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기 위해서 모세를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대리자 역할을 하면서 백성의 지도자로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생각하기 나름대로 모세의 말을 곧 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모세에 관한 기사를 살펴보면 절대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모세는 철저히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앞에 세웠고 백성들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 앞에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를 지식으로 알도록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시내산 아래 척박하고 식물이 잘 자랄 수 없는 모래 광야에 하나님의 임재는 쉬지 않았습니다.
매일 밤 만나는 그들의 양식을 위해 내렸고,
백성들이 이글거리는 뜨거운 태양에 상하지 않도록 구름기둥이 받쳐 서 있었고
태양이 지는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 추워지므로 추위를 이길 수 있도록 불기둥이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삶속에 깊숙이 계셨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모든 것들을 생각하셨습니다.
신명기 29:5에 보면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애굽에서 백성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온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 모세와 함께 시내 산에서 나라에 대한 조직을 다 반포하시고 계셨습니다. 본래 이 반포는 백성들 앞에 하시려고 하였으나 백성들의 대표들이 하나님의 강림을 보고 두려워서 모세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오도록 하였고 모세로부터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순종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함으로 이제 모세 혼자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법령과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율례와 법도를 듣고 있었고 이때를 기다리지 못한 이스라엘은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아침이면 떠오르는 태양과 밤이면 나타나는 수많은 성군들의 도열하는 장관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은 내일 아침 저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의심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일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누구든지 저 태양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정한 시간에 그 자리에 반드시 올라와 사람들에게 얼굴을 들어내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믿음 보다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지식이 수반 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고 사람의 영혼에서는 곧 바로 이신적인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람의 타락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없는 믿음은 그 믿음이 온전한 신앙으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근래에 이르러서도 지식을 수반하지 않은 많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신적인 기독교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시작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영혼의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 자기만족의 새로운 신앙을 찾아가 버렸습니다. 그들이 신앙하는 증거들이 눈에 보여지는 실체만을 신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이 찾아간 신앙은 분명한 이신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거짓된 지식에 미혹되어 그 거짓을 참된 신앙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계명을 다 말씀하시고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고 있는 진으로 내려 보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했음을 모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미 모세에게 백성들이 범죄하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백성이 부패 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출32:7~8)
(그런즉 내가 하는데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고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하리라. 출 32:10)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 그리하지 마옵소서
그렇게 되면 애굽에서 뭐라 하겠습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을 광야에서 죽이시려는 악한 의도를 가지셨다고 비난 할 것이 아닙니까?(출 32:12)그러므로 그들에게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말을 들으시고 뜻을 돌이켜 진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을 내려왔습니다.
근처에서 모세를 보고 있던 여호수아가 모세를 따라오는데 진중에서 요란스런 소리를 듣고 백성들 가운데 싸움이 일어난 것으로 착각하고 모세에게 말하자 모세는 이는 노래하는 소리다. 라고 말하고 진중에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백성들은 금송아지에게 예배하며 춤추고 노래하는 소리였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교회에는 음악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진과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나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면밀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고 무엇을 하시는가요?
우리가 목청을 높여 찬양하는 그 소리에 하나님은 뭐라고 응답하시는가요?
우리가 노래를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을 듣고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목청이 터져라!
감정을 돋구어서!
얼굴을 심각하게하고!
마음을 부여 잡고!
찬송의 가사를 음미하면서!
감정이 솟구쳐 두 눈에 눈물을 흐르고!
상황을 분간할 수 없는 황홀의 경지로 이끌어 들여!
마음 깊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목도하려고!
열창을 하고 열창을 합니다.
두 팔을 벌리며 얼굴을 하늘을 향하여 찬양을 하는 그들이 집중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는 그들의 가슴에 들어오시도록!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실까요?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두 팔을 벌리고 열창하는 그들의 가슴에 파고들어가,
“아 좋다”
“나를 믿는 너의 마음이 참으로 편안하다”
“내가 여기에서 쉴려고 한다.”
그러실까요?
북미지역에는 교회에는 대부분의 백인들이 자리를 떠나고 상당수 흑인들이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축제입니다.
춤을 추고 온몸을 진동하고 찬양을 높이 불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그들의 정신은 온통 축제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날의 예배는 경건은 실종되고 감동과 축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시는 감정은 있으나 실제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임하여 계시는지는 의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선포 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극히 가볍습니다.
신학적인 해석에 있어서 깊이도 없고 선포 되어지는 말씀이 무게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목소리는 또렸또렸한데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지시하는 모세의 돌판은 없습니다.
그것은 교리이고 하나님의 무거운 말씀이지만 목사가 들고 나와 강대상에 올려놓고 눈을 고정하며 설교의 원문을 읽어가기 시작합니다. 듣는 이에게 아무런 감동이 없는 솜털보다 가벼워서 지긋이 눈을 감도 잠을 청하는가 하면 어떤이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면서 다른 상념에 빠져 있습니다. 어떤이는 주보의 빈 공간에 끊임없이 뭔가를 적어대고 어떤이는 성경을 읽은 본문부터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면서 간간히 페이지를 넘기기도 합니다. 설교자는 설교자대로 설교원문을 읽느라 정신이 없고 단아래 성도들은 각자 자기 생각에 빠져 설교에 집중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도저히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사람의 삶과 거리가 먼 추상적인 상황들입니다.
한 거듭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자기의 죄를 깨우치고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도중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계셨고 자기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자기의 죄를 위해 죽게 하시고 자기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셨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읽고 알았습니다. 더군다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머리이며 그가 거듭나는 순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리스도의 머리이신 교회에 가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사실임을 확신 있게 깨달았습니다.
가족들에게 상세히 이르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토요일 저녁은 일찍 잠을 들고 하나님께 드릴 헌금을 준비하고 온가족이 손을 잡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일 예배에 나갔습니다.
예배는 시작 되었고 찬양을 높이 들리고 일어섰다, 앉았다, 예배의 순서에 따라 몇 가지를 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만나기를 공항을 마중나간 어린 아들과 같이!
기다리고 기다린 예배의 시간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받고 회심하고 나면 예배시간이 그리워집니다.
어느덧 예배는 마쳐지고 축도까지 지나가버리고 사람들은 서로서로 예배당을 빠져 나가려고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시간은 지나갔고!
한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기억조차 사라져 버렸습니다.
분명히 예배는 드렸는데,
하나님을 만났는지 아니면 안 만났는지 도무지 정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것은 분명히 성경을 통해 확인을 했고 감동도 있었고 눈물을 흘리는 회개도 있었으며 주님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감사와 죄 덩어리인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반복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지속되어야 했었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교회에서 한시간 동안 뭘했는지 도무지 캄캄하기만 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나갔습니다.
의례히 드려지는 예배,
순서에 따래 행해지는 설교와 찬양,
책을 읽는 듯한 아름다운 미사여구가 곁들인 기도,
발표회라도 온듯한 성가대의 찬양,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는 교회라는 생각 보다는 의식과 형식에 붙들린 예식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은혜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까지인지,
내게 뭐라고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백성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그 말씀을 받아오는 모세와 같은 마음은 오늘날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이 아닙니다. 불과 소수에 목회자들만이 피를 토하는 설교를 강단에서 외치고 있으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시내산에서 가지고 온 갖구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선포할 때 여러분은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 하나님께 무한이 고마운 일이며, 여러분이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을 불러주는 것이 하나님께 미치도록 감사할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오만 방자하게 하나님 앞에서 다리를 꼬며 앉아서 “그래 말해보세요 내가 들어줄께요” 라는 식으로 지긋이 눈을 감고 선포되는 말씀을 경청하면서, 말씀들을 해석하며 마음으로 밑줄을 그으며 토를 달아가며 반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힘들게 땀을 흘리며 여러분을 설득하시려고 안감힘을 쓰고 계시고, 여러분은 그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세로 바라보면서 “그것밖에 안되”라는 식으로 멸시하는 자세를 취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하나님도 어쩔 수 없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생각을 바꾸세요!
“이렇게 해주세요!”
제가 필요한 것이 있거든요!
그것을 해주세요!
하나님은 전능하시잖아요!
못하시는 것이 없으시잖아요!
제가 헌금을 드릴께요!
얼마면 되지요!
저 있지요!
지금 우리 남편과 갈등관계에 있습니다.
이혼 할까요!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거든요!
나도 이제 그 사람에게서 마음이 떠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애들이 말을 안 듣거든요!
계들에게 교회 안 나온다고 뭐라하지 마세요.
교회가 싫데요!
계들 잠시 눈감아 주세요!
정신 차리면 당연히 돌아 올 것입니다.
여려분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내산 진중에 우상을 만들어 놓고 춤추는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주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가지고 내려오고
진중에 백성들은 춤을 추고 놀고 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진은 결코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지만 진중에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부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깨뜨려 지지 않은 이름뿐인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은혜 가운데 머물고 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돌이키지 않은 영혼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의 지성과 의지와 감정이 뒤틀려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의지가 하나님을 찾으려 하면 지성의 왜곡된 하나님의 지식을 제공합니다.
감정은 그 하나님을 자기 나름대로 표출하여 하나님이 아닌 허무한 하나님을 영상에 심어 둡니다.
영혼은 영상에 새겨진 그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에는 하나님이 새겨져 버렸습니다.
계속이어서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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