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2.(출 33:14)
여러분을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피조물들로 만물의 중심에 있고 주님께서 여러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실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모든 피조물의 중심에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의 아름다움은 피조물의 아름다움이요 여러분의 입술의 증언은 모든 피조물의 증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여러분과만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셔서 여러분과 진심으로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과 마음으로 대화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창조의 완성을 위한 수고를 위해 땀을 흘리시고 계십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여 아름답게 지으셨으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은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창조의 완성이 이르는 날에 하나님의 크게 웃으시는 즐거움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환호를 보게 됩니다. 그날에 있을 환호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십시오” “주께서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라는 요한계시록 4장 11절에 면류관을 돌리고 영광의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영광을 돌리는 24장로들의 진심어린 환호의 송가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완성을 위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놓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타락한 우리의 영혼을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함과 죄성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순간순간의 삶들을 고백하고 회개하여 우리를 고치고 수정하여야 하겠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이어서 모세와 함께 가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계속해서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주 드린 말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은,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난 장소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질서로우신 하나님은 여전히 피조 세상을 섭리하시고 계셔서 우연이라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국가의 반포”에 관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인도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이시는 목적과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 말씀을 드리기 위해 부득이 2번째의 말씀을 준비 했습니다.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덮음이 있습니다.
모세는 사십일 동안 시내 산에 있고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시험이 되었습니다.
시내산 정상에 올라간 모세가 돌아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든지, 아니면 하나님께로 올라가 신들의 세계에 유영되어 신이 되었거나 아니면 자기들의 곁으로 돌아 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돌아 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확인을 하기도 이전에 이미 “그럴 것이다” 라고, 판단하고 자기들의 뜻을 실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군중의 심리에 휩쓸려 자기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끌려 가고 있었고 목소리 높은 사람들의 주장에 함께 휩쓸려 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모세의 형 아론까지도 처음에는 약간 망설이다가 주위에서 부추키는 사람들의 아부에 꼬임을 받아 중심을 잃고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과 한달 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산위에 구름이 드리웠고, 음성이 있었으며,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이 눈으로 본 것은 그것이 전부였으나 그들의 발은 땅에 얼어붙어버린 것처럼 두려움이 엄위하여 무섭고 두려웠으며, 온전한 사람이라도 감히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하늘에 드리워진 엄위를 보았습니다. 형용할 수 없는 기운과 전율하는 느낌은 그들을 더욱 두려움으로 몸을 낮추게 하였으며 납작 엎드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공포가 바람처럼 그들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 감히 입을 열고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모세만은 담대하게 하나님께 말을 했고 하나님은 모세의 말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늘의 구름위에서 들리는 음성은 어느 사람이라도 흉내 내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서 쏟아져 사람의 귀를 파고드는 형용할 수 없는 음성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세계에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에서 흩어져 막사로 돌아갔고 장로들은 다시 시내산 중턱까지 올라가 또다시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아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하나님을 보았으며 모세와 대화하시는 음성도 듣고 직접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약속에 순종을 약속하는 대답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면할 때 크게 두려워하고 떨게 되는 것은 죄인으로서는 결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인간을 아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느낌을 가지지 않도록 자신을 최대한 감추셨습니다.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존재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고, 보여지지 않으면서 그 존재에 대한 감감을 전혀 느끼지도 못하는 것은 사람들의 타락에 의한 결과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인들에게 들춰 보이시고, 존재하심을 나타내신다면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있을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추시는 것도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실지로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존재하고 그분의 손길을 받고 생명을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정원사가 하루도 빠짐이 없이 정원을 가꾸며 관리하며 다스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존재하시고 피조물을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하나님께 대하여 불경한 언행을 일삼고, 하나님의 심판을 느끼지 않고,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심판의 중대함을 알지 못하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보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 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고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이 시간 어떤 불신자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주 심한 욕설과 비난과 폭언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아주 불경한 언행을 일삼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그 행위를 못 본체 하시지 않습니다. 그에게 아주 분명한 심판을 행하시고 그의 불경스런 행위에 대해 결코 용서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들이 인식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형용할 수 없는 불심판과 혹은 순식간에 당하는 저주 같은 사건, 혹은 부지중에 발을 헛디뎌 넘어져 크게 다치는 불행한 일, 예상치 않은 일들로 인한 피해를 입는 일등이 일어나야만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얼마나 하나님에 관하여 무지를 드러내는지 아주 잘 보여 줍니다. 실지로 하나님을 비난하는 사람은 자기의 눈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바라보고 말하는 그 정면에 하나님이 그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하는 모든 말을 한자도 빼지 않고 다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시며 전지전능 하시므로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빼놓지 않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여 내뱉는 모든 말에 대한 심판을 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주 다양합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아주 즉각 적이어서 그 사람에게 결코 용서 받지 못할 피할 수 없는 저주스런 인생에 빠지도록 하십니다.
이런 것은 우리의 눈으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에 수없는 불신자들이 남긴 하나님의 저주를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저주에서부터, 자기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대속의 죽음을 강렬하게 거부하는 몸부림에서부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비난의 글들을 봅니다.
왜 저들이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 저주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그토록 강렬하게 거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하나님의 대적이며 원수입니다(골1:21).
하나님의 대적이 그 사람들을 사로잡아 진영을 삼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난을 쏟아내고 결국은 그 사람에게 그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들을 그렇게 하십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롬 9:15”
그러므로 그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것이 그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버림을 받은 상태에 있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무런 행위도 하시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원수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들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중생 (Regeneration)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New birth라고 말합니다.
새로 태어남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인 상태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분명히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심판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재앙이 예비 되었고 준비 된 것,
그들의 인생에 결코 밝은 짗을 보지 못하는 것,
또한 성령으로 태어남을 허락받지 못하는 심판을 받은 것,
종국적으로 그들이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행한 그 일을 보고 슬퍼하며 이를 갈게 되는 다시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 그런 날만 예비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엄청난 심판이 예비 된 이런 사람들에게 또 다른 심판의 재앙이 내려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한 고통의 심판을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모독일 뿐이며 그들의 분노로 하나님을 향한 좋지 않은 소리만 더 들리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그들의 마음에 만족할만한 즐거움을 경험하도록 허용하십니다.
세상을 마음껏 즐기도록 두십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일생동안 죄를 품고 혐오스런 인생을 살며 자기의 만족대로 스스로 만족하며 살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저주에 빠졌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하고 영원한 고통의 날에 더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이 불쌍해서 잠시 이 세상에서 자기의 즐거움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 집을 나서서 거리를 활보하거나 드라이브를 하는데 교통사고가 나지 않았으며, 가족들이 불의에 위협을 당하는 어려움도 만나지 않았으며, 욥이 당하는 것 같은 그런 엄청난 재난과 재앙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비난하고 욕하는 등 인터넷에 비난의 글을 올린다고 해서 당장 손을 잘라버리시거나 통렬한 비난을 쏟아낸다고 해서 의식을 거둬 가시는 무자비한 심판을 행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지로 그들에게 더 큰 심판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들에게 최대한 은혜를 베푸시고 용서의 잔을 돌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버지이시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행하는 저들의 어리석음을 조용히 덮어두십니다. 그들의 아픔과 미래에 당하는 고통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 영혼이 당하는 고통은 잠시가 아니고 영원히, 잠시라도 휴식이 없는 계속되는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그 영혼은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잠시라도 생각을 돌릴 겨를이 없는 고통의 혼란속에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New birth의 기회에서 제외 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는 감당하기 어려운 애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려버리십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들이 보이지 않는 얼굴로 눈물을 훔치십니다.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바로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 되게 하려 함이로다”(롬 9:17)
고통을 당하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셨으나 바로는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지 못하는 비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심판은 이미 그들에게 행하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들이 뭐라고 지껄이거나 비난과 조소 그리고 욕설, 또는 폭언을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완악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넘어져도 일으켜 세우시지 않으십니다.
문제에 봉착했는데 도움의 손길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울부짖을 그때에 그곳에는 아무도 그를 도울 자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돕기 위해 다가온 사람이 그를 더 해롭게 하고 달아날 것입니다.
오른 쪽 다리가 부러졌는데 왼쪽 다리마져 부러뜨릴 것입니다.
머리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데 외면하고 지나칠 것입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위험에 처해 울부짖을 때 그가 도울 수 없는 현실을 목도할 것입니다.
힘이 없어 발버둥을 치는 그에게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는 하나님의 얼굴을 돌리시는 심판이 그들에게 있고 반드시 그런 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결코 말하지 마십시오.
심판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사단의 노래입니다.
결코 죽지 않을 거야,
하나님은 너를 때리지 않을 거야,
하나님은 없기 때문이야(시편 14:1, 53:1)
“그러므로 네가 가진 모든 재능으로 그를 비난하고 욕해” 라고 말합니다.
범죄한 하와에게 다가온 사단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이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결국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단의 말을 더 신뢰하고 사단의 말대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으로 여기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 주매 그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가 하와가 사단에게 동의한 것보다 더 교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임했습니다.
영혼은 어두워졌고,
통찰력은 잃어버려졌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세상은 자기들을 향하여 도열하여 서서 대적하기 시작했고,
땅은 그들에게 저주를 드러냈습니다.
그들이 밭을 갈아도 풍족한 양식을 내지 않았고,
가시와 엉겅퀴가 그들을 대적하여 덤벼들어 그들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자녀 둘을 얻었지만 형이 동생을 쳐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아담과 하와는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그들에게 말하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의 삶입니까?
모든 존재들의 이름을 지어주던 지혜는 머리에서 사라지고,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영혼의 고통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없다”라고 말하는 불신자들의 입을 통해 말하는 사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들을 향하여 기도하십시오.
그 영혼들이 불쌍합니다.
그 영혼들이 참으로 가련합니다.
기도하여 회개에 이르도록,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옛날 바로시대와 같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미 2천년 전에 그 기회가 주어졌다고 선포 되었고 오늘 다시 주의 종들이 그 기회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이제는 강퍅하던 자들도 주님께서 부르심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다시 시내산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전지전능 하시고 무소 부재하시는 하나님이 시내 산에만 거하시고 시내산 밑 광야에는 계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을 앞세워 하나님을 떠나 배역의 길을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미물이여 감정과 생각이 없는 존재들인 광물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명령에 순종하여 자기자리를 완벽하게 지켜 단 일초라도 어김없이 온 세상에 빛을 비추는 일을 쉬지 않고 일하는데,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식 할 수 있으며 살아있는 생령인 인간이며 불과 얼마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하나님을 만난 그들이 이렇게 신속하게 하나님을 떠나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미물보다 못하고 야수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말을 합니다.
왜 이런 말들이 사람을 향하여 쏟아냅니까?
태양과 달 그리고 온 하늘에 떠있는 성군들의 순종을 보십시요.
저들은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빛을 잃을 수 있고,
제자리를 잃을 수 있으며,
존재하는 그 영광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찬란하게 드러내 보이면서 자기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영혼이 없는 저것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나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가서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외쳤습니다.
그곳은 철학의 도시로서 세상의 중심이었습니다.
깨우치고 지식을 가졌다고 하는 당시에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자기의 철학을 발표하는 무대입니다. 수많은 철학들이 발표되었으나 하루아침에 사람의 무관심으로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 환영을 받고 지지를 받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철학이 스토아학파 철학이었고, 에피쿠로스학파 철학이 가장 인기 있는 철학으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행 17:24-30)
"우리가 그를 힘입어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기동하며 존재한다는 말은 삶 자체가 그분에 의하여 있는 것입니다.
영혼 없는 광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붙잡혀 있듯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기동하며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 사람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고 기동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붙들려 있고 하나님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비난하고 욕하고 온갖 혐오스런 말을 서슴치 않고 뱉어내는 그들이 바로 그 대적하는 하나님에 의해 살고 있으며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살고 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힘을 공급하십니다.
우상을 만드는 사람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재능을 주셨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기동하여 그를 의지하여 살면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계속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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