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임재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5.

생명있는 신앙 2010. 8. 8. 11:23

전편에 이어서

이스라엘 진중에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들의 지성은 애굽에서 보았던 신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사를 담당하는 신, 사람들의 출산을 담당하는 신, 물을 담당하는 신, 바람을 담당하는 신, 그중에 가장 강한 농경신 바로가 애굽의 가장 큰 신이었고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들은 한결 같이 대표하는 형상을 지녔고 그 형상들에게 예배하며 절하고 예물을 바치는 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 신들에게서 해방되어 광야에 와 있고 자신들도 애굽의 그들과 같이 자신들을 이끌어주신 신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신들과 같이 신을 대표하는 형상이 필요했고,

그 형상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는 예식이 필요했습니다.

신의 형상이 만들어졌으니 이 신에게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이 필요했고,

제사를 집례하거나 인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의례에 따른 순서가 필요했습니다.

마땅히 신에게 다가가려면 예물이 필요했고,

모든 예식이 끝난 다음에는 이제 신이 그들에게 부여한 축복을 함께 누리고 즐거워할 파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세세하게 예비 되었고 이 일들을 위해 그들은 온갖 것들을 준비하였습니다.

어떤 지파는 음식을 담당하고 아론을 중심으로 하는 레위 지파는 제사의식을 담당하고 어떤 지파는 환경을 담당하고 어떤 지파는 질서를 담당하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의식과 예식이 끝난 다음에는 무질서하고 어지러우며 광란의 도가니가 되는 것은 그들이 타락한 극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애굽의 모든 종교의 의식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행사가 이렇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배워온 것이지만 실지로는 타락한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낸 종교성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가 무엇을 가져 왔는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들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온 두 돌판을 땅에 던져 깨뜨리며 분노합니다. 성경은 대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돌판은 온 백성들이 그들의 두 귀로 분명히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여 주신 것입니다.

분노한 모세는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불살라 부수고 가루를 내었고 그걸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였습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진문에 서서 백성들에게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선자들은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 모였습니다.”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을 편에 선자들이라는 말에 아무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모세의 편으로 갈라셨습니다.

그들의 신과 같은 모세가 호통을 치는 소리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벌벌 떨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죄를 지은 상태여서 정신이 없이 모세의 말에 움직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그 자리에게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이어서 모세는 레위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출 32:27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자기 형제와 친구 그리고 이웃을 도륙하는 것은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

이 비극을 아무런 감정이 없이 읽어 내려 갈수 있습니까?

이들이 이 비참한 형극 앞에 서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확인도 해 보지 않고 읽어 내려 가시렵니까?

저는 도저히 무릎을 꿇지 않고서 이 글을 읽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상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의 세속화가 오늘날 일어난 일인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속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속화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왜곡시키는지 그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아주 자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살았던 때에 보아왔던 모든 종교를 목도했으며 어떤 이들은 이 종교에 헌신하는 일을 돕는 노예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종교의 의식을 지금 시내산에서 아론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합리적인 생각

세상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종교의Imaging,

이런 것들을 어떻게 세상과 조화롭게 할 것인지 그들에게 숙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시지만 그들은 변화되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의 울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죄가 결코 그들을 편안하게 하지 않습니다.

생각은 혼돈스럽고 판단은 불일치 합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비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죄가 그들의 마음을 점령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라고는 조금도 없었으므로 마음에서 삐뚤어진 생각을 정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주 일방적이었고 고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성을 활용할 수 있는 지적인 자료는 고작 애굽에서의 경험뿐입니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너왔고 그 와중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며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것이 전부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지적인 재료라는 것은 모두 세속적인 것 뿐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찬바람이 부는 그 어느 날 다정하게 다가와서 내게 속삭여 주듯이 전해주는 친구든지 아니면 전도자든지 아니면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그가 전해주던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관한 말씀으로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았으며,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오직 지옥만을 향하던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놀라왔습니다. 또한 성령으로 다가오셔서 하염없는 죄를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던 그 날이 있었습니다. 새 마음과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남들이 알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누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미로왔으며 거듭난 영혼의 눈뜸으로 감격스런 날들이 계속 되었습니다.

말씀을 보게 되면 그 구원의 감격과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동되오 저절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죽을 것 같은 인생이 새로운 마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새 인생을 시작하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날들이 까마득히 옛 첫사랑으로만 남고 거듭난 것 같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은혜도 없고, 그리스도의 모양도 없습니다.

이름뿐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유지하려니 힘들고 지치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고 고통스럽기 까지 합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세속화 되어 버린 자신을 발견하면서 가끔 옛 그 첫사랑을 마음에 떠올려 보려고 하지만 어떤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세상속에 파ane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하나님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말을 잘할 수 있었습니다.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면 그 사랑의 감동에 함께 젖어 이웃을 교회로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성장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고 그냥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라는 반신 반의하는 믿음으로 종교의 의무 생활 속에 묻혀 살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언제부터인지 여러분의 지성은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에 그 지성으로 회기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을 알고 있는 사단이 여러분을 잃고 가만히 놔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제일 먼저 여러분을 유혹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아셨습니까?

어떻게 하든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지나친 구원이 기쁨을 조장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로 불평과 불만의 소리를 듣게 하고,

그 불만에 의해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상한 그 마음으로 또다시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깊은 회개가 아닌 원통함에 대한 위로가 속삭임같이 여러분의 마음에 다가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들려오는 위로의 음성.

감미롭고 달콤합니다.

은혜의 감정은 식어지고

점점 옛 본성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생각의 판단도 옛 사람처럼 하고

도덕 및 윤리와 문화도 옛 사람 그대로 합니다.

분명히 죄된 행동인데도 은혜롭다고 생각이 되고

죄를 지어도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곧 용서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이제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 달라!

라는 생각이 지배되고 점점 더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 아니라 죄가 여러분을 유혹한 다음 생각을 점령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점령하는 사단의 간계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것으로 사단은 지속적으로 여러분의 영혼에 거짓된 믿음을 주입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점차 멀어지게 합니다.

사도요한은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참으로 지식이 있었으며 신앙에 열심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 주님은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요계 2:4 : 처음 사람을 버렸느니라“ ”어디에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라고 경고합니다.

종교의 의무와 신앙의 열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첫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첫 사랑을 유지하고 항상 그대로 있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의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믿음의 진보(빌1:25)”와 “그리스도의 자랑(26)”을 위해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그들을 위하여 유익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믿음은 항상 성장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기까지(엡4:13)”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휼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처음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꾸준히 자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노력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진리의 말씀으로 교육하며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창조의 목적에 따른 아름다운 형상을 이루기 까지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배 때 마다 선포 되어지는 진리의 지식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의 초보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화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신앙의 초보에서 이미 이탈되어 곁길을 행하든지 아니면 어린 영혼의 상태에 머물러 아주 긴 끝이 없는 방학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세상의 풍조에 밀려 이리저리 휩쓸려 요동하는 풍랑에 떠밀려가는 키가 부숴진 배와 같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닙니다.

완전한 3박자를 갖추어 여러분의 영혼을 공격한 사단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1, 여러분의 마음을 완전히 점령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기본적인 진리에 서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2.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선포 되지 않도록 합니다.

3. 교회로 하여금 세속에 물들어 버리게 했습니다.

이런 3박자에 갖추어진 교회는 시기가 반목된 일상이 쉬지 않고 반복 됨으로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다툼이 많고 형제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까? 그것은 은혜가 없으며 세속적으로 치우쳐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사단은 여러분의 영혼을 제도적인 교회에 머물게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성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죄와 싸우는 것을 싫어하고 친구가 되게합니다.

죄는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속화에 머물도록 유혹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점령하여 여러분이 변화되는 것을 괴로워합니다.

결국 세속화된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점차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를 멈추십니다.

밖으로는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므로 언제 부터인지 새로운 신자가 딱 멈추어집니다.

들어와도 다른 교회 다니는 성도인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성도들의 마음은 완악해지고,

서로 시기와 반목이 거듭되고,

심지어는 설교자를 흔들고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를 변화시키는 일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뿐입니다.

성령이 안 계신 진리의 말씀은 없습니다.

진리만 있고 성령이 안 계신 곳도 없습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성령은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먼저 선포 되어지므로 신자의 영혼에 새로운 지식이 자리를 잡고 성령은 그 진리의 말씀이 계신 곳에 역사하셔서 신자의 영혼을 깨우치게 됩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너희의 믿음이 너희 속에서 자연적으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샘물처럼 교회에서 솟아져 나와야 합니다.

진리가 교회에서 하수처럼 흘러 나와 온 교회를 적시고 교회 밖으로 선포 되어져야 합니다.

진리는 성령으로 하여금 머물러 역사하게 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손길입니다.

진리로 사람의 영혼을 치료하는 약입니다.

진리가 샘솟지 않으면 교회는 반드시 세속화 됩니다.

이 진리는 자기의 생명을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하여 그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사역자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두개의 질서

영혼은 육체라는 집에서 의식을 잃고 사경을 해매며 누워있습니다. 육체가 의식을 잃으면 전혀 활동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 상태에 머물고 숨만 쉴 뿐이지만 영혼이 의식을 잃은 상태는 영혼의 기능인 지성, 감성, 의지가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이고 개별적이어서 전혀 통일체를 이루지 못한 선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선한 상태란?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시고 그것들을 보시니 “좋았더라” 라고 말씀 하실때 “좋았더라”가 “선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선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은 최초 지음을 받은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상태를 의합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지 않은 상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목적을 벗어났기 때문에 좋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이고 이것을 일컬어 “선하지 않은 상태” 곧 타락의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마치 정신병자와 같이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이 온전하지 못한 무질서한 상태이지만 타락한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는 영혼 그 상태가 지극히 정상적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판단기준이 타락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영혼이 타락하여 사람의 상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으며 어두움에 싸여 있고 온전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모든 불신자들의 상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아름다음을 상실하고 무질서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런 무질서한 상태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기 때문에 오히려 무질서가 질서 있는 것처럼 보이고 참 지식이 거짓을 이기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것이 우리 영혼에서 절대적으로 적용되고 거짓에 의해 사람이 움직이며 세상은 다 거짓된 세상입니다. 사도는 “사람을 거짓되다(롬 1:25)”라고 했고, 우리는 거짓된 세상을 세속화의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모든 불신자들의 상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아름다음을 상실하고 무질서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런 무질서한 상태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기 때문에 오히려 무질서가 질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참 지식이 거짓을 이기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것이 우리 영혼에서 절대적으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완전한 세속화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범죄한 영혼의 치명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영혼을 치료하는 것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영혼의 상처를 치료하는 약입니다.

용서란? "Forgiveness"

죄나 잘못을 저지른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음을 말합니다.

못 본 것으로 하고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는 결과입니다. 반드시 꾸짖거나 벌 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덮는 것은 행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위가 사라지는 것은 치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상처를 입은 범죄한 영혼을 용서만으로 치료하고 고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상처를 진단하고 처방을 하여 치료하는 것인데 이 치료가 용서라고하면 영혼을 진단하는 것과 그 진단의 결과에 대하여 처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영혼은 진리에 대해서 왜곡하고 생각을 본래의 인간의 지음을 받은 상태가 아니라 본성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본성의 상태는 타락한 상태의 영혼으로 지성은 삐뚤어져 있고 의지는 난폭하고 감정은 철저히 자기중심적 이어서 정신 이상자와 같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선한 의지와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선한 의지와 목적에 삐뚤어진 상태가 타락의 상태입니다. 인간이 타락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영혼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보고 진단한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단하기 이전에 이미 인간이 타락했음을 말씀하셔서 진단보다 더 정확한 말씀으로 인간의 상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타락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부정합니다. 인간은 어느정도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선한 상태로 유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영혼의 치명적인 상태가 되어 치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치명적인 자신의 상태를 치명적인 상태의 기준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삐뚤어진 지성이 영혼의 상태를 분석했고, 난폭하기 이를 대 없는 의지가 영혼을 건드려 봤습니다. 감성이 본 영혼은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며 질서롭게 보였으며 아무런 부조화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인간의 영혼에 드러나 있는 상처를 상처로 판단하지 않고 영혼에 있는 필요한 상태로 인식하고 오히려 상처가 없는 영혼의 상태를 위험한 것으로 진단합니다. 저는 이런 진단을 “인본주의”라고 말하고 영혼의 상처를 입지 않은 상태를 “신본주의”라고 말하고 이것을 두 개의 질서로 보고 있습니다. 인본주의는 모든 사상이 인간이 중심이 되는 것이고, 신본주의는 모든 사상이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본주의는 타락한 인삼의 상태에서 나온 것이므로 구별할 필요가 없으나 인본주의가 있기 이전에 신본주의 사회에서는 도 다른 두 가지의 사상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유일신 중심 사상과 다신 중심 사상으로 구분합니다. 다신 중심 사상은 구별을 할 필요가 없으나 유일신 중심 사상은 또다른 구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일신이 진리는 아닙니다. 유일신을 신뢰하는 사상은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고 오직 유일하게 자기의 신을 신으로 신뢰하는 사상입니다. 하지만 이 신은 꼭 하나님만 유일한 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그가 어떤 신을 신으로 주장하는지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유일신을 중심한 사상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 신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라면 그 신은 참 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일신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은 성경이 말하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 중심 사상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재외한 모든 신들은 비록 그들이 유일신으로 말을 한다고 하거나 하나님이라고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신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신이 아니고 인간의 사상에서 지어진 왜곡된 지식으로 만들어낸 신일 뿐입니다. 범죄한 영혼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손상을 입었으므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삐뚤어져 있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의지적인 행위가 급하고 삐뚤어진 지식으로 말미암은 것을 따라가며, 감정은 무질서하고 자기 마음대로이며 자기 의지적입니다. 그 신은 사상이 유일신이라 할지라도 허상에 불과하고 허무한 하나님이며 심지어 성경을 의지한다고 할지라도 그 하나님은 진정한 의미로 성경이 말하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신을 믿고 섬기고 신자라고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그들이 누구인지 보여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저의 말씀을 들을 때 누가 유일신을 신뢰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지은 유일신을 섬기고 있는지 분명히 보시게 될 것입니다.

 

다음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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