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대로 살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생명있는 신앙 2010. 11. 8. 17:34

육신대로 살면(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육신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복음이란 무엇인가?
전도 받은 사람이 가장 먼저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복음으로 인한 변화에 대해서 생각이 바뀌고, 그토록 거부하던 종교적인 주장들이 이해되고, 진리라고 생각해 왔던 자신만의 지식들이 쓸모없는 것임을 알게 될뿐만 아니라 삶의 방향까지도 바꿔집니다. 
어떻게 사람의 삶이 180도 전환되고 가던 길을 돌이켜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는지 이해할 수 없으며, 그토록 불합리하다고 생각되어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받아들여지고, 그것으로 인하여 가슴이 복 받혀 오르고,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볼품없고 부족함으로 가득 채워진 벌레와 같은 자신을 발견하며, 죄속에 파묻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애통해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역사가 자신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스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
그 원동력은 참된 자아를 발견하게 하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복음이 사람의 영혼에 들어오면 지성에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고 사고할 수 있게 됩니다.
복음은 그 지식이 타락된 본성으로부터 생겨난 지식과 본질이 다릅니다.
복음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어진 진리의 지식이고, 자기안에 있는 본성의 지식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타락되고 왜곡된 지식입니다.

복음은 거짓이 없는 완전 무결한 깨끗한 지식인 반면, 자기안에 있는 지식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이기 때문에 두 지식은 결코 유기적인 연합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두 지식은 각기 독립적 의식으로 지식체계를 갖게되는데, 일단 복음이 지성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게 되면 복음적 의식으로 타락된 자기 자신의 본성을 지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에 대한 객관적 자기인식이라고 하고, 자신의 정체를 보는 놀라운 경험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개개인의 영혼안에서 일어나는 복음적 의식과 타락한 본성의 의식의 지식체계를 통해서 경험하는 자기 체험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빠짐이 없이 고루 비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피조물에 두루비취고,
하나님의 생명의 힘은 끈임없이 공급되어짐으로 세상은 존재합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어지는 은혜를 벗어나 생명을 유지하거나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서 지으실때 동일하게 은혜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비침 곧 조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게만 독특하고 특별히 불같은 성령을 비취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일하게 비춰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가 자기에게만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고 말하는 주장은 공평하신 하나님을 은혜를 잘모르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비취는 성령의 은혜가 어떤 사람에게는 불과같은 폭발력을 가진 힘으로 나타나고 어떤이에게는 산들바람에도 꺼져버릴 것 같은 연약한 촛불처럼 느껴지며, 어떤이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조명을 받을 수 있는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와, 12제자들 가운데 한권의 성경도 기록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개개인에게 별도로 부여하시는 특별한 관심 때문에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의 역사는 동일하지만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의 차이가 제자들에게 나타나는 역사적 사건을 드러내는 차이입니다. 
오늘 우리모두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는 소위 은혜를 별도로 받은 것처럼 크게 일하는 특별한 사역자에게 크게 부어주셔서 특별하게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에게는 미미한 은사만으로 하나님을 붙잡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칠흑같은 어두움속에 하늘위에서 내리는 밝고 빛난 조명이 자신을 향하여 둘러치고,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들어온 복음을 비췹니다.(이를 성령의 조명하심이라고 합니다.) 

지성에 뿌리내린 복음의 크기가 큰 사람, 곧 복음이 지성에 심겨져서 이미 크게 성장한 상태에 있는 사람과 방금 복음을 들음으로 심겨져 아지 뿌리를 내리지 않고 안착되어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성령 은혜에 따른 상태의 충격파는 분명히 다릅니다.

12사도들과 사도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충격은 성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다이나믹하고 강렬합니다.
이런 사건은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강한 반응으로 거절하고, 왜면하던 사람이, 성령의 빛의 조명하심에 반응하게 되는 때 드러내는 반응은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은 큰 충격으로 나타날 것은 분명합니다.
반면에 아주 간단한 복음 만으로 잔잔하게 반응한 사람은 동일한 성령의 조명하심이지만 복음이 드러내는 반응에 의해 지각되는 영혼의 반응이 잔잔하게 승복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깊고 어두운 영혼의 지성에 성령이 조명하시게 되었을때 복음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에게는 자기 본성의 타락된 지식의 반응으로 강한 거절감만 나타내는 것과, 그러나 얼마간이라도 뿌리를 내린 복음이 있어 성령의 조명을 받는 다면 그 복음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자기 지각을 가지게 되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복음의 지식을 지각한다는 것은 본래 본성인 자기와 별도의 자신이 세워지게 되고, 이 사람에게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의식과 본성의 의식이 자기 인식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은 이 사람을 거듭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데, 한 사람안에 두 의식이 존재한다고 표현하면 가장 이해하기 쉬운 표현일 것입니다.

이 의식은 선과 악의 의식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지음을 받은 본성의 사람과 지음을 받은후 타락된 본성의 사람인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점차 자기인식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향후 어디로 가며,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인식하게 합니다.

이 사람은 사람안에 사람을 움직여 살게하는 새로운 시스템으로서 복음의 사람이 정착된 것입니다.

그 시스템이 오기 전에는 복음과는 전혀 다른 시스템이 장착되어 사람을 움직여 살게 했는데, 그 시스템은 왜곡된 시스템으로 본질상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는 시스템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시스템은 뭐든지 하나님의 뜻과 반대 되는 대로 움직여 행동하게 합니다. 

최초 인류가 타락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려고하는 그 의식의 시스템이 곧 타락한 본성의 시스템이고, 이것은 사람의 영혼 안에서 사람을 지적으로 살게하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이었던 것입니다. 

첫 사람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은 그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지성에는 왜곡과 거짓이라는 시스템(거짓된 지식)이 장착되어 왜곡과 거짓으로 살 수 밖에 없는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복음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이 장착되고, 그 복음으로 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새로운 삶" 예수께서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복음이 그 영혼의 지성에 들어가 뿌리를 내리고 의식할 수 있는 삶을 이끌어내는 것을 말하므로 이 복음으로 인해 타락의 근본적인 사람으로부터 새 사람으로 바꿔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처럼 사람을 완전히 새사람으로 살게하는 "복음"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리고  복음을 귀로 듣기만 했는데,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켜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으며, 어떻게 사람안에서 역할을 하는지 오늘부터 살펴 보려고 합니다.

 

1. 복음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복음이라는 말은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라고 합니다. 이 복된 소식은 예루살렘에서 발하여(눅 24:47) 사람의 귀에 전파되고, 다시 사람의 입에서 발하여 귀로 전파되는 반복적인 전파에 의해 사람에게 전해져 온 것이라고 성경이 말합니다.  

사람의 귀에 전파된 복음은 사람 영혼의 지성에 들어오면 이 복음을 밝게 비춰 주시는 성령의 조명하심에 의해 복음이 지성에 새겨져 작용하는 지식이 됩니다.
작용하는 지식이 된다는 것은 들어온 복음이 새로운 시스템이 되어 사람으로 말미암아 복음에 의해 생각하고, 사고하며,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하고, 행동하며 반응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게하는 씨앗입니다.
이 씨앗이 터전을 잡고 뿌리를 내린 다음 자라면서 자기의 지식체계를 가지고 생각하고, 사고하며,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지각된 지식을 내게됩니다. 

그러나 복음이 뿌리를 내렸으나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그 복음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성령은 밝게 비춰주고 조명하는 사역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령께서 사람의 영혼의 지성을 밝게 비춰 조명하시는 사역은 아주 보편적인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행하시는 생명의 사역입니다.

앞에서 표현한 것처럼 지음을 받은 사람은 실지로 스스로 삶을 운영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는" 스스로가 아니고 끊임없이 생명력을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이 말은 어떤 외부적인 조력이 없이도 자기안에서 솟아나는 생명력으로 삶을 운영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음을 받았다"는 말과 "창조자"라는 말은 전자는 "생명을 공급받는 자"라고 하고 후자는 "생명을 공급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피조물인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합니까?
아마도 여러분들은 이미 느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생명이 일어나게 솟구치는 에너지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파악했을 것입니다.
생명은 "지식"이고, 하나님 안에 있는 지식은 영원히 솟아나는 무궁한 지식으로 완전한 진리의 지식이고, 사람에게서는 영원한 진리의 지식이신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에 의해 얻어지는 지식이 생명인 것입니다. 
 

 

생명인 지식,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결합하여 하나의 전인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영혼과 육체는 각기 인격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역할에 따라 충실히 작용함으로 전인 안에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람으로 작용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마음을 통해 인식하는 모든 지식은 자기 영혼의 지성에서 자기 지식으로 생성되어 영혼의 감성이 감각을 가짐으로 지각되고 지각된 지식이 전인의 마음으로 반영하여 비로써 인식한 후 행동으로 나타내게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삶을 드러내는 과정은 먼저 영혼의 지성이 지식을 생성하면. 영혼의 감성은 이 지식을 지각합니다. 여기까지가 사람이 행동하려는 지식을 생성하는 영혼의 인격적 과정입니다.
이 다음으로 영혼은 지각된 지식을 마음, 곧 의지의 기관에 보내어 반영합니다.
마음은 반영을 받은 지식대로 행동을 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 판단하게 됩니다.
사람은 영혼의 지성이 반영한 대로 모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판단하는 마음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기관으로 사람의 얼굴 역할을 하는 영혼의 의지와 육체의 의지가 결합된 기관입니다.(잠23:7)
그래서 마음이 그러하면 그사람이 어떠한지 판단을 받게됩니다. 

마음에 악을 품으면 그 사람이 악하고, 마음에 선을 품으면 그 사람은 선하다고 판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반영된 지식에 따라 행동하도록 결정된 일은 육체의 일로 나타나고, 그 행위로 인한 결과적 감정을 느낌으로 받게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할 것인지, 영혼의 지성이 생성한 지식을 받은 마음의 결정에 달려 있고,  육체가 그 지식대로 행동함으로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의 영혼에서 지식을 생성하여 마음에 반영하지 않으면, 사람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삶을 나타내지 못함으로 생명이 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는 유일한 기준은 영혼의 지성이 지식을 생성하여 의지기관에 반영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이 늙어 노쇠하여 죽으면 영혼의 지성이 지식을 내지 못합니다. 

지식을 못내면 그 사람의 마음에 생명이 없게되고 행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다른 점은 지식을 스스로 생성하는 존재인지 여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지만, 사람은 별도의 조명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지식을 생성할 수없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별도의 지식의 조명을 받아야 하는 이유, 

사람은 자의적 존재가 아닌 지음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의존적 존재입니다.
스스로 살지 못하고, 생명의 원인이 외부적 공급으로만 생성되는 것입니다.(성령의 조명) 
결국 사람은 스스로 지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사람이 가진 모든 지식은 반드시 별도의 지식의 조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 지식이 참이든 거짓이든 반드시 조명되어야만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결코 자기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의지적 존재인 것입니다.

복음이 사람에게 인식될 때 영혼과 육체의 작용적 기저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귀를 통해 복음을 듣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행위가 예전과는 다른 변화된 사람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대한 지식을 보는 것으로 느낄때 그 느낀느 감각과 귀로들은 복음에 대한 지식이 표상화하여 영혼의 지성에 반영합니다. 
영혼의 지성은 반영된 그 표상들은 인식하기 위해 일치한 지식을 찾습니다. 이때 지성안에 이미 가지고 있던 지식들로 표상에 조명하여 찾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표상"(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복음적 행위와 복음의 소리로서의 지식)과 일치한 지식이 지성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때 이미 일치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지식에 의해 곧 바로 영혼의 감성에 반영하여 지각하고, 지각된 지식을 즉시 전인의 마음에 반영하여 인식하면 동질성으로 인한 기쁨의 감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지식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표상"이 전혀 새로운 행위와 지식으로 반영된 것이라면 두가지의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는 지성에서는 그 보고 듣는 표상에 관한 지식을 조명 받지 못하면 감성에서 지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마음에 반영하지 못하므로 무시하고 지나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는 지성은 표상과 비슷한 지식으로 조명하여 "표상"을 왜곡하는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하므로. 본질과 왜곡되게 지각을 하고 그 왜곡된 지식을 마음에 반영하여 "표상"과는 다른 인식을 하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일이 분명히 있었던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사람 가인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으며,
다메색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이전 사울에게도 나타났었습니다. 

가인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보자면,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복음의 실체를 보고, 그 복음과 소통한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가 만난 그 하나님을 실재 그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가인이 인식하는 하나님은 말씀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자기의 지성안에 그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이 없습니다. 
그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벨을 죽이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떠나가버리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두 제사의 구별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습니다.
가인이 인식하는 하나님은 자기의 개념으로 인식하는 하나님입니다.
즉 자기 지식으로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므로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시고 조명하시지만, 자긴은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므로 실재 하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자기가 인식하는 자기 방식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반면 아벨이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벨의 지식에서 드러났습니다.  아벨에게도 역시 가인에게 조명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가인과 같이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아벨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조명하시자 자기안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인식하도록 유기적으로 작용하였고 성령의 조명하심이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지음을 받은 인류가 생산한 첫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작정에 부합하는 그들의 본성대로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관계하여 가인은 가인의 본 모습대로 아벨은 아벨의 본 모습대로 드러나도록 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라고 한 아버지로부터 태어났지만 완전히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형상과 성격, 그리고 행동과 작용적인 인식능력이 구별될 수 없이 동일하게 작용되는 사람었으나, 가인은 태어나도록 허락에 의해 존재된 사람이고, 아벨은 아담을 지으실 때 아담으로 말미아마 태어나도록 이미 계획되어진 아들이었습니다.

창세전에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은 특별한 섭리가 아니고는 바꾸어질 수 없습니다.
심지어 특별한 섭리마져도 작정에 포함되기 때문에 작정과 허락, 곧 허용적 작정에 의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는 변할 수 없는 창조의 질서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질서에 따라 가인과 아벨은 태어났는데, 가인은 허락에 의해 태어난 사람인 반면 아벨은 계획된 작정에 의해 태어난 사람으로 서로 구별된 존재입니다.

작정은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이 되는 계획이고, 허용적 작정은 창조로 말미암아 생겨난 피조물들이 변화를 일으켜 작정으로 말미암은 질서를 무너뜨리는 부조화가 발생하였을 경우로 말미암은 부득이한 결과물들을 허락하심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일어난 결과적인 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일어난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처음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그결과로 사람들은 죄인이 되었고, 죄인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모든 일들에 관하여 허락하심으로 허용적 작정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허용적 작정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속에 포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들이 무엇인지도 아시고 결과로 말미암은 발생과 소멸까지도 이미 다 아시고 계십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작정을 중심으로 창조가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작정으로부터 허용적인 작정의 사건들이 발생했을 지라도 허용적 작정안에서 하나님의 작정은 한치의 흐트로짐이 없이 완전하게 성취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에게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아벨이 태어나 희생을 당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아벨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이어가는 작정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그 작정 조차도 오염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에 속한 아벨마져 죄에 오염되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피조물 사람

사람이 최초 창조 되었을 때 본유적으로 받은 지식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그 목적대로 살지 않고, 자기 정욕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지음을 받았고, 영혼에는 그 지식이 빛을 발하여 사람의 육체에 찬란하게 반영되므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이고, 모든 피조물보다 탁월함이 드러냈습니다.
본유적으로 받은 그 지식이 사람을 아름답고 탁월한 모습을 드러내게 했으며, 아름다움은 지식의 빛이 육체에 반영되어 빛나게 했고, 사람을 모든 면에서 탁월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지식을 잃어버렸고, 즉시 영혼의 전체 곧 지성은 어두움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엡 4;18, 사 59:9).
그 본유적 지식은 하나님의 형상이었고, 사람의 영혼에 새겨져 있어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여 육체에 반영됨으로 모든 피조물보다 사람을 아름답게 하고 탁월함을 빛내게 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지성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본유지식"으로 최고의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식하시는 "선의 극치" 였었고, 하나님을 이를 "보기에 매우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오랫동안 본유적인 지식인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비참으로부터 어두운 가운데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첫사람의 타락은 하나님이 지으신 최고의 아름다움인 "보기에 매우 좋은 것"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감각은 지음을 받은 사람 그 어느누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드러내주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기에 매우 좋은 사람"인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2천년 전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고, 최초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복음을 외쳐 사람들의 귀에 전파하였고, 귀에 전파된 복음이 사람들의 영혼에 들어와 자리 잡게 되자 어두워 있던 영혼을 밝혀 주었습니다.

복음이 사람의 영혼에 자리 잡고 빛을 발하였을 때 영혼의 상태는 무질서하고 정돈되지 않아 혼란스럽고 헝클어져 있으며 청소되지 않은 지저분한 방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복음의 빛에 의해 자신을 비춰본 사람 스스로 자신의 영혼은 도무지 정리할 수 없는 무질서의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이처럼 혼란스럽고 헝크러진 지식으로 세상을 살았다는 것이 가히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 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처음 고백하는 말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사도행전 2”37)”라 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의 영혼을 자기 스스로 정리할 수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께 아주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살아온 죄인이었고 영혼이 힘이 없는 무능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무엇이기 때문에 사람의 영혼에 빛을 발하여 사람을 변화시키는 요인이 됩니까?

인류는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을 통해 세계가 변천해 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과학문명의 발달과 최첨단 IT 사업의 발전으로 복잡하면서도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인류의 변화를 끊임없이 진보하고 발전해 나아가지만 인간의 정신세계는 더욱 피곤하고 혼란스러워 많은 다양한 문화혜택에 비하여 더욱 피폐해 가고 있습니다.

인류는 진보된 다양한 문화혜택에 비해 결코 편안한 삶을 구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각종 질병들의 출현과 적나라한 인간의 비밀들이 밝혀지고 정신은 더욱 두려움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결코 인간의 삶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기후의 변화와 전쟁, 천재지변 등은 인류가 결코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게다가 모든 사람의 생명은 제한적이어서 반드시 죽음을 맞이해야 하고 인류는 필연적인 멸망 앞에 서 있는 상태입니다.

개개인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위험과 불평등한 환경들이 삼킬 듯이 에워싸고,

숨막힐 것 같은 고통스런 환경에 둘러 싸여 하루도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잠시 행복한 한 삶이 있었는가 하면 곧이어 다고 오는 인생은 덧에 걸린 짐승처럼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또 다른 양태의 삶속으로 빠져 들게 됩니다. 

새로운 것 같은 삶,

희망적인 삶속에는 예기치 않은 수많은 환경들이 숨막힐 정도로 에워싸고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밝고 명랑하고 항상 따뜻한 것 같은 얼굴의 뒤에는 수많은 아픔과 슬픔을 가슴에 담고서 거센 인생의 폭풍우를 해쳐 나아가야만 합니다. 

질병과 고통의 아픔에 신음하거나,

미래의 희망을 잃고 아파하거나,

불행한 가정형편으로 인한 감당할 수 없는 고통,

결코 벗어날 것 같지 않은 아픈 인생 속에 사람은 갇혀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람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고,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으며,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없는 인생은 긴장감이 없어 결코 사회적일 수 없고,

질병과 싸우며 인생을 사는 사람은 죽음과 싸우느라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역경을 딛고 인생을 성공의 높은 위치에 올려놓은 많은 사람들에게 놓여진 눈앞에 보이는 다음 장면은,

날개가 없기 때문에 추락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공은 결코 부러운 것이 아니라 더 큰 아픔을 위하여 주어진 부담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무엇입니까?

왜 행복을 추구하고, 무엇 때문에 욕심을 한없이 추구하고, 명예, 국가, 사랑, 자존심 이런 것들을 위해 생명을 바치기도 합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파해치고 다 안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수많은 철학, 과학, 수학, 종교가 들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토록 수고하며 땀을 흘렸는데 왜 인류는 문제와 아픔과 고통과 불행을 해결하지 못하고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약속하셨고, 마침내 주셨던 것입니다.
복음은 네가지 의미로 정의합니다. 

1,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에게 내어주었습니다.

3, 이방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음에 내어준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죽음에 내어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죄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의 핵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어주셨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내어주었으며, 이방인인 우리가 내어주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였고, 하나님께서 죄를 씻으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최종으로 우리가 죄를 씻기 위해 죽여야만 한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아픔이고,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어야만 하는 우리 지성으로 깨달아 알고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에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벌래같은 우리를 구하시려고 자신을 희생의 도구가 되셨는지..................
그 깊고 넓은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복음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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