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임재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3

생명있는 신앙 2010. 8. 8. 11:20

전편에 이어서

 

이렇게 해서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하여야만 하고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영혼의 작용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드러나는 폐해를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 듣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학계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이들은 바울이 기록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 문체나 언어의 구사에 있어서 바울 서신들과 유사함으로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하고 있는 편이 많습니다.

그는 히브리서 6장4~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사도는 누구를 지칭하여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까?

바로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온몸으로 느끼고 두 귀로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손에 들고 백성들에게 보이며 “하나님의 영광은 이렇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충분히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온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목격하였고 별도로 지파의 지도자들이 다시 목격하였고 하나님과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백성들의 희생양으로 받으셨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은 그동안 애굽에서 보아온 종교의 전설이나 신화 그리고 타락한 인간의 생각에서 꾸며낸 만들어진 지식들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실지로 앞에서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애굽에는 많은 여러 신들이 있는데 그 다양한 신들 가운데 바로의 신이 가장 힘이 있고 권위가 있는 신이었으므로 신들 가운데 우두머리 신이 되어 애굽을 지배한다는 다신론적인 인식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여러 날 내려오지 않은 것은 바로 그 신이 모세를 받으셨거나 모세가 신들과 함께 유영되어 버렸든지 신들의 세계에 유입되어 받아들여진 바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백성들의 대표인 아론과 장로들에 의해 스스로 하나님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만 합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으로 부터 내려오지 않게 되자 급기야 장로들에게 달려와 문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 척박하고 식물이 자라지 않은 모래사막뿐인 광야에 있는데 우리의 지도자이고 신의 대리자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말하여 주시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 장로들은 한결같이 모세의 행방에 대해서 말 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나 이틀이면 시내 산에 올라가서 모세의 행방을 찾아보고 살펴보았으면 충분히 알 수 있을 탠데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아주 큰 두려움을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경험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은 죽음보다 더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부름에 의해 시내산에 올랐을 때,

모세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있었었는데,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모세가 물으면 하나님께서 대답하셨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묻기도 하였습니다.

산위에는 구름이 덮여 있었고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온 하늘을 누르고 있었고,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볼 수 있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죄로 말미암아 볼 수 없었으며, 하나님의 임재의 현상들이 두려움으로 영혼에 인식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내려와야만 했던 그 시내 산에서의 경험은 장로들 그 누구도 다시 도전하는 용기를 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모세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대언을 하던 모세의 형 아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로들의 회의는 열렸고 백성들은 회의에 참석하여 회의를 지켜보면서 발언을 쏟아 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장로들에게 모세의 행방에 관해서 물으면 장로들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고 그들이 하나님을 분명히 만났고 그 영광스런 위엄에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고 한결같이 대답을 했습니다.

모세가 있었으면 당연히 모세가 회의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나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백성들이 듣고 지켜야 하는 반포할 법률을 반포 할 수 있도록 주시는 기간이었습니다. 그 계명은 대표적으로 돌 판에 새겨진 십계명이 되었고 이것을 중심으로 모세의 입에 담아 반포 할 수 있도록 하시는 중이었습니다. 이것은 백성의 대표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약속한 것이고 순종하겠다고 약속한 것에 의해 주어진 내용들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장로들의 회의는 아론이 대표가 되었고 당연히 아론이 주제하는 회의는 백성들의 강력한 주장으로(출 32:1) 말미암아 백성들의 대표인 장로들도 어찌할 수 없는 아주 일방적인 방향으로 이끌려갔는지 아니면 장로들의 의견이 합치된 것인지는 모르나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방신들과 동일한 형태를 모방한 것으로 세상의 모든 나라에 자기들의 신을 표방할 수 있는 대표적인 형상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세속적으로 아주 타당한 논리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을 자기들의 신이시고 시내 산에서 만났던 하나님께서 크게 동의 하실 것이고,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 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의 신이 코브라를 형상화한 것으로 짐승의 이미지에서 주는 강력한 인상과 또한 신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짐승이 가진 장점들의 내세우는 것처럼, 일종 “우리의 신은 코브라와 같다”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세상에 내놓고 주장할 수 있는 신을 형상화 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 신은 실질적으로 코브라를 그들의 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코브라가 신은 아니고 자기들의 신을 코브라가 가진 신비적인 요소들만을 강조하여 내세워 그들의 신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소를 신으로 신성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생각으로 자기들이 세상에 표방하고 드러내야할 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치한 의견을 도출하게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의 다양성과 같은 생각들일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세속주의 적인 생각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이런 세속주의적인 생각이 교회의 영혼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형상이 없는 신이 어디에 있을까?

존재하지 않은 신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으며 형상이 없단 말인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은 논리입니다.

사람들은 형상이 없는 신을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신에 대한 형상이 없이 신을 말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그들의 일치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데 “존재한 모든 것은 형태가 있다”라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두렵게한 그 신은 어떤 형태로든지 만들어져야한다는 의견에 일치를 보이게 되었고 비로소 신을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입니다.


아론이 일어나 선포합니다.

“자 이제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금 부치를 내시오.”

어디에서 듣던 말 같습니다.

모든 종교들이 그렇듯이 의견이 합치되면 결과적으로 그들의 헌신이 요구됩니다. 신에게 바치는 최고의 헌물은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고 이 구별된 사업에 동참하는 것은 어떤 헌신보다 가치있는 것입니다. 그 사업은 신 자체를 만드는 것이고, 오늘날 교회에서는 교회당을 짖는 것이 가장 최고의 헌물입니다.

사람들은 의견이 합치가 되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반드시 물질을 거출하거나 혹은 헌물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으니 그 마음에 하나가 된 징표로 물질을 바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래야 사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물질은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으로 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위한 신을 만드는 것에 참여하기 때문에 마땅히 거룩하며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드리는 그 헌물의 양에 따라 신은 구별된 마음의 가치에 따라 구별되게 보답해 줄 것입니다. 그것은 더할 나위없는 행복과 물질이나 혹은 건강 등, 그들이 요구하는 축복일 것입니다. 그 사업을 통해서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들이 필요한 축복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금부치로 형용할 수 없는 가치를 얻기 위해 거룩하게 구별하거나 아주 귀중한 것만을 골라서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 집에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이 되는 장롱 깊숙한 곳에 꼭꼭 귀하게 숨겨두고 감춰두었던 그런 금부치들입니다.

그러나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 마음이 다릅니다.

많이 있기 때문에 구별하되 바칠 수 있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선택을 합니다. 물론 가장 귀한 것을 바쳐야하지만 그래도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는 다릅니다. 

먼저는 가난한 사람의 경우 자기가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하여 드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드립니다. 이들은 현재가 가난하기 때문에 자기가 부를 얻는 다는 것은 자기의 힘보다는 신의 협력을 더 중요하게 의지하게 됩니다. 결국 자기의 힘으로 역부족인 부를 얻기 위해서는 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아낌없이 바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치지만 부자들에게는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그것조차 없어서 노동력을 바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희생하고 봉사합니다. 

또한 부류의 사람은 중간 부류의 형편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크게 만족할만한 재산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생활에 어려움을 느낄 정도는 아닙니다. 먹고사는데 지장을 초래할만한 가난을 겪는 사람은 아니고 어느 정도 물질도 있고 금 부치도 여러 개 있습니다. 그 금 부치들 가운데에는 어떤 것은 좋고 아주 값지며 귀중한 것들이 있고 어떤 것은 빈약 하리 만큼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금부치로 귀하여 여기는 것도 있습니다. 종류는 많지 않지만 다수 가지고 있으며 생활에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드리는 금부치에 대한 마음은 가난한 사람이 자기의 전 재산을 드리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신상을 만드는 공동의 이익과 공동의 번영이나 혹은 목적을 가지고 참여하는 일에 있어서 아주 헌신적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나라를 위한 것이고 또는 자기의 번영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넉넉히 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일 좋은 금 부치를 가지고 나가 헌물로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희생의 가치에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돌아오는 결과가 아주 좋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재화의 가치에 대한 맛을 경험한 사람, 즉 재화가 주는 위력과 그 가치가 자기에게 가져오는 많은 유익들을 충분히 체험하고 있는 사람, 마음은 실지로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보다는 재화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고 그에 대한 매력에 빠져든 사람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 재화가 자기에게 주는 유익의 가치를 더 크게 할 수 있다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게 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그리고 가장 넉넉하게 헌물을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결단이 가능한 것은 현재 상태에서 가장 좋은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고 경험하지 않은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더 높은 부나 재화에 관심을 가진 자기 밖에 있는 것들이 더 좋은 것으로 보여지고, 그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렬해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헌신적으로 드렸을 때, 높은 차윈에 있는 신만이 자기 밖에 있는 그것들을 얻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다고 믿게 됨으로 자기의 희생으로 마음을 함께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화 혹은 금부치는 소망하는 또 다른 부를 얻도록 하는데 있어서 매개체라는 판단을 하게 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것이 돌아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가장 헌신적인 헌금납부자는 바로 이와 같은 중산층에 있는 사람들일 수록 가장 헌신적이고 가장 충실한 헌금 납부자가 됩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은 아주 넉넉하고 소유가 풍부하여 가신도 두고 정치력 량을 넓히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드리는 헌물은 중산층이 기대하는 것과 가난한 사람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계산 을 합니다. 그들은 집집마다 커다란 금고를 한 두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중산층들은 이들의 삶을 흉내 내기 위해 금고를 가지고 있으나 정작 금고 안에는 가치 있는 금 보다는 무개 있는 금덩어리들과 토지문서들이 한꺼번에 들어 있는 것에 반하여 이들의 금고는 각종 서류와 가신들의 문서 그리고 각종 토지와 그리고 금부치들이 종류별로 담긴 금고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금이나 문서가 아닙니다. 물론 그들이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명예와 그들이 교제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금부치의 가치는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가치에 있지 아니하고 교제와 명예를 중시하며 그것을 금보다 더 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드려지는 물질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으로 형상이나 우상 혹은 세속적인 일에 사용되어지지 아니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되어지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물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론이 소리 높여 말합니다.

“너희가 너희 아내와 너희 자녀의 귀에서 금고리는 빼어내어 내게로 가져오라.”

얼마나 명분이 있는 헌물을 거두는 행위입니까?

백성들이 요구하였고 백성들의 마음을 성취시켜 주었으며 백성들이 결정한 일이니까 백성들은 자진해서 귀에서 금 고리는 빼내되 조금도 아까워하지 아나하고 아론에게 가져왔습니다. 아론은 이것을 불에 녹여 한 덩어리를 만든 다음 세공을 잘하는 사람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게 했습니다. 이 금 송아지 형상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이지만 후대에 사마리아와 북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말았으며 일부 소수의 이스라엘 민족들의 마음에 자기들의 하나님의 형상을 금송아지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말았습니다.

아론이 각종 금 폐물을 헌물로 거두고 그것을 불에 녹여 금송아지를 만들게 된 경위는 신적인 의식과 일부 백성들이 알 수 없는 비밀스런 작업이 필요했었습니다. 신과 관계된 일이기 때문에 신적인 개입의 순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아론이 어떻게 신적인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꾸몄는지는 알수 없으나 천막을 치고 녹인 금을 형틀에 부은 다음 그것이 불속에서 나오도록 했다면 망치로 형틀을 깨고 그것을 빗자루로 쓸고 울퉁불퉁한 부분을 줄이나 혹은 조각 칼로 다듬어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에게는 이 송아지가 만들어지는 장면이 공개 되지 않았을 것이고 형상이 만들어지는 시간동안 액스타시스 같은 이상행동의 제례의식이나 백성들을 혼동케 하는 환각 상태의 광란이 있었을 것이며 아론은 천막 안에서 이 작업을 신성하게 마쳤을 것이지만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에게도 신이 만들어진다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신성시 했을 것이며 아론은 대답하게도 신을 창조하는 실수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아론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백성들이 귀에 걸린 각종 패물과 금으로 된 장식을 가지고와서 내가 그것들을 불 가운데 던져 넣었더니 금송아지가 나왔다.”(출 32:24)


이렇게 애굽을 탈출하여 나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의 생각과 삶을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에는 죄만 선택하는 의지와 죄가 선택 되어지도록 지적인 생각을 담당하는 의지와 이것으로 육체의 만족을 누리는 감정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지성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성이 얻은 자료는 육체를 변화시키고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지성이 무엇을 얻었느냐 그리고 무엇을 생산해 내는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근원이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은 지성으로 얻어진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을 거부하는 경향이 내재하고 있어서 죄에 속한 지식이 아니면 배척해 버리도록 타락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인간이 죄에 사로 잡혀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런 것을 아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인간을 지으실 때 영혼을 넣어주심으로 불멸하는 영적인 존재와 합하여 하나가 되도록 지으셨으므로 불멸하는 영혼이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영혼을 지으신 창조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사람의 사상에 의하면 영은 불멸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 같은 영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물질과 구분된 영이므로 지음을 받았으나 불멸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는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오염된 인간은 죽어 썩을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타락했으므로 육체가 썩어 죽으면 죄에 오염되어 하나님을 거부하는 영혼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처분이 문제가 되어 영원히 영혼이 나올 수 없는 지옥을 만드셨고 결국은 그 영혼이 그곳에서 영원토록 고통 속에 신음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지옥이 고통스러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도 그것에 대한 의심을 가져 본 사람이 없으며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옥이라는 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미쳐 그것에 대한 다른 것을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입니다.

지옥은 지속적인 고통으로 신음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죄에 물들어 있는 불멸하는 영혼들이 지성의 활동이나 생각하난 영혼의 마음의 활동이 전적으로 고통에 매여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무 고통스러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죽음이후 지옥에 이르렀을 경우 그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지 않기를 소원한다는 말씀을 자주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참으로 진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옥으로 들어간 영혼은 고통으로 인해 자기가 후손들이 이 땅에 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에 휩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이 세상에 있는 후손들에 대해서 생각할 순간이 허락되지 아니한 지속적인 고통이 영원히 계속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어느 정도 지옥이 어떤 상태인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의 타락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영원한 고통 즉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고통의 억눌림에 처해져야 하는 원인이 죄로 말미암았다고 말하면 영혼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고 경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의 순식간에 타락은 애굽에서 본 이방인들이 섬기를 종교적인 형태들이 그들에게 실천적인 종교 형식이 된 것입니다. 결국 바로와 다른 신을 섬기는 민족이나 혹은 신에 의해 지배를 받는 부족들과 같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들이 애굽에 속한 생각과 습관이 아직도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험과 혹은 보는 것, 그리고 습득한 것에 의해 지성에 심겨진 지식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환경에 큰 지배를 받습니다.

지혜롭고 현명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대게 하나님의 지으심에 따라 각각 다르게 태어나지만 실지로 사람의 인격 형성이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