를 것인지 주님께서는 확실히 아시고 계셨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너무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셨다. 어떤때에는 죽은 사람을 살리셨고 어떤때에는 소경을 일으키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려 보내었다]

제자들이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는 일꾼이 된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을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가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요6:44). 이것은 저자의 사상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사상이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만난 사람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보내셨다고 생각했다(요6:39-40). 그래서 그들의 마음의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빼앗기지 않도록 천국의 복음을 쉬지 않고 전하셨다.

추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아 자기를 만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천국을 향한 마음으로 채워지도록 지키는 것이다.

1. 신학연구

1. 공통본문연구

눅 9:52-53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2. 역사적 배경연구

1) 사마리아 사람들의 종교성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적 배경은 솔로몬의 죽음 이후에 왕이된 여로보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로보암은 9지파 반으로 분단된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된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 예루살렘을 왕래하다가 유다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출애굽때 하나님을 배반하고 신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그 신상 둘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숭배하게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BC 722-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사마리아가 함락을 당하므로 멸망을 당하고 사마리아에는 이방 백성들이 들어와 거주하게 된다. 이때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민죽들과 혼합되어 이방화 되어 유대인들에 의해서 배척받는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배척받은 민족적 감정 때문에 유대인과 하나되지 못하고 감정을 누그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떳떳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혼혈아라는 이유 때문에 선민으로서의 모든 혜택을 박탈당하여 버림받은 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에 나아갈 자격도 얻지 못한다. 야곱의 자손이라는 명예도 누리지 못한다. 이들이 섬기는 종교는 그리심산에 있는 황소 신상이다. 이 황소 신상은 유다가 말하는 여호와를 의미 한다. 그들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신이 여호와임을 믿는다. 그러나 그 여호와를 황소 신상을 만들어 놓고 섬긴다.

사마리아인들의 종교는 윤리적인 틀을 가지지 못한다. 계율이나 윱법 같은 것을 갖지 못한 우상 종교로 전락되고 말았다.

우리는 약간 잘못된 종교성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넣고, 민족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인지 확실히 깨닫게 된다. 우리들 가운데에도 처음에는 같은 생각으로 같은 사상을 가지고 종교 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세월이 흘러 후대에서는 신학의 중신 교리와 철학의 차는 벌어져 서로 합할 수 없는 엄청난 종교적 변질을 가져올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사마리아인들도 분명히 이스라엘의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야곱의 자손들의 후예이다. 다만 그들이 이방에게 함락당하여 이방인과 혼합 되어버렸다는 것 뿐이다. 비록 정통 유대인은 아니지만 분명히 약속의 자손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그들만의 종교 성지를 만들어야 하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대신에 이방인 여로보암을 따라갔으며(왕하 17:21) 그가 섬기라고 하는대로 좇아간 결과였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한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했었다. 그리고 여로보암이 행한 범죄의 소굴로 들어가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지하여서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여 멸망당하고 유대에서 배척을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백성을 이끄는 자의 책임이 막중함을 가르친다. 백성을 이끄는 자가 하나님을 떠나게할 수도 있다. 백성을 이끄는 자의 종교 철학과 신학은 성도들의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하는 말이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그들의 세계에서의 선지자의 개념을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이 잘못된 인도자를 따라 왜곡된 신앙생활을 했을지라도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소망은 남아 있었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다.

3. 저자의 사상적 배경연구

저자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증거한다. 이 자료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증거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정화한 이후 갈릴리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행하시게 되었다. 사마리아는 갈릴리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왜 저자는 세례 요한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께로 돌아 왔는가? 이것은 저자의 결정적인 변화를 말한 것이다. 이는 아마도 세례 요한에게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께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저자가 갈등하고 있는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하는가? 누구를 따라야하는가? 저자는 유다를 지배할 메시야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지 못해서 고민한 흔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유대인의 결례 문제로 인한 세례 요한의 답변이 저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저자는 이 답변을 듣고서 예수께로 돌아가 갈릴리로 가는 길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 길에서 사마리아 야곱의 우물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이다.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려 마을로 내렸갔다고 말하는데 마치 예수님은 혼자서 야곱의 우물에 남아계신 것처럼 보여진다.

저자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마을로 내려가지 않았다. 예수님과 함께 우물에 남아 있다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는 내용을 자세히 듣고 보았다. 이야기의 내용이 현장감 있고 상세한 것으로 본다면 이 기사는 저자가 직접 본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건의 배경을 그려볼수 있다.

야곱의 우물에 여러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갈릴리의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다. 이들은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멀리서 사마리아 여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지 않으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인과 이야기를 하거나 접촉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다가오는 것을 보시고 목이 마르셔서 물한그릇을 청하셨다. 이것은 유대인의 법에 따르면 분명히 범죄에 속한다. 예수님은 반드시 양을 드려 속죄해야 하고 몇일간 정결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사마리아 여인이 하는 말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하나이까”라고 대답한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더러운 혼혈여인에게 물을 달라고한 것 자체에 대해서 의아했을 것이다.

이런 놀랄 만한 배경을 본 저자는 본문을 다른 독자에게 듣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들은 내용을 말한 것이 분명하다.

4. 본문의 의도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하신일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 짜들이 어떤일을 해야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다.

5. 성령의 의도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은 것은 사람을 구우너하시기 위함이요, 이제 그 때가 완전히 도래하였으므로 제자들이 어떤일에 중점을 두어여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2. 교리적 연구

1. 하나님의 섭리하심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을 받는 일도 하나님의 뜻과 관계되어 있다. 또한 그 여인이 동내로 가서 많은 여인을 불러 오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리고 그 여인이 버림을 받고 비참한 조롱거리가 되는 사람을 살아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하면 축복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지나가셔야만 했다.

2. 하나님의 주권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다. 하나님께서 이루시지 아니하신다면 어떤일이든지 이루어질 수 없다.

3. 적용

우리가 보는 눈은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사마리아의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르러온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죄인이며 방탕한 사람이다. 우리는 치료 받을 수 없는 불치의 병에 걸려 영혼이 완전히 노략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에 사망으로 가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한마디로 비참하고 버림받은 인생을 정해진 기간동안 살다가 영원한 고통의 나락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무감각한 죄속에 빠져서 영원한 고통의 세계를 모르고 살았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메시아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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